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00:27

곽종해


성명 곽종해(郭鍾海)
이명 곽영우(郭寧宇)
본관 현풍 곽씨#
생몰 1891년 2월 27일 ~ 1946년 3월 5일
출생지 경상도 현풍현 현내면 중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중리)
사망지 경상북도 달성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곽종해는 1891년 2월 27일 경상도 현풍현 현내면 중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7월 3일 고향에서 백여 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20년 8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李賢壽)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자유신보(自由申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이현수를 도와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에 서장환, 정덕진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 교통사무지국장,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 영천, 대구, 경주 일대의 관공서와 도로 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했다. 또한 이들은 1923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대구, 평양, 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 회의에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 일로 1923년 1월 경찰에 체포된 그는 옥고를 치렀다.

1945년 봄, 곽종해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린 끝에 1946년 3월 5일 달성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8월 31일 곽종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