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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고익균 (高益均) |
출생 | 1887년 12월 11일 |
황해도 송화군 | |
사망 | 1928년 5월 5일 (향년 40세) |
황해도 송화군 | |
본관 | 제주 고씨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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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익균은 1887년 12월 1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신천, 장연, 송화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우동선 의병진에 가입해 일본군과 대적했고, 이후엔 신민회에 가입했다가 19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1913년에는 사립 양재보통학교(養材普通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화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금산형무소(金山刑務所)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출옥 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에 가담해 송화군 참사(參事)로서 송화군감(松禾郡監)과 함께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 임시정부의 업무를 담당했다. 1920년 8월에 만주독립단(滿洲獨立團)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 등 9명이 황해도 송화군에 있는 구월산에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구월산대(九月山隊)를 조직하여 친일파 및 일제의 밀정(密偵)을 색출하여 응징하는 등 유격전을 벌이자, 그는 구월산대에게 6개월간 군량을 공급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구월산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다수가 죽거나 체포되자, 그는 황해도 각 지역을 다니면서 대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1927년 이후에는 암암리에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한편 황해도 일대의 청년을 모아 청년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8년 5우러 5일 자택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고익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