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8:24:59

기양 전투


<colcolor=#000> 기양 전투
蘄陽之戰
시기 197년 9월
장소 예주(豫州) 패국(沛國) 기현(蘄縣)[1]
원인 원술의 진국 침공
교전 중(仲) 한(漢)[2]
황제 황제 원술 황제 유협
지휘관 대장군 교유
대장군 장훈[3]
사공 거기장군 조조
참전 무장 이풍
양강
악취
우금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대패 및 지휘부 전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중나라의 대패 및 대장군 교유 전사
영향 중나라 몰락의 결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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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2.1. 발단2.2. 전개
3. 평가4. 여담

1. 개요

앞에는 여포에게 격파되고, 뒤에는 태조에게 패하다...(후략)
術前爲呂布所破,後爲太祖所敗...(後略)
《삼국지 위서 원술전》

197년, 9월 조조가 진민왕 유총을 죽이고 진국을 병탄한 원술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

2. 정사

2.1. 발단

197년, 원술은 예언서의 내용을 명분 삼아 결국 스스로를 천자라고 칭했다. 국호는 중(仲)이었다. 동시에 원술은 여포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황제를 칭한 것을 알리고, 정략결혼으로 딸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여포는 원술이 칭제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딸을 보냈음에도 진규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된다. 여포도 나름대로 원술이 예전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딸에게 돌아오게 하고선 혼인을 끊고, 원술군의 사자 한윤을 묶어 조조에게 보내니 한윤은 허도의 저자거리에서 효수되었다. 원술은 대노하여 일곱 갈래 길로 대군을 나누어 보내서 여포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만다.

원술은 여포에게 당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진(陳)국을 쳐서 점령하고자 했다. 원술은 먼저 진국의 제후왕인 유총과 그의 보좌 낙준[4]에게 군량을 요구한다. 평소 원술을 싫어했던 유총과 낙준이 이를 거절하자,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국을 치는 한편 자객 장개양을 보내서 유총과 낙준을 암살한다. 원술은 유총의 잔당을 축출하고 순조롭게 진국을 점령하게 된다.그러나 조조가 진왕의 죽음을 명분삼아 부장 우금을 대동하여 곧바로 원술을 공격하게 된다.

2.2. 전개

원술은 조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대장군인 교유를 비롯하여,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겨 기양에서 조조를 막게하고, 본인은 회수를 건너 수춘으로 달아난다. 사실상 주군에게 버림받고 고기방패로 남겨진 중나라의 장군들이었지만, 이들은 끝까지 조조에게 저항하며 맞서 싸우게 된다. 조조는 원술의 군세를 격파하고 마침내 진국 고현(苦縣)[5]에서 이들을 포위하였다. 결국 대장군 교유를 포함한 중나라의 장수들은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3. 평가

그야말로 중나라에게 치명타로 작용한 전투이다. 안 그래도 여포에게 대패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중나라는 또 한번의 대패를 겪으며,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대장군인 교유를 포함한 중나라 지휘부가 포위당해서 아예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로써 중나라는 군사 지휘관이 씨가 마르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원술의 멘탈 붕괴와 의지 상실이었다. 병력과 지휘관을 모조리 날려먹은 상황에서, 원술은 다시 내실을 다지고 방어에 전념하며 재기에 힘써야만 했다. 그러나 원술전의 기록을 보면, 여포와 조조에게 연이어 대패를 겪고 난 이후의 원술은 극심한 사치를 부리며 일종의 현실도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원술은 후궁을 수백 명을 두었으며 황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 상당한 돈을 낭비하였다. 원술의 사치와 무도함이 극에 달하여 중나라의 영토였던 강회[6]에서는 굶주린 백성들끼리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기양 전투의 영향으로 중나라는 병력과 자원 및 지휘관, 그리고 군주인 원술 본인의 의지마저 완전히 날려먹게 된 것이다.

4. 여담

원술이 부하들을 방패삼아 도주한 전투가 수춘에서 벌어진 전투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는 연의의 각색이다. 《후한서 원술전》의 기록을 보면, 이후 199년에 원술이 궁실을 불사르고 잠산(灊山)으로 달아나 옛 부하인 진란뇌박에게 의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의 궁실이 수춘의 황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잠산은 여강군 잠현(灊縣)의 산[7]을 가리킨다. 즉, 199년에야 수춘을 버리고 남쪽의 여강으로 달아난 것이 된다. 그러나 결국 진란과 뇌박에게 버림받는 것은 동일하다. 이후 흔히 알려진 것 처럼 원술은 강정에서 꿀물을 찾다가 객사한다.
[1] 기양이라는 지명과 그 위치에 대해서《후한서 원술전》에서는 강하군 기춘현(蘄春縣) 주변 기수(蘄水) 관련 지명으로 주석했으나, 호삼성은 강하군 기춘현은 정황과 지리상 맞지 않으므로 이는 패국 기현(蘄縣)을 가리키는 것이며, 기양(蘄陽)의 양(陽)은 연문(衍文)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확실히 기양이 강하군에 속한다면, 이는 지리적으로 말이 안되긴 한다. 예주 진국을 평정한 원술이 갑자기 강하군에 있다가 조조의 공격을 받은 꼴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기현은 패국 소속이었다가 238년에 초군(譙郡) 소속으로 바뀐다.[2] 조조가 후한 조정에 충성을 바쳤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조조는 명목상 엄연히 후한 소속의 신하였다. 특히나 당시 조조는 황제를 옹립하고 있는 후한 조정의 권신이었다.[3] 참전 여부 불명[4] 낙통의 아버지이다.[5] 고현은 238년엔 초군(譙郡)으로 소속이 바뀐다.[6] 회수와 장강 사이의 지역[7] 지금의 안휘성 서부의 곽산(霍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