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단경옥 段慶玉[1]殷慶玉이 기재돼 있다. 판결문 원문을 봐도 段이 아니라 殷으로 오해할 수 있을 만큼 글자가 닮았다.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1심 판결문과 1919년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 2심 판결문은 아예 殷으로 잘못 판독해놨다.]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4년 1월 8일 |
충청도 충주목 신곡면 신의리 (現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신의마을 489번지) | |
사망 | 1943년 10월 13일 (향년 49세) |
충청북도 음성군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320실-8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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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1월 8일 충청도 충주목 신곡면 신의리(現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신의마을 48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신니면 용원리에 있던 용명서당(龍明書堂)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잡화상으로 일했다.1919년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음을 듣고는 그 취지에 공감하여 3월 31일 이희갑(李喜甲)의 집에서 집 주인 이희갑을 비롯해 이강렴(李康濂)·손승억(孫承億)·윤주영(尹周榮)·윤무영(尹務榮)·이강호(李康滈)·김은배(金殷倍)·한태억(韓泰億)과 함께 이튿날인 4월 1일의 신니면 용원리 장날을 이용해 용원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이희갑·이강렴과 함께 만세시위의 대표를 자처해 기미독립선언서 7통을 베껴 쓴 뒤 손승억의 주도하에 이를 등사하고, 윤주영·윤무영 ·이강호·김은배 등과 함께 태극기 9개를 제작했다. 이후 거사 당일인 4월 1일 먼저 자신이 수학했던 용명서당의 학생들을 포섭해 동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 교사의 제지가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이들을 인솔해 용원리 장터로 갔다. 그곳에 모인 50여 명의 군중들에 앞장서서 전날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쳐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태극기를 흔들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체포되어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했으나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또한 상고했으나 8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3년 10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별세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7년 7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 320실에 이장되었다.
[1]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 상고심 판결문에는 이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