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러시아에서 3.1 운동을 전개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김아파나시는 1917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1918년 6월 한인청년학생 전시베리아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비서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니콜리스크 한인 청년단체를 대표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현지의 청년지도자와 연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러시아어로 된 항일 신문 <학생과 목소리>를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선전했다. 또한 김아파나시는 불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오성묵과 함께 국내에서 일제 경찰이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문'을 일본영사에게 전달했다. 1922년 이후 김아파나시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한국의 독립문제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자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35년 소련공산당 숙청 당시 '반혁명당의 지시에 따라 일본 첩보기관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돼, 1938년 5월 25일 일본의 밀정이라는 죄목으로 총살당했으나 1957년 11월 19일 완전히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