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22:35:11

헨리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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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제3대·제4대 국왕
헨리 6세
Henry VI
파일:1280px-King_Henry_VI_from_NPG_(2).jpg
왕호 헨리 6세
(Henry VI)
출생 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성
사망 1471년 5월 21일 (향년 49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탑
장례식 1484년 8월 12일
세인트 조지 예배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차 1422년 8월 31일 ~ 1461년 3월 4일
2차 1470년 10월 3일 ~ 1471년 4월 11일
프랑스 왕국의 왕
1422년 10월 21일 ~ 1453년 10월 19일
배우자 앙주의 마르그리트 (1445년 결혼)
자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아버지 헨리 5세
어머니 발루아의 카트린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헨리 6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왕(1421 ~ 1437)
2.1.1. 출생과 즉위2.1.2. 두 번의 대관식2.1.3. 아라스 조약과 악화되는 전황
2.2. 친정(1437 ~ 1453)
2.2.1. 친정의 시작2.2.2. 결혼 협상과 악화되는 전황2.2.3. 투르 협약과 글로스터 공작의 몰락2.2.4. 노르망디 상실2.2.5. 윌리엄 드 라 폴의 몰락2.2.6. 잭 케이드의 난2.2.7. 서머셋 공작과 요크 공작의 대립2.2.8. 가스코뉴 상실과 백년전쟁 종결
2.3. 장미 전쟁으로의 길(1453 ~ 1460)
2.3.1. 왕의 광기와 요크 공작의 섭정2.3.2. 요크 공작과 마르그리트 왕비의 정쟁2.3.3. 요크파의 추방과 귀환2.3.4. 요크 공작의 왕위 계승 시도와 죽음
2.4. 장미 전쟁(1461 ~ 1470)
2.4.1. 랭커스터파의 반격2.4.2.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타우턴 전투2.4.3. 스코틀랜드 망명과 체포
2.5. 복위와 몰락(1470 ~ 1471)
2.5.1. 워릭 백작의 변심2.5.2. 랭커스터 왕조의 부활2.5.3. 내분과 에드워드 4세의 반격2.5.4. 랭커스터파의 붕괴2.5.5. 최후
3. 가족관계4. 사생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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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말기와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국왕. 갓난아기 때 왕위에 오른 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굴곡이 심한 치세를 누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2.1. 어린 왕(1421 ~ 1437)

2.1.1. 출생과 즉위

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성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의 외동아들로 출생했다. 1422년 9월 1일, 생후 9개월 때 아버지가 이질에 시달리다 병사한 뒤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인물이었다. 1422년 10월 21일, 외조부 샤를 6세가 사망했다.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에 따르면,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이 되며, 헨리 5세 사후에는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의 아들이 프랑스 왕이 될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헨리 5세는 죽기 전에 친동생 베드퍼드 공작 존을 잉글랜드의 섭정,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삼겠다고 유언했다. 그러나 선량공 필리프가 섭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베드퍼드 공작이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고, 헨리 5세의 또다른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잉글랜드 호국경이 되었다. 험프리는 자기가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이를 강력하게 막아서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이후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한편, 20세의 카트린이 아들을 홀로 양육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이 프랑스 왕실 출신인 그녀를 경계했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다.

1423년 9월 28일, 귀족들은 아직 2살도 안 된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를 소집했고,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할 섭정 위원회를 소집했다. 베드퍼드 공작 존은 프랑스 섭정으로서 헨리 6세의 프랑스 왕 즉위를 거부하는 아르마냑파와 샤를 7세를 상대로 전쟁을 진두지휘했고, 험프리와 보퍼트가 국정을 이끌었다. 또한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가 헨리 5세의 유언에 따라 왕의 가정교사로 발탁되었으며, 잉글랜드 의사 존 서머셋 역시 어린 왕을 지도하고 항상 건강을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워릭 백작의 아들 헨리 뷰챔프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2.1.2. 두 번의 대관식

1429년 7월 17일, 잔 다르크의 맹활약으로 오를레앙 공방전, 루아르 원정, 랭스 행진에서 잇따라 승리한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들의 대관식이 전통적으로 거행되는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해 9월에는 잔 다르크의 주도하에 1차 파리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잉글랜드와 손잡은 부르고뉴파의 저지로 격퇴되었다. 이후 프랑스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은 샤를 7세의 랭스 대관식 이후 수많은 프랑스인이 샤를 7세 쪽으로 쏠린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응해 헨리 6세의 대관식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1429년 11월 6일, 캔터베리 대주교 헨리 치셀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리 6세의 잉글랜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땅을 방문하려는 군주를 따르라는 선언문이 모든 고위 귀족들에게 보내졌다. 1430년 4월 23일, 헨리 6세는 베드퍼드 공작과 함께 처음으로 영국 해협을 건너 칼레에 상륙한 뒤,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루앙으로 이동했다. 헨리 6세는 루앙에 궁정을 세우고 1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가했던 잔 다르크가 생포된 뒤 1년간 루앙에서 재판 받은 후 1431년 5월 30일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헨리 6세는 잔 다르크 재판에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가 잔 다르크에게 어떤 견해를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431년 겨울, 베드퍼드 공작은 랭스 공략이 요원하자 파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12월 2일 파리에 도착한 헨리 6세는 외할머니인 이자보 왕비가 행렬이 지나가는 걸 호텔 샹폴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는 걸 목격하고 샤프롱[1]을 벗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자보는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31년 12월 16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헨리 보퍼트 추기경의 주관하에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프랑스 방식에 따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면서, 프랑스인들로부터 '졸속으로 치러졌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 후 루앙으로 돌아와서 현지 군중의 환호를 받은 뒤, 1432년 1월 29일 잉글랜드로 떠나 2월 14일에 런던에 도착했다.

2.1.3. 아라스 조약과 악화되는 전황

1432년 5월 ~ 8월 20일, 부르고뉴군 사령관 장 빌리에 드 릴라당,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을 치렀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것이 부르고뉴군이 잉글랜드군에 협조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후 일드프랑스의 시골 지역 다수가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파리로 향하는 식량 운송은 더욱 방해받았다. 파리에서는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고, 전염병 마저 돌았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점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고, 그중 많은 이가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베드퍼드 공작은 음모를 적발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어떻게든 민심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전세가 갈수록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1432년, 베드퍼드 공작의 아내이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누이였던 안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간의 결혼 동맹이 끊어졌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은 테루안의 주교인 룩셈부르크의 루이의 주선 아래 생폴 백작 피에르 1세의 딸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와 결혼을 추진한 끝에 1433년 4월 20일 테루안에서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유럽에서 부유하고 강력하기로 유명한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받아 전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정작 그들에게서 별다른 지원을 받아내지 못했다.

자퀘타와 결혼한 후,베드퍼드 공작 존은 전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났다. 그동안 프랑스에 남은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을 파기하고 샤를 7세와 화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의 영토를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존은 의회에 출석한 뒤 의원들로부터 잉글랜드에 머물러서 국정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봉사가 왕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최고 의원으로서 이전에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에게 지급되었던 것보다 적은 봉급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의회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그는 1433년 12월에 이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를 강력하게 원한 그는 1434년에 다시 잉글랜드를 떠나 루앙으로 돌아갔다.

1435년, 잉글랜드 당국은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샤를 7세와 평화 협상을 하기로 결의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에 반대했지만, 헨리 6세도 평화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1435년 8월 5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부르고뉴 간의 평화 협상이 아라스에서 개최되었다. 잉글랜드 협상가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와 샤를 7세의 딸을 결혼시키고 영구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샤를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협상은 중단되었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아버지 용맹공 장이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되는 샤를 7세를 개인적으로 혐오했지만, 잉글랜드 측이 노르망디, 일드프랑스 등 점령지에서 빗발치는 반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국왕 헨리 6세는 너무 어리고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은 중병에 걸려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니, 그들과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 결과 1435년 9월 21일,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한다. 그 대신,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는다.
2.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한다.
3. 부르고뉴 공국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한다.
4.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한다.
5.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한다.

이리하여 부르고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게 하는 데 성공한 샤를 7세는 파리를 탈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때마침 잉글랜드와 프랑스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1주일 전인 1435년 9월 14일에 사망했고, 섭정 직을 놓고 권력분쟁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여지가 사라졌다. 샤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파리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436년 3월 말 5,000여 병력을 일으켜 파리로 진군한 리슈몽은 도중에 부르고뉴 지원군과 합세한 뒤 4월 6일 생드니에서 잉글랜드군 3,000명을 격파하여 생드니 요새를 공략하고 그들을 파리 성내로 밀어냈다. 4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고, 파리 시민들은 밀 가격이 4배로 뛰어오르는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주아인 미셸 드 랄리에, 장 드 라 퐁텐 등 4명의 시민이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자, 샤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군에 협력해 자신과 맞선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 16일, 프랑스군은 우회로를 이용해 파리 동쪽 끝에 있는 샹자크 항구로 진입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레 알르와 노트르담에 도착했다. 로버트 윌러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이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주민들이 창문에서 원거리 무기나 돌멩이를 던지는 등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자 바스티유 생 앙투안 요새로 도피했다. 4월 17일,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고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잉글랜드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요새를 떠나 루앙으로 철수했다. 그 후 샤를 7세는 1437년 11월 12일 파리에 입성하고, 난리를 피해 도망친 파리 시민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리하여 파리는 잔 다르크의 입성을 거부한 지 8년만에 프랑스의 수도로 돌아왔다.

한편, 잉글랜드 정계는 베드퍼드 공작 사후 심한 정쟁에 휘말렸다. 글로스터 공작은 1415년 헨리 5세가 시작한 프랑스 정복을 완수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샤를 7세와 최종 평화 협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르고뉴 공국이 등을 돌린 후, 잉글랜드 당국은 보퍼트 추기경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했다. 1436년 5월 8일, 왕실 의회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프랑스 섭정으로 선임했다. 당시 리처드는 겨우 14살이었기에, 보퍼트 추기경은 그를 꼭두각시로 삼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리처드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지휘력을 선보였다. 그는 군대를 일으켜 디에프와 페캉을 탈환한 뒤 샤를 7세의 손아귀에 넘어간 파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의회가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지 못해 사비로 장병들에게 급여를 줘야 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고 1437년 11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보퍼트 추기경 및 헨리 6세가 새로 총애하는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대립했다.

2.2. 친정(1437 ~ 1453)

2.2.1. 친정의 시작

1437년 1월 3일, 어머니 카트린이 사망해 헨리 6세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다. 또한 1428년부터 헨리 6세의 교육을 책임져 온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를 대신해 국왕의 부관으로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1439년 4월 30일에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헨리 6세는 16세 생일 직전인 1437년 11월 13일에 대부분의 왕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고, 이후로 정기적으로 의회에 참석해 새로운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자기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그는 아버지가 시작한 건축 후원 정책을 이어갔다. 1438년부터 1441년 사이에 옥스퍼드 대학의 올 소울스 칼리지, 이튼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를 설립햇다. 그가 건축을 의뢰한 건물 대부분은 수도원 또는 교육 건물의 기능을 갖춘 후기 고딕 양식으로 이뤄졌다. 훗날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의 교장은 매년 헨리 6세의 기일에 헨리 6세가 사망한 런던 탑의 웨이크필드 타워에 두 대학의 상징인 흰 백합과 장미를 바쳤다.

2.2.2. 결혼 협상과 악화되는 전황

헨리 6세의 결혼 상대는 1430년대 내내 장기간 논의되었다. 1434년,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헨리 6세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 중 한 명을 결혼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와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에도 샤를 7세의 딸 중 한 명과 헨리 6세의 결혼이 논의되었지만, 샤를 7세가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포기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자 결렬되었다. 1438년,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방어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 2세의 두 딸 안나, 엘리자베트 중 한 명과 헨리 6세를 결혼시키려 했지만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1440년 2월, 프랑스 대귀족들이 왕권 강화 및 사병 해체를 꾀한 샤를 7세를 상대로 프라그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의 딸 이자벨과 헨리 6세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는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노르망디와 기옌 사이에 잉글랜드의 교두보를 확보할 것이며, 샤를 7세에 대항하는 아르마냐크 백국에게 힘을 보태줌으로써 샤를 7세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프라그리 반란을 주도한 지도부는 이를 환영하면서도, 1415년 아쟁쿠르 전투 이래 지금까지 잉글랜드에 투옥되어 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을 석방해달라고 요구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이를 반대했지만, 헨리 6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권고를 받아들여 샤를 1세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 대신, 샤를 1세는 몸값으로 80,000 크라운를 즉시 납부하고 140,000 크라운을 나중에 분할 납부해야 했고, 지난날 용맹공 장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대해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과의 결혼 계획 역시 파탄났다. 샤를 7세가 1440년 7월 반란군을 물리친 뒤 1442년 아르마냐크 백국을 침공해 장 4세를 체포해버린 것이다. 그 후 프랑스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1441년 6~9월 퐁투아즈 공방전 끝에 퐁투아즈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군이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축출되었다. 1442년 5월 ~ 1443년 봄 샤를 7세의 타르타 원정으로 인해 가스코뉴의 상당수 영토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1442년 11월 ~ 1443년 8월 잉글랜드의 명장 존 탈보트가 노르망디의 주요 항구도시 디에프를 탈환하기 위해 디에프 공방전을 감행했지만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1441년,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의 아내 엘리노어 코밤은 점성가 토머스 사우스웰, 로저 볼링브로크를 불러 미래가 어찌 될 지를 문의했다. 두 사람은 헨리 6세가 올해 7월이나 8월에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시달릴 거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에 대한 소문을 접한 헨리 6세가 심란해하자, 측근들은 다른 점성술사들을 불러 점을 친 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밝혀냄으로써 왕을 안심시켰다. 이후 측근들은 소문을 추적한 끝에 토머스 사우스웰과 로저 볼링브로크, 엘리노어의 고해사제였던 존 홈즈를 체포했다. 엘리노어는 급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도주해 교회의 보호를 받으려 했지만, 주교단의 심문을 받았다.

엘리노어는 장기간에 걸친 심문 끝에 자기가 눈의 마녀인 마저리 조드메인(Margery Jourdemayne)으로부터 물약을 받아 복용함으로써 임신을 이루려 했다고 고백했다. 결국 엘리노어와 동료 공모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우스웰은 런던 탑에서 사망했고, 로저 볼링브로크는 교수형 당한 뒤 시체가 4등분으로 쪼개져 잉글랜드 각지에 보내졌으며, 마저리 조드메인은 화형에 처해졌다. 엘리노어는 런던에서 공개 참회를 하고 험프리와의 결혼이 무효로 처리된 뒤 채스터 성으로 보내져서 평생 옥고를 치러야 했다. 험프리는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2.3. 투르 협약과 글로스터 공작의 몰락

1442년 12월 16일, 헨리 6세는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었다. 당시 글로스터 공작이 물러난 뒤 잉글랜드 국정을 거머쥔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 젊은 왕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443년 4월, 헨리 보퍼트 추기경은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루앙보르도 모두 프랑스군의 공세에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루앙이 공략되면 노르망디가 위험해지고, 보르도가 공략되면 가스코뉴가 위험해지니, 어떻게든 두 곳 모두 지켜야 했다. 하지만 둘다 지키기에는 물자와 병력이 부족했다. 이에 헨리 보퍼트는 가스코뉴에 투입된 프랑스 주력군을 앙주나 푸아투로 유인한 뒤 야전으로 섬멸하고 프랑스에게 휴전을 강요하기로 하고, 초대 서머셋 백작이자 조카인 존 보퍼트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오래도록 포로 생활을 했고 군사 경력이 일천한 존 보퍼트가 이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에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추기경이 보퍼트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사적인 감정으로 나랏일을 결정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돌았다. 이후의 원정에서, 존 보퍼트는 막대한 군비를 썼음에도 성과가 보잘 것 없고 노르망디를 약탈해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으며, 쓸데없이 브르타뉴 공국을 침략하는 등의 실책을 연이어 범한 것으로 인해 직무 및 반역 혐의를 묻는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코펫 성으로 은퇴한 뒤 1444년 5월 30일에 그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헨리 보퍼트는 헨리 6세에게 조속히 샤를 7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왕비를 맞이하라고 청원했고, 헨리 6세 역시 엘리노어 코밤 사건 이후 상속인을 신속하게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잉글랜드 측으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샤를 7세는 거듭된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1444년 5월 28일, 잉글랜드 외교 대사 윌리엄 드 라 폴과 샤를 7세가 협상한 끝에 헨리 6세와 앙주의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2년간의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맺었다. 이때 투르 협약에는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메인을 프랑스에 돌려준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다. 1445년 4월 1일, 윌리엄 드 라 폴은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은 천연두 발발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4월 23일 햄프셔의 티치필드에서 거행되었고, 마르그리트의 잉글래드 왕비 즉위식은 5월 30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446년 8월, 잉글랜드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헨리 보퍼트와 윌리엄 드 라 폴 등은 험프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음모를 꾸몄다. 1447년 2월 18일, 험프리와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후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고호소에 연금되었던 그는 2월 23일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그가 갑작스러운 체포에 큰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고, 또다른 학자들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대의 대다수 민중은 그가 살해되었을 거라 믿었다. 당국은 대중의 의심을 뿌리치기 위해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했지만, 이후에도 험프리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 측이 메인을 양도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는 것에 항의하며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앞세워 무력으로 메인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자, 윌리엄 드 라 폴은 곧바로 협상을 재개했다. 메인에 지분이 있었던 잉글랜드 지주들이 토지와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의가 지연되었지만, 결국 1448년 3월 15일 잉글랜드인 지주들에게 10년치 지대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메인이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2.2.4. 노르망디 상실

1449년 3월 24일,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의 아라곤 용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은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 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프랑수아 1세가 브르타뉴에서 노르망디로 동진했고, 장 드 뒤누아피에르 드 브레제일드프랑스에서 북상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피카르디에서 노르망디로 서진했다. 그들은 각각 코탕탱 반도, 하류 노르망디, 상류 노르망디로 진격해 강력한 대포를 활용하여 요새들을 빠른 속도로 공략했다. 당시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은 1444년 투르 조약 체결 후에도 심각한 정쟁에 휘말린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거나 탈영하는 등 군기가 지극히 문란해졌기에, 프랑스군의 합동 공세에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역할을 맡았던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머스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 후 1450년 4월 15일에 벌어진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4,000명이 전멸하고 토머스 키리엘헨리 노베리가 생포되었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1,000명에 불과했다.

포미니 전투 소식은 노르망디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수많은 도시들이 잇따라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3,0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잔여 병력은 서머셋 공작의 지휘하에 캉에 들어가서 농성했지만 6월 12일 샤를 7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1450년 8월 12일 노르망디 내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인 셰르부르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완전히 상실했다.

2.2.5. 윌리엄 드 라 폴의 몰락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파죽지세로 공략하자, 메인을 프랑스에 넘겨가며 투르 협약 체결을 주도했던 윌리엄 드 라 폴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폭발했다. 1450년 1월 26일, 의회는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겼으며, 정당한 법 절차를 방해하거나 관리들을 매수한 혐의로 탄핵했다. 그리고 1월 28일, 윌리엄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윌리엄을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헨리 6세는 그를 총애했기 때문에 쉽사리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이 더욱 거세져서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이르자, 왕은 어쩔 수 없이 3월 17일 윌리엄에게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영주들이 집결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출두한 뒤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그러면서 자신은 왕을 위해 오래도록 헌신했으니 그 점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헨리 6세는 고심 끝에 잉글랜드를 배반한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지만, 정당한 법 절차를 방해하고 관리들을 매수한 혐의를 문제삼아 그해 5월 1일을 기준으로 5년간 왕궁에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1450년 3월 17일 밤, 윌리엄은 런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나 런던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2,000여 명의 폭도들이 윌리엄을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추격해, 윌리엄을 따르던 하인 일부를 붙잡아 중상을 입히고 재물을 약탈했다.

겨우 탈출한 윌리엄은 4월 30일에 외아들 존에게 "하느님을 화나게 하지 말고 매사에 자비를 구하며, 왕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봉사하며, 어머니를 잘 섬기고, 아첨하는 무리의 조언을 피하고 선하고 유덕하며 진실한 사람들을 동료로 끌어들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지 말고 좋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윌리엄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윌리엄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윌리엄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배에 올랐지만, 니콜라스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체포했다. 윌리엄이 헨리 6세의 인장이 찍힌 안전통행증을 내밀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선장과 선원들은 모의 재판 끝에 윌리엄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5월 2일, 윌리엄은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 후 윌리엄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 말뚝 위에 전시되었다.

2.2.6. 잭 케이드의 난

1450년 5월 8일, 잭 케이드라는 이름의 평민이 켄트의 애쉬포드에서 헨리 6세를 대신해 나라를 그릇되게 통치하는 대귀족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봉기를 일으켰다. 소농, 요멘, 길드원, 기사, 젠트리, 상인, 심지어 현지 도시의 시장과 경찰관까지 이 봉기에 대거 가담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반란에 대거 호응한 것은 그해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참패했다는 소식과 프랑스 해적이 켄트 해안을 습격한 사건이 겹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계층을 막론하고 뒤덮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450년 6월 1일, 케이드는 런던 남동쪽 블랙히스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때 그가 세운 숙영지는 해자를 파고 방어벽을 세우는 등, 정규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6월 4일, 케이드는 "켄트의 가난한 주민들의 항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왕에게 반역 한 관리들을 체포하고 처형 할 것을 요구했으며, 과중한 세금을 인하하고, 1351년에 제정된 '노동자법'을 폐지하며, 뇌물을 받은 판사들을 처벌하며, 사법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라고 주장했다.
“법은 우리 시대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허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범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뇌물 수수, 협박, 후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합법성을 구실로 한 부당한 행위만 할 뿐이다. 불의한 공의회는 법을 망각했고, 재산을 잃었으며, 평민을 파멸시켰고, 바다를 잃었으며, 프랑스도 잃었다. 왕 자신은 고기와 술값을 지불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그는 지금까지 빚진 다른 어떤 영국 왕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그의 주변에는 반역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에게서 반역자들을 솎아내야 한다."

서식스, 에식스, 서리 일대에서도 케이드의 봉기에 호응한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6월 6일, 헨리 6세는 이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레스터에서 열리던 의회를 해산시켰다. 6월 13일, 켄터베리 대주교 존 스태퍼드와 요크 대주교이자 잉글랜드 총리 존 캠프가 이끄는 왕실 대표단이 블랙히스에 가서 반군과 대면했다. 그들은 해산한다면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편, 케이드는 직물 상인 토마스 쿡을 그의 대리인으로 고용한 뒤 런던의 롬바르드 상인들에게 보냈다. 롬바르드 상인들은 토머스 쿡에게 갑옷과 무기, 완전하게 갖춰진 말 6마리와 1,000마르크의 현금을 제공했다.

6월 18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한 험프리 스태퍼드와 사촌 윌리엄 스태퍼드가 이끄는 10,000명 가량의 왕실군이 세븐오크스에서 케이드가 매복한 반군에게 격파되었다. 런던은 이 소식을 접하자 공황을 일으켰고, 헨리 6세는 어쩔 수 없이 부패하고 수탈을 일삼는 관리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재무장관 제임스 파인즈를 투옥했다. 연대기 작가 로버트 파비안에 따르면, 케이드는 승리를 거둔 후 험프리가 버린 갑옷과 헬멧 및 금박 박차를 착용했다고 한다.

1450년 6월 말, 케이드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 교외 사워스워크로 진입해 그곳의 모든 저택과 여관을 점령하고 화이트 하트라는 이름의 여관을 본부로 삼았다. 7월 2일, 헨리 6세는 워릭셔의 케닐워스로 피신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케이드는 5,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런던에 입성하고 런던 스톤을 어루만지며 존 모티머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런던의 제왕(Lord of London)"이라고 선포했다. 7월 4일, 반군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여러 관리, 특히 구금되어 있던 재무장관 제임스 파인즈와 그의 사위인 켄트주의 보안관 윌리엄 크로머를 살해했다.

그러나 반군이 런던 시내를 한바탕 약탈하자 반감을 품은 도시 엘리트들은 길드 민병대를 조직했다. 사흘 후인 7월 5일, 런던 브리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매튜 고프런던 탑을 지키고 있다가 길드 민병대와 반군이 한바탕 격투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출격해 반군을 공격해 런던 시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런던 브리지에서 사망했다. 며칠 후, 런던 탑에 피신했던 요크 대주교 존 캠프와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의 중재를 통해 반군과 정규군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잭 케이드 본인을 포함해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사면받았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사우스워크에 남아있던 케이드와 추종자들은 주변의 감옥에 갇혀 있던 수감자들을 풀어줘서 자신들과 함께 하게 한 뒤 로케스터로 진군해 퀸버러 성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반군 내에서 전리품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다가 사분오열되었고, 케이드는 얼마 안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이스트 앵글리아로 피신했다. 당국은 그에게 1,000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령을 내렸다. 7월 12일, 잭 케이드는 루이스에서 켄트 주의 새 보안관 알렉산더 이든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체포된 뒤 처형을 집행하기 위해 런던으로 끌려가던 중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사우스워크의 퀸스 벤치 광장에 7월 16일까지 전시되었고, 이후 4등분해 블랙히스, 노리치, 솔즈버리, 글로스터로 보내졌다.

1450년 8월 케이드를 따랐던 무리들이 윌리엄 파민터를 지도자로 세워 재 봉기했다. 파민터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기 위해 봉건 질서를 완전히 철폐할 것을 요구했지만 1451년 초 진압군에게 피살되었다. 이후에도 농민 봉기군은 1454년까지 잉글랜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준동했다.

2.2.7. 서머셋 공작과 요크 공작의 대립

1450년 9월 7일,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헨리 6세 에 대한 충성을 밝히면서, 노르망디를 상실하게 만든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비롯한 나쁜 조언자들을 제거하라고 촉구했다. 몇 주 후 의회에서 헨리 6세와 접견한 리처드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의 주장에 찬성했다. 결국 에드먼드 보퍼트는 그해 11월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리처드는 가신인 윌리엄 올드홀의 도움을 받아 의회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에드먼드 보퍼트는 1450년 성탄절에 왕비 마르그리트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에 의해 석방되었고, 이때부터 리처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451년 1월, 리처드의 가신인 헨리 6세가 지난 해 잭 케이드의 난에 호응한 것에 보복하고자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로 인해 켄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에드먼드 보퍼트는 존 탈보트와 함께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 리처드가 겐트 반란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리처드는 그해 4월에 러들로 성으로 피신했다. 그해 6월, 브리스톨 시장이자 의원인 토머스 영이 헨리 6세가 아직 후사가 없는 상황이니 리처드가 왕위 계승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에 분노한 서머셋 공작은 의회를 해산하고 토머스 영을 투옥했다.

1452년 2월, 요크의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에드먼드와 보퍼트 가문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2년 전에 서퍽 공작의 무능을 성토했던 요크 공작을 열렬히 지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이에 요크의 리처드는 켄트로 가서 지지 세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으로 재차 진군했고, 에드먼드는 국왕군을 이끌고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양군은 웰링에서 마주쳤다. 이후의 협상에서, 요크의 리처드는 에드먼드가 최근에 칼레의 수비대장에 임명된 것을 거론하며, 그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넘길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리처드는 곧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음을 직감하고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공개 선서를 하고 사면받아야 했다. 그 후 마르그리트 왕비가 1453년 봄에 임신한 사실을 선포하면서, 리처드를 왕위 계승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은 수그러들었다.

2.2.8. 가스코뉴 상실과 백년전쟁 종결

1450년 11월, 클레르몽 백작 장 2세장 드 뒤누아가 샤를 7세의 명령에 따라 생통주의 코냐크와 생메그랭을 점거했고, 팡티에브르(Penthièvre)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은 베르주라크(Bergerac)를 포위해 며칠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의 계획은 각자의 진로로 이동하여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 인근에 집결한 뒤 보르도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전역의 친잉글랜드 영주들과 잉글랜드군은 보르도에 대거 집결했다. 당대 연대기들은 잉글랜드 출신의 보르도 시장 가디페르 쇼트호세가 이끄는 이들 잉글랜드 맨앳암즈, 가스코뉴 기사단, 가스코뉴 민병대의 규모가 7,000~10,000명이었다고 밝혔는데,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가스코뉴 당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보르도에서 출발해 프랑스군을 상대하러 북상하던 중 블랑크포르(Blanquefort) 마을 인근에서 오발 영주 아마니외 달브레(Amanieu d'Albret)와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로빈 페틸로우가 이끄는 프랑스 선봉대 3,000명과 조우했다.

이후 벌어진 블랑크포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1,500~1,8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600명이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보르도로 도주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전역을 휩쓸었고, 1450년 겨울 보르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프랑스, 브르타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함대는 지롱드 어귀를 봉쇄해 잉글랜드군이 보르도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했다. 보르도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캡탈 드 부흐(Captal de Buch)는 즉시 항복하라는 뒤누아의 요구에 1451년 6월 14일까지 잉글랜드에서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았지만, 그는 미련을 못 버리고 온갖 핑계를 대며 6월 30일까지 항복을 미뤘다. 그러나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2달 후 가스코뉴의 또다른 대도시였던 바욘 역시 항복하면서, 프랑스 왕국은 헨리 2세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가스코뉴를 가져간 지 300여 년만에 가스코뉴를 재정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수백 년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주민들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고, 오랫동안 왕실에 막대한 세금을 안겨줬던 가스코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잉글랜드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52년 10월 17일 3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 65세의 노장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10월 23일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해 수비대를 몰아내고 탈보트를 환영했다.

탈보트는 가스코뉴 주민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몇 주 동안 가스코뉴 서부 일대의 요새화된 마을들을 순조롭게 공략하고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냈다.여기에 도르도뉴 계곡으로 진출해 리부른과 카스티용을 공략함으로써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쳐들어올 때 이를 저지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넷째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가 2,4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 아버지와 합세했다. 탈보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가스코뉴 민병대를 징발하여 엄격한 훈련을 실시해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

한편, 탈보트가 가스코뉴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샤를은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에게 맡겼고, 포병대 지휘권을 장 뷔로에게, 기병대 지휘권을 팡티에브르 백작 자크 1세 드 샤반에게 맡겼다. 이 중 장 뷔로는 평민계급의 법률가였으나, 늦은 나이에 화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프랑스 포병대의 개혁을 주도한 프랑스 최고의 포병전문가였다. 1453년 봄 공세를 시작한 프랑스군 15,000명은 보르도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잉글랜드군이나 가스코뉴군이 점령한 요새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탈보트는 이에 맞서 도르도뉴 강의 지류인 이슬 강에 있는 프홍삭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지만, 곧 보르도로 철수했다. 그 해 초여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메독에 진을 치고 보르도를 공략할 기회를 노렸다.

6월 21일, 탈보트는 프랑스 사령관들에게 마르티냐에서 한 판 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멀리 행군하느라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탈보트가 회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응하지 않았다. 탈보트는 일단 보르도로 돌아간 뒤 적이 자신보다 2배 이상 많은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3개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을 보르도로 최대한 끌어들인 뒤 각개 격파하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1453년 7월 초, 프랑스 중앙군이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작은 성벽 도시인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카스티용 주민들은 즉각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탈보트는 적이 보르도로 좀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보르도 시민들이 조속히 카스티용을 구원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보르도와 카스티용 시민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르도 당국 조차 그가 프랑스인을 두려워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탈보트는 그들의 뜻에 따라 카스티용을 구원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453년 7월 17일에 벌어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또다시 완패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군 4,000명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보르도 시로 도주했으며, 프랑스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과장이 있겠지만 잉글랜드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데 비해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총사령관 존 탈보트 역시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와 함께 전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를 포위했고, 3,000명의 잉글랜드인과 가스코뉴인 수비대는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10월 19일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 7세는 자신의 권위에 대항한 보르도 시에 100,000금 크라운의 벌금을 부과했으며, 잉글랜드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추방했고,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장 뷔로를 보르도의 종신 시장이자 몽그라스의 영주로 임명했다. 한편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에 휘말리면서 프랑스에 공세를 가할 여력이 더이상 없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2.3. 장미 전쟁으로의 길(1453 ~ 1460)

2.3.1. 왕의 광기와 요크 공작의 섭정

1453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 순행을 하던 헨리 6세는 8월 10일 클라렌던 궁전에서 사냥하던 중 정신 착란 증세를 보였다. 그 후 그는 1년이 넘도록 모든 외부 사건, 심지어 자신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도 완전히 무관심해졌으며, 환각에 시달렸다. 특히 1453년 10월 13일 아들이자 후계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들을 인지해달라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요청에 불응했다. 또한 1454년 3월 22일 왕실 의회 의장 존 캠프가 사망한 뒤 캠프의 후게자를 제안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침묵했고, 나중에는 이미 사망한 존 캠프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외조부 샤를 6세가 생애 마지막 30년 동안 간혈적으로 광기에 시달렸던 점을 들어, 외조부의 정신병이 유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듯 왕이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누구에게도 반응하고 인식하지 못해 국정에 손을 대지 못하자, 요크의 리처드는 이 기회를 노려 1454년 2월 의회를 소집한 뒤 잉글랜드 호국경에 취임했다.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는 긴급 체포된 뒤 런던 탑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1년간 지내야 했다. 또한 세간에는 무기력해진 왕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리 없다며, 마르그리트가 에드먼드 보퍼트와 간통해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소문이 요크 공작 측의 사주로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리처드는 섭정으로 재임하는 몇 달간 정부의 과도한 지출 문제를 해결하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심각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에 화해를 촉구해 내전을 회피하도록 했다. 그러던 1454년 여름부터 점차 제정신으로 돌아온 헨리 6세는 그해 12월 30일 마르그리트가 아들 에드워드를 보여주자 즉시 자신의 아이라고 선언했다. 1455년 초, 정신이 돌아온 헨리 6세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리처드를 호국경에서 해임하고 에드먼드를 칼레의 대장 직위에 복귀시켰다. 이후 에드먼드는 왕비의 지원을 받아 "적들로부터 왕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회를 소집해, 리처드 파벌을 대대적으로 탄핵하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요크의 리처드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에드먼드는 이에 맞서 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양자는 세인트 올번스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길 꺼렸기에 며칠간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에드먼드를 체포해 처형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리처드는 협상이 소용없다고 여기고 5월 22일 방심하고 있던 왕실군을 기습 공격했다. 왕실군은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와해되었고, 에드먼드는 인 성으로 피신했다가 적군이 포위하자 성채에서 출격해 적병 4명을 사살했다가 수많은 창과 검에 찔려 전사했다. 왕실군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후, 리처드의 군대는 헨리 6세가 호위병에게 버림받은 뒤 벌판에서 또다시 광기에 걸려 발작하는 걸 확인하고 신변을 확보했다.

2.3.2. 요크 공작과 마르그리트 왕비의 정쟁

헨리 6세가 또다시 광기에 시달리는 게 확인되자, 리처드는 1455년 11월에 다시 한 번 호국경에 취임했으며,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 부대를 보유하고 있던 도시에 칼레의 수비대장에 제 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선임했다. 하지만 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것에 깊은 부담감을 느꼈던 데다, 내전을 피하고 싶었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촉구했기 때문에, 리처드는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는 리처드에게 원한을 품은 보퍼트 파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미고 귀족들을 하나씩 포섭하며 천천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456년 2월 25일, 헨리 6세가 정신을 되찾고 의회에 나타나 요크 공작의 섭정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아버지가 누리던 직위를 물려받고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의 총애를 받고 리처드를 견제했다. 또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수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궁정을 코벤트리로 옮긴 뒤, 남편에게 리처드를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에 요크 파벌이 반발하면서, 양자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다. 그러던 1457년 8월 28일, 프랑스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습격했다. 이에 세간에서는 프랑스인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458년 3월 24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르시에의 설득을 받아들인 헨리 6세는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와 요크의 리처드, 마그리트 왕비 및 보퍼트 파 귀족과 요크파 귀족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행사를 거행했다. 이들은 이 행사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면서, 모든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해 나라를 잘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모습일 뿐이었고, 요크파와 보퍼트파 간의 정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458년 5월 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함대가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6척의 배를 나포했고, 며칠 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워릭 백작이 중립국인 한자 동맹의 무역선을 공격한 것은 왕명에 위배된다며 그를 런던으로 소환했다.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명에 따랐지만, 근위대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다시 런던을 탈출해 칼레로 돌아갔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모든 자금 및 물자 공급을 중단했고, 워릭 백작은 이에 대응해 카스티야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를 지속하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했다.

2.3.3. 요크파의 추방과 귀환

1459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왕을 대신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은백조 문양을 수여하고 귀족에 등록하는 한편, 요크파 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해임하고 토지를 몰수했다. 1459년 6월, 마르그리트는 번트리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요크파 귀족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리처드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랭커스터 파벌이 요크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들로 성에서 추종자들을 소환했다. 그의 심복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2]도 이에 합류하기 위해 미들햄 성에서 남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5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세에게 솔즈베리 백작을 요격할 군대를 모집하라고 명령했다.

1459년 9월 23일,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이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세를 사살했다. 여기에 칼레에 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도 칼레에서 출발해 리처드와 합세했다. 그 후 요크군은 우스터로 진군하면서, 헨리 6세 에게 충성을 맹세 하면서도 그의 "나쁜" 조언자들을 비난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헨리 6세는 블로어 히스에서 살해된 제임스 투세의 죽음에 연루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왕실 사면을 약속했다. 얼마 후, 양측은 러드퍼드 다리에서 대치했다. 10월 12일, 칼레 부대 사령관 앤드류 트롤로프가 왕실의 사면을 받기 위해 요크군 진영을 이탈해 랭커스터군에 합세했다. 이후 이탈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요크군은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리처드는 왕실군의 추적을 피해 아일랜드로 도주했고,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리처드의 장남인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칼레로 도주했다.

1459년 11월, 코번트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6명의 요크파 귀족과 21명의 비귀족이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저항을 멈추고 항복한 이들은 사면을 받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났다. 그해 12월 11일, 코번트리에 모인 영주들은 헨리 6세의 어린 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왕좌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칼레 대장으로 선임된 뒤 칼레로 피신한 워릭 백작, 솔즈베리 백작, 마치 백작을 토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헨리 보퍼트는 함대를 샌드위치에 집결시켜서 장차 칼레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자들로부터 헨리 보퍼트의 원정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수집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1460년 1월 15일 새벽 샌드위치에 집결 중이던 랭커스터파 함대를 기습해 궤멸시켰다. 그해 6월 26일, 워릭 백작은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함께 또다시 샌드위치로 쳐들어가서 소규모 적 함대를 물리친 뒤 샌드위치에 상륙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민중과 잉글랜드 추기경 토머스 부르시에의 지원을 받으며 런던으로 진격해 7월 2일에 큰 어려움 없이 런던에 입성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런던 탑을 포위하기 위해 남았고,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도망간 헨리 6세 추격에 나섰다.

1460년 7월 10일,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가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와 워릭 백작과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이끄는 요크군이 노샘프턴에서 맞붙었다. 이때 랭커스터파 측면 부대를 지휘하던 루틴의 제4대 그레이 남작 에드먼드 그레이가 요크군 편으로 돌아선 뒤 요크군이 왕실 캠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버킹엄 공작은 적군이 헨리 6세가 머무는 천막을 둘러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왕을 구출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전사했고, 헨리 6세는 체포되었다. 그 후 헨리 6세는 요크군에게 이끌려 런던으로 돌아갔고, 런던 탑 수비대는 그 모습을 보고 1460년 7월 19일에 항복했다.

2.3.4. 요크 공작의 왕위 계승 시도와 죽음

1460년 9월 8일, 아일랜드로 도피했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깃발을 내걸고 런던에 도착했다. 그는 10월 7일 전년도에 코번트리 의회에서 내려진 모든 조치를 취소한다고 선언했고, 10월 10일 귀족들을 왕궁에 소집한 뒤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왕좌에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이 없었기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요크파가 내세운 명분은 무능하고 부패한 헨리 6세의 조언자들을 몰아내고 정부를 개혁한다는 것이었는데, 요크 공작 스스로가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을 드러냈으니 반감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 당황한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등이 귀족들과 물밑으로 협상한 끝에,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대신 헨리 6세의 후계자로 다시 인정받았으며, 왕국의 호국경으로 다시 한번 임명되었다.

한편,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는 전국을 도피한 끝에 웨일스 북부의 할레크 성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재스퍼 튜더와 헨리 홀랜드 등 몇몇 귀족들과 합류했다. 이후 스코틀랜드로 이동한 그녀는 양국 국경의 주요 요충지인 베릭 성을 스코틀랜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스코틀랜드군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여기에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제9대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도 마르그리트에 합세했다. 약 15,000명으로 구성된 랭커스터군은 킹스턴어폰헐 근처에 집결해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의 영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한편, 헨리 보퍼트는 기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파견대와 함께 이들과 합세하고자 북상했다.

자기 영지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요크 공작 리처드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했다. 그는 장남 에드워드를 웨일즈로 보내 재스퍼 튜더를 상대하게 했고, 워릭 백작에게 런던과 헨리 6세를 맡긴 뒤, 자신은 솔즈베리 백작과 함께 북쪽으로 진군했다. 12월 9일에는 리처드이 막내 아들인 에드먼드도 군대를 이끌고 합세했다. 당시 그의 군대는 9,000명 미만이었으나, 그는 랭커스터군이 얼마 안될 거라고 오판했다. 12월 21일 웨이크필드 인근의 샌들 성에 도착한 리처드는 곧 랭커스터군에 포위되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기가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닫고 에드워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는 곧 아들의 구원이 오기 전에 탈출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2월 30일, 리처드는 성밖으로 무리하게 출격했다가 랭커스터군의 맹공으로 아들 에드먼드와 함께 전사했고, 솔즈베리 백작은 전투 다음날 생포된 뒤 처형되었다. 세 사람의 목은 요크 성문 위에 효수되었다.

2.4. 장미 전쟁(1461 ~ 1470)

2.4.1. 랭커스터파의 반격

1461년 초, 워릭 백작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의 리처드가 참패하고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웨일스로 전령을 보내 리처드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에게 서둘러 런던으로 와서 마르그리트 왕비의 군대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응해 런던으로 향하다가, 재스퍼 튜더가 제임스 버틀러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왕비의 군대와 합류하러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방향을 돌려 이들을 중간에서 요격하기로 했다. 1461년 2월 2일에 벌어진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 재스퍼 튜더와 제임스 버틀러는 크게 패했다. 이때 생포된 카트린 왕비의 남편이었던 오언 튜터는 에드워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한편, 마르그리트 왕비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녀는 병사들에게 자금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장병들이 현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걸 허용했다. 이로 인해 민심은 요크파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워릭 백작은 런던에서 군대를 이끌고 세인트 올번스로 진군한 뒤, 2월 12일 랭커스터군 앞에서 헨리 6세를 보여주며 귀순을 권고했지만 묵살당했다. 2월 17일, 마르그리트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공격을 퍼부었고, 워릭 백작은 패배를 면치 못하고 퇴각했다. 당시 헨리 6세는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노래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헨리 6세는 랭커스터군에게 신변이 확보된 뒤 아내와 재회했고, 어린 아들인 에드워드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보호하다가 체포된 요크 기사 윌리엄 본빌과 토머스 키리엘을 즉각 처형했다. 헨리 6세는 본빌과 키리엘에게 마르그리트를 대신해 중재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형을 감행했다. 이에 요크파는 에드워드의 잔혹함을 비난했으며, 헨리 6세가 위증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랭커스터군이 런던으로 진군하자, 런던 시민들은 자기들까지 심하게 약탈당할 거라 여기고 성문을 걸어잠갔다. 여기에 마치 백작 에드워드가 모티머 그로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르그리트는 런던 입성을 주저하다가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가기로 했다. 랭커스터군은 북상하면서 하트퍼드셔와 미들식스 일대를 심하게 약탈해 부족한 보급품을 충당하려 했다.

2.4.2.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타우턴 전투

얼마 후 런던으로 이동한 에드워드는 3월 1일 워릭 백작의 형제인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로부터 왕위를 게승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3월 2일 런던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등극했다. 다음날 네빌가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헨리가 왕비에게 무기를 들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왕위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고 발표함으로써 그의 즉위를 받아들였다. 에드워드 4세는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과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등 강력한 영주들과 합류한 뒤 북쪽으로 진군했다.

1461년 3월 29일, 타우턴에서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과 헨리 6세를 추종하는 랭커스터군이 격돌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양측이 동원단 군대는 총 50,000명에 달했으며, 20,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당시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군대는 타우턴 전투에서 좀처럼 나타나지 못했고, 요크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좌측면 부대가 붕괴될 위기에 몰렸다. 그러다 정오 무렵에 노퍽 공작의 군대가 뒤늦게 당도했고, 즉시 랭커스터군의 오른쪽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랭커스터군은 도주하다가 많은 이들이 추격자들의 무기에 맞아 죽거나 코크 강과 바르프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헨리 6세와 마르그리트 왕비는 탈출했지만, 그들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타우턴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에드워드 4세는 1461년 6월28일 런던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11월 4일에 헨리 6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에드워드 4세의 명령에 따라 소집된 의회에서 반역자로 선포되고 권리를 박탈당했다.

2.4.3. 스코틀랜드 망명과 체포

스코틀랜드로 망명한 헨리 6세는 제임스 3세의 궁정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조용히 지냈다. 1462년 여름, 마르그리트 왕비는 프랑스로 이동한 뒤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고 1462년 10월 노섬벌랜드에 상륙해 여러 성을 탈환했지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반격하자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다. 1463년 6월에 제임스 3세의 지원을 받고 노섬벌랜드의 노햄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워릭 백작이 재차 반격하면서 격퇴되었다. 그 후 마르그리트와 그녀의 아들 에드워드는 프랑스로 이동해 마르그리트의 아버지인 앙주의 르네의 궁정에 은거했다.

그 후 헨리 6세는 랄프 퍼시가 지휘하는 밤베르크 요새에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타우턴 전투 후 에드워드 4세에게 항복했던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가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파기하고 헨리 6세와 다시 합류했다. 1463년 11월, 서머셋 공작은 노섬벌랜드에서 요크파를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벌였다. 그러나 1464년 4월 25일 헤지리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고, 뒤이언 헥삼 전투에서 존 네빌이 이끄는 요크군에게 패배한 뒤 생포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에 노섬벌랜드 성들은 1464년 여름 워릭 백작의 군대가 오기 전에 백기를 들었다.

헨리 6세는 헥삼 전투 후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랭커셔로 도주해 1년간 은거했다. 그는 처음엔 어느 수도원에 숨었다가, 먼케스터 성으로 이동해 존 페닝턴의 보호를 받았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헨리 6세는 나중에 먼케스터 성을 떠나면서 존 패닝턴에게 유리 그릇을 선물하면서, 이 그릇을 깨지 않는다면 패닝턴 가문에는 남성 상속인이 항상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후 볼튼에 잠시 머문 헨리 6세는 와딩턴에 사는 리처드 탬페스트라는 인물에 의해 몇 달간 숨겨졌다. 그러나 그의 형제 존 템페스트는 열렬한 요크파였고, 헨리 6세의 정체를 알아보자마자 기사 제임스 해링턴에게 고발했다. 결국 1465년 7월 13일 저녁 식사를 하던 헨리 6세는 제임스 헤링턴 일행의 습격을 받고 도주하다가 클리더로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런던으로 이송된 뒤 런던 탑에 수용되었고, 그곳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2.5. 복위와 몰락(1470 ~ 1471)

2.5.1. 워릭 백작의 변심

1468년,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아내의 누이인 사보이의 보나 공녀와 결혼시킴으로써 랭커스터파를 은연중에 지원하는 루이 11세와 화해하고 요크 왕조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 몰래 부유한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고,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워릭 백작은 계획을 수습하고자 큰 곤욕을 치른 뒤 에드워드 4세에게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에드워드 4세가 우드빌의 친족들을 대거 등용해 워릭 백작과 네빌 가문을 견제했고, 프랑스 왕국과 화해하고 동맹을 맺기를 희망하는 워릭 백작과는 달리 부르고뉴국과 손잡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는 계획을 밀어붙이자,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1469년,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우선 자신의 딸 이사벨라와 조지 왕자의 비밀 결혼을 성사시켜서 조지와 손잡은 뒤,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조장해 왕의 시선을 돌린 뒤 잉글랜드 남부를 기습 공격했다. 1469년 7월, 워릭 백작은 에지코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은 뒤 자신의 본거지인 워릭 성 및 미들햄 성에 차례로 감금했다. 그 후 워릭 백작은 1469년 9월 의회를 소집해 조지 왕자를 잉글랜드의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요크파 귀족들이 전혀 호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여기에 지하에 숨어 있던 랭커스터 지지자들이 이 때를 틈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복수를 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풀어줬고,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파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또다른 형제인 글로스터의 리처드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1469년 10월 런던에 돌아왔다. 하지만 워릭 백작과 조지는 다시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고, 1470년 2월 링컨셔에서 전 랭커스터 파이자 워릭 백작의 부하가 된 로버트 웰스가 봉기를 일으키도록 조장했다. 1470년 3월 12일 로스코트 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을 쳐부순 에드워드 4세는 전장에서 워릭 백작과 조지가 로버트 웰스와 주고받은 서신을 확보한 뒤 두 사람을 반역자로 선포했다. 그들은 급히 칼레로 도주하려 했지만 칼레 수비대가 거부하자 1470년 5월 1일 소규모 지지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도주한 뒤 루이 11세의 환대를 받았다.

2.5.2. 랭커스터 왕조의 부활

1470년 7월 22일, 워릭 백작과 마르그리트 왕비는 앙제의 생 모리스 대성당에서 루이 11세의 중재 하에 만났다. 워릭 백작은 그동안 그녀에게 맞서 싸운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 왕비는 워릭 백작이 여전히 런던 탑에 투옥되어 있는 남편을 복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해준다면 그가 잉글랜드의 권신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워릭 백작은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고 재스퍼 튜더,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함께 1470년 9월 13일 다트머스에 상륙한 뒤 웨일스에서 랭커스터파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당시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던 터라, 잉글랜드 남부의 방비가 매우 허술했다.

뒤늦게 워릭 백작의 상륙을 알게 된 에드워드 4세는 군대를 돌려 돈캐스터로 이동했지만, 10월 2일에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박탈당한 것에 분노한 존 네빌이 형인 워릭 백작에 호응하고자 랭커스터파를 결집시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제 그는 북쪽의 존 네빌이 이끄는 6,000명의 병력과 남쪽의 워릭 백작이 이끄는 반군에 포위되는 형국에 처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에드워드 4세는 킹스린에서 배를 타고 부르고뉴국에 망명했다. 1470년 10월 5일, 워릭 백작과 존 네빌이 런던에 입성했고, 윈체스터 주교 윌리엄 웨인플리트와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런던 탑에서 헨리 6세를 알현한 뒤 복위 소식을 알렸다. 1470년 10월 13일, 헨리 6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공개적으로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았다.

2.5.3. 내분과 에드워드 4세의 반격

헨리 6세가 복위된 뒤, 워릭 백작이 잉글랜드 최강의 권신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는 곧 곤경에 처했다. 랭커스터파는 1461년 타우턴 전투 이래 요크 파벌에게 빼앗겨버린 영지를 돌려받기를 강력히 원했고, 요크파는 워릭 백작에게 충성한 대가로 토지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고심 끝에 에드워드 4세와 함께 플란데런으로 도망친 소수의 추종자들의 영지만 몰수해 랭커스터 파와 요크파에 나눠줬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양자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조지 왕자는 자기가 왕이 된 게 아니라 헨리 6세가 복위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147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가 상속인 없이 사망한 경우 조지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로 합의되었지만, 이 때문에 랭커스터 파의 강한 경계를 받아야 했다. 여기에 제4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는 에드워드 왕자가 사망한 뒤엔 자신들이 권좌에 올라야 한다고 여겼고, 이를 이루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1471년 2월 15일, 워릭 백작은 루이 11세의 요청에 따라 부르고뉴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로 복귀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물자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1471년 3월 11일, 에드워드 4세는 용담공 샤를이 제공한 36척의 전선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항해했고, 3월 14일 형제 리처드와 함께 요크셔의 레이븐스펀에 상륙했다. 그는 자신이 왕위를 위해 헨리 6세에게 도전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요크 공작이라는 칭호를 주장하기 위해 돌아온 거라고 선언했고, 이 때문에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후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의 군대를 격파한 에드워드 4세는 1471년 4월 1일 비로소 잉글랜드 국왕에 복위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선언하고 워릭 백작이 있는 코번트리를 포위했다. 워릭 백작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코번트리에서 출격해 그와 싸우길 거부하면서, 조지 왕자의 군대가 구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조지 왕자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 편으로 와달라고 청했고, 조지 왕자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조지로부터 항복하라는 요구를 받자, 워릭 백작은 격분해 끝까지 항전하기로 다짐하고, 그의 형제 존 네빌과 옥스퍼드 및 엑서터 공작의 구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속히 잉글랜드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존 네빌과 옥스퍼드 및 엑서터 공작의 구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4세는 4월 5일 방햐을 돌려 런던으로 향했다.

2.5.4. 랭커스터파의 붕괴

워릭 백작은 랭커스터 동맹과 합류한 뒤 에드워드 4세를 추격했다. 그는 런던 주둔군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농성하고 있을 때, 자신이 에드워드 4세를 따라잡아서 회전을 벌이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 런던을 지키고 있던 서머셋 공작은 마르그리트 왕비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마중하러 갔고, 서머셋 공작으로부터 런던을 지키고 있으라는 부탁을 받은 조지 네빌 주교는 에드워드 4세와 협상한 끝에 4월 10일 성문을 개방했다. 그렇게 해서 런던에 입성한 에드워드 4세는 헨리 6세의 신변을 확보한 뒤 런던 탑에 가뒀다. 4월 13일,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북상하면서, 랭커스터파가 다시 데려가는 걸 막기 위해 헨리 6세를 끌고 갔다.

1471년 4월 14일, 양군은 바넷에서 격돌했다. 전투는 짙은 안개 속에서 벌어져서 피아식별이 잘 되지 않았다. 급기야 존 네빌이 옥스퍼드의 랭카스터 군대를 적군으로 오해하고 화살을 퍼붓는 실책을 저질렀고, 옥스퍼드 공작은 배신당했다고 여기고 퇴각했다. 그 후 존 네빌과 워릭 백작은 전사했고, 엑서터 공작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겨우 빠져나갔으며, 옥스퍼드 공작은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그 후 런던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4세는 헨리 6세를 런던 탑으로 돌려보냈다. 그 사이, 마르그리트 왕비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가 웨이머스에 상륙했다. 며칠 후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합류해 워릭 백작이 크게 패해 전사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당장 프랑스로 도주하려 했지만, 에드워드 왕자가 끝까지 싸우자고 설득하자 마음을 돌렸다. 랭커스터군은 런던으로 진격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서 에드워드 4세를 속인 뒤 웨일스에 있는 재스퍼 튜더와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이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이들을 추격했고, 글로스터 시로의 진입을 거부당한 랭커스터군을 5월 4일에 따라잡고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 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패주하던 중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적병들에게 추격당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 왕비 역시 생포되었고, 서머셋 공작은 체포된 뒤 에드워드 4세의 명령에 따라 10명의 랭커스터 장군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무렵, 포콘버그의 사생아로 알려진 워릭 백작의 사촌 토머스 네빌이 지휘하는 랭커스터군이 런던으로 진군했다. 그는 5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런던에 침투해 헨리 6세를 구출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런던 시민들이 도시를 끝까지 방어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런던에서 물러나던 토머스 네빌은 튜크스베리 전투 소식을 접하자 5월 27일 사우샘프턴에서 에드워드 4세의 형제 리처드에게 항복했다. 1471년 5월 21일, 에드워드 4세는 마르그리트 왕비를 포로로 삼아 런던으로 귀환했고, 다시 왕좌에 앉았다.

2.5.5. 최후

헨리 6세는 런던 탑에 있는 웨이크필드 타워에서 1471년 5월 21~22일 밤에 사망했다. 요크 측 연대기인 <에드워드 4세 도착의 역사>에 따르면, 헨리 6세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아들 에드워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울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 연대기는 에드워드 4세 또는 리처드가 암살을 사주했으며, 이는 랭커스터파 잔당이 또다시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484년 8월 12일, 그의 유해는 리처드 3세에 명령으로 윈저 성의 성 조지 성당에 옮겨졌다. 1910년 조지 5세의 명령에 따라 그의 유해를 조사한 결과, 키는 약 177cm이며 밝은 머리카락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두개골에는 멍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헨리 6세가 실제로 살해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3. 가족관계

  • 앙주의 마르그리트(1430 ~ 1482): 앙주 공작 르네와 로렌 여공작 이자벨의 딸.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파의 맹주로서 활약했지만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생포된 뒤 남편이 갇혀 있었던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가 1475년 루이 11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난 뒤 프랑스로 돌아가 앙주에서 7년간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1453 ~ 1471):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외동아들. 어머니와 함께 요크파에 맞서 싸웠지만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헨리 5세 사후, 의회는 헨리 6세의 모후 카트린이 헨리 6세의 허락없이 재혼할 경우 재혼한 남성의 지위를 빼앗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모든 정치적 판단은 섭정단이 결정했기에, 이는 카트린의 재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1428년 의회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재혼했다. 상대는 헨리 5세의 종자였던 에윌스 출신의 기사 오언 튜더였다. 카트린은 오언과 함께 지내며 1430년에 에드먼드 튜더를, 1431년에 재스퍼 튜더를 낳았다. 카트린은 1437년 1월 3일에 막내 아이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이후 글로스터 공작은 카트린이 재혼했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에 착수한 끝에 소문이 사실임을 밝혀냈다. 오언 튜더는 감옥에 갇히고 벌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헨리 6세는 1439년 오언 튜더를 사면하고 연금을 받게 했으며, 에드먼드와 제스퍼를 자신의 이부형제로 인정하고, 에드먼드를 리치먼드 백작, 제스퍼를 펨브로크 백작에 선임했다. 이후 두 형제는 장미 전쟁 시기에 헨리 6세를 위해 요크파를 상대로 끝까지 항전했다. 또한 1455년 에드먼드를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시켰는데, 두 부부는 훗날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열 헨리 7세를 낳았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혈통과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자신이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헨리 6세의 조카란 사실을 계승권 주장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따온 헨리 7세를 즉위명으로 삼았고, 자신의 둘째아들의 이름도 다시 헨리라고 지었다.

4. 사생활

플레잉 카드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래서 플레잉 카드 K에 자신의 얼굴을 박고 플레잉 카드 Q에 자기 왕비의 얼굴을 박은 뒤 플레잉 카드 J에는 자신이 총애하는 대신 4명의 얼굴을 박아서 널리 배포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영주들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플레잉 카드에 그 영주의 얼굴을 박아서 선물하는 게 유행했다.

자기 외할아버지 샤를 6세의 정신병과 광기를 물려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생전 외할아버지처럼 무능하고 무기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을 때 아들에게 축복을 내리기를 청하는 버킹엄 공작이나 왕비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거나, 심지어 아들의 대부였던 켐프 대주교가 사망한 뒤 자신이 직접 새 대부를 선택했음에도 켐프 대주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 등 꽤 심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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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aperon, 중세의 머리 장식[2] 칼레 수비 대장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