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6 17:52:44

김치옥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김해 김씨
출생 1879년 10월 14일
경상북도 사천군 삼천포읍[1]
사망 1933년 3월 5일[2]
묘소 북한 송야리[3]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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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의 공로를 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 생애

김치옥은 1879년 10월 14일 경남 삼천포에서 아버지 김성진(金成眞)과 어머니 제주 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전북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 570번지로 낙향하여 농업[4]에 종사하였으며 1914년 동 남전리에 기독교 교회를 창설하여 집사직분에 있었으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지역에 일본인 10여 세대를 이주시켜 지역주민들의 토지를 전부 강탈하고 수탈하였다.
갈수록 심해지는 횡포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항일 운동체를 구성하여 일본인 배척운동을 추진하며 일본인들과의 관계에서 타결 또는 투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항쟁하던 중 1917년 배은희 목사와 함께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 1918년 지하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천도교인이 많았던 익산 지역에서는 천도교 창시자 최제우(崔濟愚)의 추도일인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최제우 추도식이 끝난 1919년 3월 10일 밤 9시가 되자 익산 곳곳의 산꼭대기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고 만세 소리를 외치는 봉화시위로 촉발되어 군내 16개 면 전역에서 장터를 거점으로 확산되어갔다.

남전교회 교인이었던 김치옥은 문용기와 함께 익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작정하고, 거사일을 당시 전북의 가장 큰 장이 섰던 이리장에서 1919년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도남학교 학생들, 인근 교회의 교인들, 익산 지역 천도교인들,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청년들을 포섭, 교인인 박성엽, 문용기 등과 함께 거사를 진행해나갔다. 남전교회에서는 조선독립에 관한 교육과 함께 대형 깃발과 현수막,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다.

4월 4일이 되자 남전교회 교인 150여 명은 교회 안마당에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 몸에 숨기고 이리장터로 향했다. 문용기는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김치옥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낭독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대는 1천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붉은 글자로 “조선 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여산면 헌병분견소를 향해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솜리 장터를 행진하던 중 일제 헌병대와 2개 중대는 물론이고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등 수백 명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칼과 곤봉으로 진압하여 시위를 주도한 문용기 선생, 박영문, 장경춘, 이충규 등 6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당했으며 김치옥을 비롯한 39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았다. 판결에 반발하며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에 대하여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른 것이 어찌하여 보안법 위반이 되느냐.”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며 저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의 이름을 밀고하라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혀를 깨물고 저항하였고 이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되자 1920년 4월 29일 감형되어 가석방으로 출옥되었다. 출옥 이후에도 동지들과 밀회하여 동양척식회사의 착취와 일본인 이민자들의 횡포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일경이 매일같이 미행하며 감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 대신 생활이 곤란한 동지들에게 머슴을 시켜 식량을 보내주거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수년간 가산을 탕진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결국 1930년 11월 황해도 연백군으로 이주하였다.

출감 이후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인한 건강악화로 고생하던 김치옥은 1933년에는 병이 생겨 반신불수가 되어 고생하다가 동년 3월 5일 사망하였다.[5]

독립유공자 강제희 지사님의 손자가 유족측 요청으로 독립유공자 김치옥 지사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3. 가족관계


김치옥은 13살 연하의 아내 해주 오씨 사이에서 김진규, 김형규, 김영규, 김인규 5남[6]과 김순규, 김순례 2녀를 낳았으며, 손녀 김준희[7][8], 증손 박정언, 박정민[9]이 있다.



[1] 일부 자료에서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2] 유족측 주장 1934년 1월 1일[3] 추정[4] 자작농 5정보가량[5] 해당 날짜는 공적조서 내용으로 유족 주장은 1934년 1월 1일[6] 3남은 일찍 죽어서 입적하지 않음[7] 김치옥열사의 유족대표[8] 김진규의 무남독녀[9] 손녀 김준희와 사위 박건호 사이의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