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日本武徳会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 존속했던 일본 제국의 무술 단체.
1. 개요
메이지 유신이후 신정부는 무도를 필요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다지 관심 가지지 않았으나, 많은 무술가들의 노력과 서남전쟁 당시 발도대의 활약 등으로 인해 무도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청일전쟁 승리 직후 애국심이 고취된 분위기 속에서 무술 전문 단체인 대일본 무덕회가 조직되었다.2. 역사
설립 당초에는 천황이 관람하는 무술경기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하였다. 자금은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모으는 것으로 충당하였고 회원수가 목표에 도달한 지역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지부를 건설하여 점차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1910년대에 들어서는 회원수 100만명 이상[1] 의 거대 조직이 되었다. 검도를 체계화한 것이 무덕회의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였으며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 박사 또한 무덕회 소속이었다.휘하에 무술 전문학교를 두어 검도, 유도를 가르치는 교사를 양성했다. 해당 학교에서의 연습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할정도로 격렬히 이루어졌다 한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조직이 완전히 개편되어[2] 정부직속 단체가 되었다. 본래 교토에 있던 본부가 도쿄로 이전했고 소속 회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42년 말에는 무려 200만명 이상의 회원수를 가지게 되었다. 패전이 가까워지자 본토 결전에 대비해 민간인에게 총검술 등을 교육하기도 했다.
미군정청은 무술 같은 것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종전 이후에도 해체하지 않고 존속하였다[3]. 그러나 간부급 인사 일부가 전범혐의로 잡혀들어가고[4] 종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탓에 신임 회장과 간부진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1946년경 스스로 해산했으며[5] 산하의 무도학교도 문을 닫았다. 이후 검도, 유도를 포함한 산하 단체들은 독립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다만 대일본 무덕회를 칭하는 단체는 아직도 존재한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된 뒤, 일부 무술가들에 의해 재건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전일본검도연맹과 같은 무술을 주관하는 다른 국가단체들이 자리를 잡은 뒤였고, 정부의 의견또한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큰 규모를 갖추지는 못했고, 거합도 위주로 돌아가는 작은 무술단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