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강용운(姜龍雲) |
생몰 | 1911년 7월 22일 ~ 1967년 2월 22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읍 소포리 |
사망지 | 경상남도 함안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용운은 1911년 7월 22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읍 소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진주사범학교 특과(特科)를 졸업한 후 사천공립보통학교(泗川公立普通學校) 및 명지(鳴旨)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933년 1월 경남 진주에서 동지 김두영(金斗榮) 등과 모임을 갖고 각 부문운동별로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연계투쟁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중에서 강용운, 김두영 등은 교사였던 관계로 비밀결사 교육노동자협의회(敎育勞動者協議會)를 결성하기로 하고 생활권 옹호,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획득, 제국주의 교육타도,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시 등의 강령을 논의했다.1933년 3월 28일, 강용운은 마산만의 선상(船上)에서 김두영, 이화준(李華俊), 정두명 등과 회합하여 반전의식 고취, 교내 일본어 상용 반대, 소위 국민정신 작흥(作興) 반대 등 35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한 후 교육노동자협의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중앙부 책임 김두영, 조직부원에 이화준 등의 부서를 정하고 경남지역을 중부, 동부, 서부로 나누어 각기 책임지역을 분담하는 등 조직의 편제를 갖추었다. 보통학교 교사인 강용운 등은 학생들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시키는 한편 농촌경제의 절박한 상황, 보통교육의 학자(學資) 부족, 적령아동의 격증, 수업료 미납현상 등 식민지 교육제도의 모순을 알려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1933년 8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7년 2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강용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