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5 00:08:37

김세영(자원개발부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초기 이력은 알 수 없으나 채취공업 부문의 테크노크라트 출신으로 보인다. 1936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1979년 12월, 정무원 자원개발부 부부장으로 등장, 1984년 8월, 조선공업기술총동맹 지질협회 위원장으로 등장했다. 1985년 11월 19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광업부, 석탄공업부, 자원개발부를 통합하여 채취공업위원회가 새로 출범하자 그 산하의 탐사지도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86년 1월 17일, 김일성이 소집한 지질탐사부문 일군 협의회에서 자원개발부가 채취공업위원회 산하 탐사지도국으로 격하되면서 오로지 채취공업위원회가 원하는 자원개발만 할 수 있고 다른 부서에서 요구하는 자원 탐색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건의하자 김일성이 여기에 동의를 표하며, 1월 25일 정무원지시 제5호를 통해 정무원 자원개발부를 새로 조직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임 자원개발부장에 임명된다.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2월의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자원개발부장에 유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89년에 역시나 채취공업부문의 전문가인 전하철이 자원개발부장에 임명되면서 해임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북한에서 공개했던 전하철 략력에는 자원개발부장이 없다. 어쨌거나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엔 없었으나 5월의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다시 자원개발부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는지 불과 8개월 후인 10월 22일 6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부고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지내고 있었다고 밝힌 것을 보아 9기 대의원에 보선된 것도 확실하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세영동지는 우리 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나라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자원개발부문의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면서 나라의 경제적위력을 강화하는데 자기의 지혜와 정력을 다바쳤다. 김세영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우리 당에 무한히 충실하였다."고 상투적으로 칭송해주었다. 김세영의 부고는 10월 23일에 방송으로 보도, 10월 24일자 로동신문에 실렸다.

애국렬사릉 안장자 명단에는 없으나 김정은 시대에 편찬된 회상실기에 김세영의 실기도 포함된 것을 보아서 김정은 시대에도 충신으로 대접받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