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92년 2월 30일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 |
사망 | 1935년 5월 1일 |
전라북도 임실군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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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선칠은 1892년 2월 30일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접수받은 임실군의 천도교, 기독교 인사들은 3월 13일 전주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경찰은 예비 검속을 실시해 일부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각급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경비를 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했고, 천도교측에서도 교구실에서 수천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연락했다.이윽고 3월 13일 거사 당일, 일제 경찰과 헌병대가 삼엄한 경계를 펼쳤지만 시위는 예정대로 벌어졌다. 이때 강선칠은 군중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채소 가마니로 위장하여 무사히 공립 제2보통학교 교정에 운반한 후 기독교도, 천도교도 학생이 중심이 된 150명의 군중에게 배포했다. 이후 그는 군중과 함께 공립 제2보통학교를 출발하여 대화동을 거쳐 우편국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헌병과 경찰이 우체국 앞에서 막아섰고, 군중이 거세게 저항하자 총검으로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이때 체포된 강선칠은 1919년 10월 4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35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강선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