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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 시게루

가와고에 시게루
파일:가와고에시게루.jpg
제3대 주중화민국 일본대사
한문 川越茂
한국식 독음 천월무
히라가나 かわごえ しげる
영문 Kawagoe Shigeru
출생 1881년 1월 14일
일본 제국 미야자키현 기타나카군
사망 1969년 12월 10일 (향년 88세)
일본
학력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직업 외교관, 정치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일본 제국의 외교관. 1920년대 이래로 십수년간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중국 침략에 적극 동조하였다. 3대 주중 일본대사를 역임했으며 중일전쟁 후에는 중화민국일본의 화해를 주선했다.

2. 생애

1881년 지금의 미야자키시에 해당하는 미야자키현 기타나카군에서 중의원 의원 가와고에 스스무(川越進)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미야자키 현립중학교, 제7고등학교를 거쳐 190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912년에 고시에 합격하여 외무성에 취직했는데 그의 6기 선배가 요시다 시게루였다. 이후 하얼빈, 한커우, 사스의 영사관 직원으로 일하며 중국에서의 경력을 시작하였고 주 스위스 일본 공사관의 3등 서기관, 주 독일 대사관 1등 서기관을 지냈다.

외무성 아시아국 제3과 과장을 거쳐 1925년, 길림총영사 대리로 부임하였으며 조선인 유학생들일 중심으로 한 독립단체인 여길학우회가 조직되자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에게 이에 대해 보고하면서 조선인 독립운동을 감시했다. 1929년 칭다오 총영사로 이임하였으며 1932년, 만주국 참사관을 지냈다. 1932년 9월 15일, 일본 측 대표 무토 요부노시, 고이소 구니아키와 함께 일만의정서 체결에 참여했다. 1933년 10월, 광동 총영사로 부임하였으며 광저우 시장 유기문을 방문하여 광동성에서의 일체의 반일활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박의일 체포사건이 발생하자 관원을 파견하여 박의일을 일본 국적의 공산주의자로 주장하며 자신들이 신병을 인수하겠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박의일 사건은 박의일을 구속하고 있던 프랑스 측에서 박의일을 프랑스 공공조계지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면서 상하이에서 벌어졌던 김수산 사건과 달리 일본의 실패로 끝났다. 1934년 톈진 총영사로 이임한 가와고에는 관동군화북분리공작에 적극 호응하여 하매 협정, 진토 협정의 체결에 관여하고 쿵더청의 방일을 주선하는 등 일본 제국의 대륙침략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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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월 6일, 장제스와 가와고에(장제스 우측 인물)

1936년 5월, 아리타 하치로[1]의 뒤를 이어 3대 주중 일본대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국민정부 행정원장 장제스와 외교부장 장췬, 정무차장 서모, 아주국장 가오쭝우를 상대로 중만일 3국 방공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으나 장제스로부터 화북분리공작에 대한 항의를 들었으며 만주국 승인 등을 요구하는 일본의 강경한 방침 때문에 난황을 겪었다. 1936년 11월, 수동사변이 발생하자 중국으로부터 이런 식이면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통첩을 받았고 결국 1936년 말에 중국에 대한 육군의 불만과 해군의 칭다오 상륙사건으로 인하여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었다. 1937년 6월 26일, 도쿄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의 발전을 위해서 화북은 만주국 생존과 발전의 필연적 운명과도 같은 존재이므로 반드시 하나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발언하며 화북 지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개입을 주장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트라우트만 공작에 참여하여 중일 간의 화해를 주선하였지만 1938년 1월, 상하이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정부가 화평의 의사가 없으니 신정권 수립이 필요하다는 폭언을 하였으며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1938년 1월, 국민정부를 앞으로 상대하지 않겠다는 1차 고노에 성명을 발표함에 따라 주중대사에서 물러나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12월에 외교관에서 은퇴했다.

태평양 전쟁 종결 후 외무성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GHQ의 공직추방령 때문에 해고되었다. 1946년, 총리에 오른 선배 요시다 시게루의 주목을 받아 대만 특사로 파견되는 것이 고려되었다. 1952년 2월, 요시다 총리는 연합군 총사령부의 외교국장 윌리엄 시볼드에게 중화민국 정부가 허락한다면 가와고에를 개인 특사 자격으로 대만에 파견하고 싶다고 타진했고 공산 중국 때문에 곤경에 처한 국민당을 돕고 싶다고 하였다. 가와고에는 시볼드 외교국장을 방문하여 자신의 중국관을 설명하였고 4월, 대만을 방문한 특사 가와다 이사오에게 장제스가 가와고에는 인상이 좋다고 하고 장췬이 총통이 동의를 표했다고 하는 등 대만 방문 직전까지 갔으나 불분명한 이유로 대만 방문이 무산되었다.

1952년 8월, 방일한 장췬과 회담했으며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계속 중국 문제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출범하자 시게미쓰 마모루 부총리 겸 외무대신에게 중국 문제에 관한 정책적 조언을 하였다. 1955년, 공직추방령이 해제된 후 가나가와현 공안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9년에 사망하였다.

3. 참고문헌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일제의 대륙 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전후 일본-대만 관계와 보수정권, 이노우에 마사야, 김은정, 아세아연구 56집 3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 중국관내지역 韓人의 국적 문제 일고찰 - 1933년 廣州에서의 ‘朴義一’ 체포를 둘러싼 中日佛 교섭을 중심으로 -, 김광재, 사학연구 110호, 한국사학회.


[1] 히로타 내각, 제1차 고노에 개조내각 - 히라누마 내각, 요나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