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3:53:48

게야무라 로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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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창작물에서의 게야무라 로쿠스케

1. 개요

毛谷村六助
(?~1593?)
센고쿠 시대의 무장. 기다 마고베(貴田孫兵衛)[1]라고도 한다.

2. 상세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이며 조총병 40명을 이끌고 가토의 부장으로 종군하였다. 바로 논개와 같이 놀다 물에 빠져 죽었던 그 왜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논개와 함께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오랑카이라는 곳에서 전사했다든가[2], 고향으로 돌아와 제 명을 살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그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일본 학계에서는 논개와 죽었다는 설은 단지 전설일 뿐이라고 정하고 있으며 나머지 설들도 정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한국 학계에서도 이 게야무라에 대해 역사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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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야무라의 묘. 木田孫兵衛墓라고 표기되어 있다.

다만 귀향하고 천수를 누리고 죽은 설의 경우에는 오이타현에 기다 마고베에(木田孫兵衛)의 묘지가 있고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지만 이 비석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라 후술할 가부키로 인해 이름이 알려진 후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논개설에서는 왜군의 총대장이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당시 왜군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이며 야사에서만 나왔을 뿐 정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그 전투에서는 임진왜란 치고는 의외로 거물인 다테 마사무네가 참전한 전투였는데 그 마사무네를 이런 듣보잡이 휘하에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렵다. 이로 보았을 때 게야무라의 직책은 높게 잡아봤자 부사관 내지 하급장교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로 따진다면 잘해봤자 중위다.

실제로 진주성에 있는 논개비 뒷면에 게야무라가 왜군 총지휘자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으나 학계의 비판으로 인해 진주시와 회의 끝에 2004년에 논개비 뒷면을 아예 깎아 버렸다. 학계의 주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란 이름은 '게야무라' 가문 출신의 서민 '로쿠스케'라는 뜻으로 이러한 자가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 창작물에서의 게야무라 로쿠스케

  • 도요토미 진서군기(豊臣鎭西軍記)에서는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생애가 상세히 저술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는 히코산곤겐치카이노스케다치(彦山權現誓助劍)라는 인형극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동명의 가부키로 꽤 유명해졌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히코산 고주 신사(彦山高住神社)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오이타현(大分県) 쪽에서 4Km정도 내려간 동쪽 산 속에 마을이 있고 그 속에 <키다 마고베의 무덤(木田孫兵衛墓)>이라고 새겨진 무덤이 있는 데, 이 무덤이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로쿠스케의 아버지는 히로시마 출신으로 사타케 칸베(佐竹勘兵衛)라고 하며, 큐슈의 오가타씨(緖方氏)를 죽이기 위해서 미야코군(京都郡) 이마이(今井)에 오게 된다. 그는 거기서 알게 된 소노베 요베(園部與兵衛)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 데, 그 아들이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이다. 당시 낭인(浪人)은 마을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누가타케(犬ヶ岳)에 올라 느티나무 구멍에서 밤을 지새우고 로쿠시마치(六四町) 아래의 현재지에 마을을 만들었다. 게야무라(毛谷村)라는 마을의 이름은 느티나무(ケヤキ : 게야키)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로쿠스케는 정직하고 효성스러운 사람으로 나무를 해서 등에 지고 오구라(小倉)에 팔러 다녔다. 그는 대단히 힘센 사람으로 말과 대등하게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힘은 히코산 곤겐(彦山權現)에 기원해서 받은 것이고 그의 검술또한 히코산 토요마에보(彦山豊前坊)의 동굴에 사는 텐구(天狗 : 전설상의 생물로 붉은 얼굴에 긴 코가 특징이며, 초능력을 가지고 있음)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 당시 히로시마번(廣島藩)의 검술 사범에 미진류(微塵流)의 쿄고쿠 타쿠미(京極內匠)라는 사람이 있었는 데, 성격이 야비하고 잔인하였다. 그는 같은 번의 사범인 팔중항류(八重垣流)의 달인 요시오카 이치미사이(吉岡一味齋)의 딸인 엔(園)을 마음에 두고 이치미사이에게 엔과의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엔과 이치미사이는 타쿠미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분개한 타쿠미는 이치미사이를 기습하여 죽이고 히로시마를 떠나 오구라(小倉)의 토요마에(豊前)로 도주했다.
토요마에로 도주한 쿄고쿠 타쿠미는 오구라번(小倉藩)에 임관하기 위해서 번주(藩主) 앞에서 시합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인 것을 알자 시합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길 방책을 궁리하던 타쿠미는 로쿠스케의 효심이 지극한 것에 착안하여 한가지 계책을 꾸미게 된다. 그는 시합 전에 로쿠스케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으며, 어머니를 위해 시합에서 이겨야 하니 승리를 양보해 줄 수 없냐고 사정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쿄고쿠 타쿠미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격하여 타쿠미에게 승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후에 로쿠스케는 타쿠미의 말이 완전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 때 타쿠미에게 죽은 이치미사이의 딸인 엔이 어머니와 히코산에 참예(參詣)하려고 와 있었다. 엔에게는 기쿠(菊)라는 여동생이 있었는 데, 그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로쿠스케에게 부탁하기 위해 게야무라(毛谷村)로 가는 도중에 타쿠미의 손에 살해되었다. 엔은 어머니를 모시고 타쿠미의 눈을 피해 고생 끝에 로쿠스케의 집을 찾아가 그들의 사연을 말하고 복수의 조력을 부탁했으며, 앞서의 일도 있고 해서 로쿠스케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 후 기회를 찾던 로쿠스케는 오구라 성벽 아래에서 타쿠미와 대결하여 복수를 완수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로쿠스케는 엔과 결혼하게 되었다.
로쿠스케는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앞에서 스모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다섯명까지는 이겼지만 여섯번째의 기무라 마타조우(木村又藏)에게 져서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그는 키다 마고베(木田孫兵衛)라고 이름을 바꾸고 가토 키요마사의 부하 무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진주에서 논개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출처
  • 90년대 이전에 간행된 한국측 임진왜란 관련 서적에는 간혹 게다니게타니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성 '毛谷村'에서 '村(무라)'가 누락된 채 '毛谷'만을 읽어서 생긴 오류. 2000년대 이후 나온 서적들에는 대부분 '게야무라'라고 바르게 수정되어 있다.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자세히 다룬 만큼 당연히 등장했다. 담당 배우는 한태일. 다만 다른 활약상은 전혀 없고 막판에 술취한 상태로만 등장해 "논개... 논개..." 만 외쳐 대면서 논개에게 유인당해 죽는 한심스러운 모습만 딱 보여준다.
  • 나는 친구가 적다 5권에서 쿠스노키 유키무라프리 폴이란 놀이기구를 타고 "케야무라 로쿠스케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표준 일본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통용 일본어 표기법을 따랐기 때문에 조금 달라졌지만 동일인물이다.[3]
  • 이말년시리즈의 '이말년시리즈 최후의 날'이란 에피소드에선 작가 이말년 자신을 논개, 악플러를 게야무라에 비유했는데 이말년이 고소를 준비하고 고소한다는 글을 미리 남기자 그 게야무라가 탈퇴하고 슬쩍 빠져나가면서 뻘짓한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이거 실화라 카더라.

[1] 혹은 木田孫兵衛라고도 한다. 실제로 그의 묘라고 알려진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다. 貴田孫兵衛는 일본어 위키백과의 표기.[2] 바로 그 오랑캐 맞다. 조선말 오랑캐를 일본식으로 음차한 것으로 함경도 근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 보아 이 설에 따르면 게야무라는 북관대첩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3] 반대로 말하면 유키무라가 논개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