|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데니스 레이더 Dennis Rad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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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5년 3월 9일 ([age(1945-03-09)]세) |
| 캔자스 주 피츠버그 | |
| 국적 | |
| 신체 | 180cm |
| 가족 | 아버지 윌리엄 엘빈 레이더(1922~1996) 어머니 도로시 메이 레이더(1925~2007) 남동생 3명 |
| 자녀 | 딸 케리 로슨 외 1명 |
| 학력 | 위치타 하이츠 고등학교(졸업) 캔자스 웨슬린 대학(중퇴) |
1. 개요
범죄 자백 육성 풀영상, 관련 다큐
미국의 악명높은 연쇄살인범. 소아성애와 성도착증, 고문 등 괴이한 행동을 보이며 범죄적 우월감을 느낀 것으로 잘 알려진 범죄자이다.
일명 'BTK'(Bind, Torture, Kill[1][2])로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교살해 죽였다.
2. 생애
고등학생 시절의 레이더.
캔자스 주 피츠버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9살 때부터 성도착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복장 도착, 결박 집착, 성 가학증 등을 보였다. 1966년 공군에 입대하여 1970년까지 대한민국, 튀르키예, 오키나와 등에서 복무했으며 1974년부터 가정용 경보기 업체에서 근무했다.
디텍티브라는 BDSM 잡지에 심취해있었는데 상당한 사디스트였고 동시에 나르시시즘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74년 군 동기의 일가족 4명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10명을 살해했다. 그의 수법은 매우 잔인하고 변태적이었는데, 교살시킨 사체에 외설행위를 하고 또 주로 집안에서 범행이 이뤄졌다. 또 자신의 살인 현장에서 전리품처럼 물건을 수집해가는 습관이 있었다.
1991년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가 2000년 3월, 1986년의 살인사건과 관련한 편지를 위치타의 한 신문에 보내 전국적인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그는 최소한 여덟 통의 편지를 언론 또는 경찰에 보냈으며 그 중 세 통은 희생자들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와 운전면허증을 포함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자신이 1939년생이며 아버지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숨졌고 자신도 군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고 구체적인 신상을 털어놨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9년에도 63살 여성을 살해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기다리다 지쳐 범행을 포기한 후 뒤늦게 이 여성에게 "오, 애너여 왜 나타나지 않았는가"라는 내용의 시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대담성을 보였다. 레이더는 언론을 타는 것을 좋아해 한 번은 자신이 지역 신문에 보낸 편지가 보도되지 않자 광분한 나머지 한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 "내 이름이 신문에 나거나 국민적 관심을 끌기까지 얼마나 더 죽여야 하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는 희생자들을 성폭행하지는 않았으나 희생자들을 상대로 성적인 쾌락을 얻은 증거로 현장에 정액까지 남겨왔다.
딸인 케리 레이더와 함께 찍은 사진[3]
그러면서도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 겉으로는 지역 초등학생 보이스카우트 '컵 스카우트'의 책임자이자 Christ Lutheran Church 교회 운영위원장으로 성실히 신앙 생활을 해왔다.
한데 2004년 3월, 난데없이 지역 신문사에 자신이 살해한 또 다른 피해자의 소지품이 담긴 우편물을 보냈다. 그 뒤에는 이곳저곳의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과거 살인 행각을 자랑했다. 어떤 편지에서는 자신의 부모와 성장 환경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동안 법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미국 경찰은 70년대에는 불가능했던 유전자 감식(DNA 검사)[4] 등 갖가지 첨단 과학을 동원해 추적에 나섰고 1년여 만인 2005년 2월 드디어 레이더를 범인으로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첫 번째 범죄 발생 후 31년 만이다.
검거 방법은 이랬다. 미국 경찰은 지속적으로 지역신문에 데니스 레이더의 별명이었던 'BTK 살인마'를 찬양하는 뉘앙스의 짧은 편지를 주기적으로 광고했다. 레이더는 그 광고를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지역신문에 종종 도발하는 편지를 보냈다.[5] 하루는 레이더가 편지에 자신이 소포 두 개를 남겼다며 그 위치를 알려준다. 한 군데는 위치타 북부 비포장 도로에 세워진 도로 표지판이었는데, 표지판 아래에 시리얼 상자를 묶어 놓았다. 상자 안에는 바비 인형이 플라스틱 파이프에 목이 메달려 있었는데, 이는 레이더의 첫 번째 사건에서 살해 당한 오테로 딸의 모습과 일치했다.
두 번째 소포는 미국 대형마트 홈디포였는데 공간이 넓어 경찰은 수색에 난항을 겪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홈디포 직원 게시판에 수상한 물건을 발경하면 신고하라는 게시글을 부착한다. 며칠 후 수상한 시리얼 상자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는데 홈디포 직원이 자신의 차량에서 그 상자를 발견해 집으로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상자를 즉시 회수한 경찰은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종이에 단어 찾기하듯 알파벳이 나열되어 있어다. 분석 결과 범인을 특정할 단어나 DNA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수사에 물꼬를 트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바로 홈디포 CCTV 영상이었다. 두 번째 시리얼 상자를 신고한 홈디포 직원이 상자를 발견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상을 확인해보니 해당 날짜에 용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차량을 발견한 것이다. 영상 화질을 포렌식한 결과 해당 차량은 지프 체로키로 확인된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더는 대담무쌍하게도 플로피 디스크를 보내면 자신을 추적할 수 있냐는 편지를 보낸다. 레이더는 당연히 추적 못할 것이라는 전제로 도발을 했지만 당시는 이미 플로피 디스크에서 사용자와 주소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경찰은 레이더를 자극하기 위해 그가 평소 자신의 별칭으로 원했던 '렉스'에게 라는 제목의 작은 신문 알림글 형식에 아무일 없을 것이며, 사서함으로 보내라고 답장을 한다.
드디어 한 방송사에 컴퓨터 플로피 디스크가 도착한다. 경찰이 플로피 디스크를 열자 제목이 'test'라고 된 워드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경찰은 즉시 해당 파일을 포렌식 했는데 저장한 사람의 이름은 '데니스'였고, 주소는 Christ Lutheran Church라는 교회였다.
분석관이 인터넷에 해당 교회와 데니스를 검색하자 레이더의 사진과 함께 그가 교회의 회장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 둘이 있었으며, 지역 준법감시관으로도 활동하는 등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6]
레이더의 자택 주소도 확인한 형사들은 즉각 체포하려고 했으나 직접 증거가 없었다. 그러던 중 레이더의 딸 한 명이 켄자스 대학에 재학 중인 것을 알아낸다. 해당 대학은 여자 학생들에게 무료 건강검진을 제공했는데, 경찰은 그때 체취된 레이더 딸의 DNA를 압수한다. 경찰은 즉시 레이더의 첫 번째 사건인 오테로 일가족 현장에서 확보했던 DNA와 대조했고, 레이더와 일치했다.
경찰은 즉시 레이더의 집으로 출동했고, 퇴근 중이던 레이더를 체포한다. 이때 레이더는 경찰에게 "아내에게 집에서 점심을 못먹겠다고 얘기해주세요. 제가 어디 사는지 아시죠?"라고 했다고 한다.
경찰은 나르시시트인 레이더를 추켜세울 작전으로 FBI요원과 경찰 부서장이 직접 조사를 한다. 부서장이 검거 경위를 설명하고 이제 인정하라고 하자 레이더는 자신이 BTK라고 자백한다. 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이 벌인 연쇄살인이 인생 최대 업적이라도 되는 듯 자랑했다고 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레이더는 캔자스 주가 사형제를 부활시킨 1994년 이전에 범행을 저질러 사형은 면하게 되었고, 175년형을 선고받아 엘도라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데니스 레이더가 체포된 지 약 5개월 정도가 지난 2005년 7월, 레이더의 아내는 이혼 소송을 냈다.
2.1. 피해자
- 1974년 1월 15일
- 조셉 오테로(38) : 빨랫줄로 교살.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움
- 조셉의 아내 줄리 오테로(33): 빨랫줄로 교살.
- 조셉의 아들 오테로 2세(9):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
- 조셉의 딸 조세핀(11): 빨랫줄로 교살. 사체에 자위행위 함.
- 살인 현장은 학교수업을 마친 나이 많은 세 자녀들이 발견함.
- 1974년 4월 4일
- 캐서린 브라이트(21): 교살하려 했으나 격렬하게 반항해 실패하고 칼로 등과 복부를 찔러 살해.
- 캐서린의 남동생 케빈(19): 데니스와 격투를 벌이다 머리에 22구경 총을 2차례나 맞았으나 생존.
- 1977년 3월 17일
- 셜리 비안(24): 밧줄로 교살.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움.
- 살인 현장에 그녀의 아이 3명이 있었으나 그녀의 부탁으로 데니스가 아이들은 화장실에 몰아넣고 문을 잠가 생존할 수 있었다.
- 1977년 12월 8일
- 낸시 폭스(25): 스타킹으로 교살.
- 1979년 4월 28일
- 안나 윌리엄스(63): 빈 집에 침입한 뒤 살해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우연히 그날 그녀의 귀가가 늦었고, 데니스는 기다리다 지쳐서 "널 죽일 계획이었는데 왜 오지 않는가."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 1985년 4월 27일
- 마린 해지(53): 집에 침입해 손으로 교살. 또 사체를 차고로 옮겨 외설적이고 모욕적인 사진을 찍었다.
- 1986년 9월 16일
- 비키 위걸리(28): 전화 수리공으로 위장해 집에 침입한 뒤 스타킹으로 교살.
- 살인 현장에 2살짜리 갓난아들이 있었으나 사건 당시 자고 있어서 화를 면했다.
- 1991년 1월 19일
- 돌로레스 데이비스(62): 팬티 스타킹으로 교살.
3. 여담
-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의 딸은 매체 인터뷰에 자주 출연했다. 딸의 인터뷰 영상, # 아버지의 연쇄살인을 알게 된 후부터 엄청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검거 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가족끼리 캠핑을 간 날에도 살인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잠깐 비운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2005년 체포된 이후 면회를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 장기 미제 살인사건이었기 때문에 피해자 유족들도 큰 고통을 받았는데, 피해자 비키 위글리 남편의 경우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경찰에게 시달려야 했고 그 자녀들도 학교나 사회에서 오해와 조롱을 받는 등, 진범이 검거되기 전까지 수 십년간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
- 미국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스티븐 킹이 데니스 레이더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중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중편 모음집 '별도 없는 한 밤에'에 실린 '완벽한 결혼 생활'이라는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됐다.
- 레이더를 모티프로 한 "더 클로브히치 킬러" 라는 영화가 2018년에 개봉했다. 다만 레이더가 실제로는 경찰의 집요한 추적한 추적으로 잡힌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살인마의 아들이 피해자의 딸과 협력하여 아버지를 추적하는 것으로 나온다.
- 넷플릭스 드라마 마인드헌터에도 비중있게 다뤄졌다. 주로 오프닝에 등장하다 시즌2 마지막 화 끝에 출연해 충격적인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들이 만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범행 수법을 추적 및 분석한다. 시즌 1에서는 사진들로만 분석하다가 시즌 2 2화에서 빌과 드로츠키 형사가 오테로 가족 사건 현장 탐문과 다른 사건 생존자를 인터뷰한다. 참고로 트로츠키 형사는 실제로 레이더를 체포한 켈리 오티츠 형사를 모티브로 했다. 배우와 실제 형사의 외모 싱크로율이 높다.
- '과몰입 인생사' 2024년 8월 22일 자 방송분에서 관련 사건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에 한국과 일본에서도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수사본부가 2024년 4월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했으며,[7] 취재진도 데니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기사들을 확인했으나, 한국에서는 당시 사건이[8]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인은 어려워, 딸을 통해서 이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데니스에게 문의해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1] 묶고, 고문하고, 죽인다.[2] 이 별명은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다.[3] 2003년 결혼 후 남편의 성씨를 따라 케리 로슨(Kerri Rawson)으로 개명했다.[4] DNA 검사는 1986년 영국에서 첫 시도된 이후로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살인사건 해결에 이용되기 시작했다.[5] 사실 경찰과 주고 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신문사의 편지는 모두 경찰로 넘어 왔으니 말이다.[6] 경찰은 용의자가 매우 똑똑하고 독신일 거라 의심하기도 했다.[7]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마라도, 첫 살인부터 여러명을 살해하는 건 보통 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정황상 미국에서 살인을 하기 이전에 이미 살인을 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8] 공군 복무 당시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있었으며, 이 시기를 두고 "아시아 여성들과 '실험'을 했었다"는 진술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당시에 유사한 수법의 미제 사건 기사들을 취재진이 확인했었다. 해당 기사는 2건이며 1968년 9월 16일 동아일보, 1968년 9월 17일 조선일보를 방송에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