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홍록(金洪錄) |
출생 | 1893년 12월 15일 |
경상도 진해현 서면 곡안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1] | |
사망 | 1919년 4월 4일 (향년 25세) |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사동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사동리) | |
본관 | 광산 김씨[2] |
묘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8의사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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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호현은 1893년 12월 15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곡안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변상태(卞相泰)·권영대·권태용 등은 잠시 피신했다가 곧 진전면의 청년유지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진전면·진북면·진동면 등 3개 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일암리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마을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마을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이 계획을 전해들은 김호현은 이에 적극 찬성하여 4월 3일 오전 9시, 수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그들대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뒤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는 시위대열을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동면 사동리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명과 충돌하였다.
일제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에서 지원 차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야만적인 발포로 고앙주·김수동·김영환(金永煥)·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이기봉(李基鳳)·홍두익(洪斗益) 등 7명이 흉탄을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했으며, 김호현도 이때 총격을 받아 함께 순국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