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4:40:34

네드 켈리

<colbgcolor=#666><colcolor=#fff> 네드 켈리
Ned Kelly
파일:Ned_Kelly_in_1880.png
출생 1854년
파일:빅토리아주 주기(1877-1901).svg.png 빅토리아 식민지[1]
사망 1880년 11월 11일 (향년 26세)
신체 178~180cm
1. 개요2. 생애
2.1.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다2.2.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다2.3. 그레타 도적단을 창설하다2.4. Kelly's country2.5. 마지막 전투, 그리고 최후
3. 미디어믹스

1. 개요

파일:1208px-Ned_kelly_armour_library.jpg
그의 철갑옷

19세기 후반 호주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은행 강도이다.

안타까운 사연과 그만의 독특한 신조로 인해 호주에서는 한국의 홍길동, 임꺽정 만큼이나 유명하다. 본인이 노력했음에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에서는 킬도저가 생각나기도 한다.

불우한 가정사와 가난한 자는 털지 않는 규칙으로 인해 의적으로 여겨졌고, 그 지역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강도질 중에도 인질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보상까지 한 덕분에 사형 선고를 받을 당시 이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까지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2.1.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네드 켈리는 1854년,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 아버지 존 켈리와 어머니 앨런 켈리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켈리 가족은 빅토리아 주 베버리지에서 소작농 일을 하며 근근히 먹고 살았는데, 그 지역 지주들의 갖은 괴롭힘 때문에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궁핍했다. 지주들은 황무지 개척이라는 구실로 주인없는 빈땅을 무단으로 선점했고, 주변 농민들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부과하곤 했다.

네드 켈리는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올곧게 자랐다. 하루는 물에 빠져 죽어갈 위기에 놓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어, 친구의 부모에게서 금색 술이 달린 초록색 목도리를 선물받았다. 그의 가족도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존 켈리가 죽으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뒤바뀐다. 악덕한 지주들이 켈리 가족의 땅을 빼앗기 위해 허위 신고를 하였고 아버지는 절도죄의 누명을 써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고 만 것이다.

그의 가족은 가세가 크게 기울어 집값이 더 싼 그레타의 오두막으로 이사하게 된다. 방황하던 그는 아버지의 친구 해리 파워[2]를 만나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둘은 부자들의 말과 소를 털며 한동안 그 일대에서 유명한 무법자로 활동한다. 하지만 켈리의 삼촌이 해리를 밀고하면서 해리는 경찰에 체포당했고, 사람들은 켈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하여 온갖 비난을 하였다. 그는 범죄에서 손을 털기로 마음먹고 이를 감내한다.

2.2.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다

어느 날 켈리는 부모의 친구로부터 밤색 말을 선물받는다. 그는 말이 마음에 쏙들어 애지중지 보살폈고 말을 몰아 시내로 나간다. 그러나 그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알고보니 그 말은 훔친 말이었고 켈리는 절도죄와 경찰 폭행죄 명목으로 3년간 수감된다.[3][4]

켈리는 석방되고 나서도 올바른 삶을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전과자를 고용하는 곳은 아무도 없었고, 간신히 들어간 직장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시비와 무시로 얼마 못 버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이를 버텨내었고, 마침내 세번째 해가 지나자 그는 마침내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14살 동생은 젖소를 훔치다 감옥에 갇히고[5], 경찰이 항상 따라붙어 그의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주변에 절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찰들은 항상 켈리 가족의 집부터 수색했으며, 별것도 아닌 일로 경찰서에 소환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편, 지주들은 여전히 켈리 가족을 경제적으로 압박했고, 땅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켈리에게도 누명을 씌우기 시작한다. 소를 일부러 풀어놓고 켈리를 소도둑으로 신고하던 것이 수차례로, 켈리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과거로부터 도망치려 무진히도 노력했지만, 결국 세상 모두가 자신을 달갑지 않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쳤고, 다락방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들어있던 아버지의 낡은 권총을 꺼내든다.

2.3. 그레타 도적단을 창설하다

네드 켈리는 댄 켈리[6], 존 번, 스티브 하트를 동료로 삼아 그레타 도적단(Greta Mob)을 결성한다. 그들은 부자들의 우마를 탈취한 뒤, 멀리 떨어진 다른 농장에 데려갔다. 그리고 다른 부자들에게 되팔아 이윤을 남겼다. 아직 통신 장비가 미비하던 시절이라 정보의 전달이 느렸기 때문에 상인들은 절도된 가축인지도 모르고 선뜻 매각 증서를 써주었다. 모든 증서가 협박이나 공갈 없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레타 도적단을 어찌할 수 없었다.

피해가 막심해지자, 정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레타 도적단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고 그해 토벌대가 조직된다. 4명의 무장 경찰로 이뤄진 첫번째 추격대는 매우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추적당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떠들며 호기롭게 전진해 나아갔다. 추적대가 스트링이바크에서 야영하는걸 확인한 도적단은 추적대 중 두 명이 외출한 틈을 타 기습을 가한다. 조잡한 사냥총과 콜트 리볼버 1정이 전부였지만 어둠과 고지대를 이용해 교전에서 승리한다. 항복한 매킨타이어 순사를 제외하고, 저항한 세명은 바로 사살된다.

그리고 도적단은 이날 이후로 "그레타 갱단"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게 된다.

2.4. Kelly's country

추적대를 성공적으로 따돌린 그레타 도적단은 본격적으로 주변의 은행가를 접수하기 시작한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들을 "Outlaw" 상태[7]로 선포한다.

1879년 그는 경찰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을 만들기 위한 돈을 구하려 유로아(Euroa)와 뉴사우스웨일스의 제릴더리(Jerilderie)에 있는 두개의 은행을 턴다. 1879년 2월 네드 켈리에게 걸린 현상금은 8000파운드[8]로 올라갔지만 켈리 갱단은 잡히지 않았다. 이때쯤 그는 출판사에 긴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는 제릴더리 편지(Jerilderie Letter)라고도 불렸으며 켈리 갱단의 활동에 대한 네드 자신의 생각, 그의 가족이 받는 대우 그리고 아일랜드 카톨릭들이 영국 경찰과 아일랜드 개신교 경찰들에게 받는 대우를 설명한다.

2.5. 마지막 전투, 그리고 최후

경찰이 그의 행적을 찾아낸 것은 1880년 6월이다. 켈리 갱단은 존스 가족이 운영하는 글렌로완 여관에 도착하여 70명의 인질을 잡게 된다. 갱단은 훔쳐낸 철로 그레타 늪지(Greta Swamps)의 은신처에서 직접 만들어낸 갑옷들을 입었는데 각자의 갑옷들은 80파운드(36 킬로그램)나 나갔다. 글렌로완 여관에 본거지를 만든 네드의 갱단은 특수경찰들이 탄 기차를 탈선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인질로 잡힌 학교장 토마스 커노우(Thomas Curnow)가 풀려나자 바로 선로로 달려가 해가 뜰 때까지 열차에 치여 죽을 각오로 촛불과 붉은색 스카프를 휘둘러 열차를 멈췄기 때문. 6월 28일 새벽, 네드 갱단은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는데 네드 켈리는 이 전투에서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다리에 28개의 총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9] 다른 켈리 갱단 모두 호텔에서 죽었는데 조 번은 대퇴부의 동맥을 관통한 총알로 인한 과다출혈으로 죽었고, 댄 켈리와 스티브 하트는 여관이 불타 무너진 후 잔해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네드 켈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재판에 보내져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880년 11월 11일 아침 멜번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참고로 교수형 직전 남긴 유언이 유명한데, 유언은 아래와 같다.
such is life.
삶이란 이런 거지.[10]

유해는 의과대학생들이 해부되었다가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2011년에 공식적으로 DNA을 통해 유해를 찾았으며, 2013년이 돼서야 장례식이 치러졌다.

3. 미디어믹스

  • 2020년에는 켈리 갱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번 영화화되었고, 조지 맥케이가 네드 켈리 역할을 맡았다.
  • 존 윅 4에서 윈스턴카론이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유언으로 볼 수 있는 "인생이 이런거지."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결과적으로는 복선으로 작용했다.
  • 레드 데드 온라인에서 스토리 모드나 특정 매치 한정으로 이 갑주를 입을 수 있으며 디펜스 모드인 "전투 준비"에선 이 갑주를 입고 돌격하는 탱커형 적도 나온다.

[1] 호주 연방정부가 결성된 것은 1901년의 일이다.[2] 실제로 성이 Power이다.[3] 후에 진범이 잡혔지만 켈리는 석방되지 못했다.[4] 사실 경관은 절도당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켈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러세웠는데,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다. 신문에서는 이를 공적으로 치하하고 그 경관은 승진까지 한다. 이 사건은 켈리가 공권력을 혐오하는 계기가 되었다.[5] 그의 동생은 당시 유소년에게 부과되던 법정 최고형인 5년을 선고받았다.[6] 켈리의 동생이다.[7] 무법자. 법적인 보호 자격이 없어 사살해도 무방한 사람.[8] 2017년 가치로 53만 파운드(8억 3000만원) 정도 된다. 출처[9] 어떠한 사람은 6개라고 말하기도 한다.[10] 직역하면 '이런 게 삶이다' 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