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가이나스 (Gainas) |
출생 | 미상 |
사망 | 400년 |
직위 | 마기스테르 밀리툼 |
반란 대상 | 아르카디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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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반란자. 아르카디우스 시대 고트족 출신 장군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지나친 야심을 부리다 반 고트족 감정이 폭발한 민중의 봉기로 몰락했다.2. 생애
가이나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 시대부터 기록에 언급된다. 그는 고트족 출신으로, 로마군 보병대에 입대한 뒤 여러 공적을 쌓아 고트군 지휘관이 되었다. 394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휘하의 고트군을 이끌고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와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군대를 격파하는데 일조했다. 당시 알라리크가 그의 지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수종으로 사망한 뒤, 밀라노에 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는 황제가 생전에 자신을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섭정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 정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라이펙투스 직책을 맡은 루피누스가 아르카디우스의 섭정을 맡았다. 루피누스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켜 발칸 반도를 유린할 때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 스틸리코가 파견한 가이나스가 반란을 제어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루피누스는 여전히 스틸리코를 적대했고,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와 혼인시키려 했지만 환관이자 의전관인 에우트로피우스가 프랑크족 출신의 미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를 아르카디우스와 혼인시키면서 무산되었다. 그러던 396년 11월 17일, 루피누스는 열병식 도중 자신이 공동 황제가 되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하다가 가이나스의 병사들에게 난도질당했다. 루피누스가 행사하던 지위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갔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온갖 부패, 횡령, 매관매직을 벌였고, 급기야 399년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절대권력을 구가했다. 그러면서도 가이나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399년 봄, 프리지아의 동고트족 이주민들이 트리비길드의 지휘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맡고 있던 레오가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해 해임되었다. 그 후 신임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된 가이나스는 반란을 진압하러 출정했으나, 정작 프리지아에 도착한 뒤 반란군과 합류하고 군대 내부의 로마 병사들을 제거해 현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아르카디우스를 지지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전령을 보내 폭도들이 너무 많아 무력으로 진압하기 어려우니 그들과 협상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먼저 에우트로피우스를 반란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
일설에 따르면, 아르카디우스는 이 요구를 듣고 망설였지만, 에우독시아가 강력히 요구해 결국 넘겨주기로 했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보호를 받았으나, 몇 달 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성당 밖으로 갔다가 키프로스로 유배된 뒤, 가이나스에게 넘겨진 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만 통용된다"라는 이유로 칼케돈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가이나스는 동로마 제국의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듯했다.
그러나 가이나스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400년 초,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들어가서 황궁을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군의 통수권을 완전히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고트족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고트족 병사 7,000명을 몰살했다. 가이나스의 잔여 병사들은 급히 달아났으나, 제국군의 또다른 고트족 장성 프라비타에게 요격당했다. 가이나스는 단신으로 도나우 강을 건넜지만, 훈족의 왕 울딘에게 잡혀 참수당했다. 울딘은 수급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