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00:06:47

샤를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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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BF><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4대 국왕
샤를 6세
Charles VI
파일:saint-c388vre_-_charles_vi_of_france.jpg
이름 샤를 드 프랑스
(Charles de France)
출생 1368년 12월 3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422년 10월 21일 (향년 53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385년 결혼)
자녀 샤를, 이자벨, 잔, 샤를, 마리, 미셸, 루이, , 카트린, 샤를 7세, 마르그리트(사생아)
아버지 샤를 5세
어머니 부르봉의 잔
형제 루이 1세, 카트린
1. 개요2. 생애
2.1. 삼촌들의 보좌
2.1.1. 세금 반란2.1.2. 플란데런 원정2.1.3. 디스펜서 십자군2.1.4. 플란데런 평정과 경제 부흥2.1.5. 스코틀랜드 파병과 마게이트 해전2.1.6. 브르타뉴 사건과 헬러 원정
2.2. 친정 선언2.3. 브르타뉴 원정과 첫번째 광기2.4. 발 데 아르당 사건과 심화되는 광기2.5.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약과 결혼 협약2.6. 아비뇽 봉쇄2.7. 오와인 글린두르 지원2.8.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정쟁
2.8.1. 루이 1세 도를레앙 vs 호담공 필리프2.8.2. 루이 1세 도를레앙 vs 용맹공 장2.8.3. 루이 1세 도를레앙 암살 사건과 용맹공 장의 집권
2.9.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2.10. 잉글랜드 왕국의 침략2.11. 연이은 패배2.12. 용맹공 장의 파리 진군2.13. 용맹공 장의 최후와 트루아 조약2.14. 최후
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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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4대 왕이며, 샤를 5세의 아들이다. 별칭은 '사랑받는 왕(le Bien-Aimé)' 또는 '미치광이 왕(le Fou)'이다.

2. 생애

2.1. 삼촌들의 보좌

1368년 12월 3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의 호텔 생폴 궁전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인 잔 드 부르봉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출생하자마자 프랑스의 도팽 칭호를 받았다. 1374년, 당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샤를 5세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있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왕비 잔 드 부르봉과 형제들에게 어린 아들을 보필하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왕비는 왕실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갖고 왕실 수입 대부분을 할당받지만, 통치권은 가질 수 없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는 정부를 운영하지만, 베리 공작 장 드 베리,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동의를 얻어야만 정책을 결정,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샤를 6세의 결혼은 자기 형제들과 왕비, 왕비의 형제인 루이 2세 드 부르봉 등으로 구성된 후견 위원회의 동의 후에만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후견 위원회는 샤를 5세의 충실한 고문들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1380년 9월 16일, 샤를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샤를 6세는 12세의 어린 아이였고, 어머니 잔은 샤를 5세보다 2년 전에 사망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섭정을 맡았고, 왕을 가르치는 일은 호담공 필리프가 맡았다. 그러나 루이 1세는 왕비가 부재한 틈을 타 왕실 재무부에서 32,000 프랑을 임의로 빼서 자기 사비로 챙겼다가 형제들과 사촌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형제와 사촌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은 루이는 2달 만에 섭정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샤를 6세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1380년 11월 4일에 대관식을 거해앴다. 이후 샤를 6세를 보좌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샤를 5세의 형제와 친척들이 이 위원회에 소속되어 나라를 공동으로 이끌었다. 루이 1세는 섭정 직에서 물러나 일개 위원이 된 뒤 자기 의사가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자 프랑스 국정 운영에 흥미를 잃고 나폴리 왕국을 공략해 그 나라의 왕이 되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고,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국정을 운영했다.

2.1.1. 세금 반란

1379년 말, 샤를 5세는 가구당 12프랑의 난로세를 징수한 것에 반발한 랑그독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큰 충격을 받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난로세를 폐지했다. 그 결과 군자금을 모을 재원이 부족해지면서, 프랑스 왕국의 재정복 정책은 둔화되었다. 샤를 6세 대관식 일주일 후인 1380년 11월 11일, 전쟁세를 계속 거두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삼부회가 개최되었다. 삼부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잉글랜드 왕국이 샤를 5세 치세 때 막대한 영토를 상실했으며, 심각한 내부 혼란에 휩싸여 프랑스를 더이상 위협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세를 거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11월 16일, 왕과 삼촌들은 의원들의 주장에 밀려 필리프 4세 이후 만들어진 모든 임시세를 폐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과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며, 장차 잉글랜드의 침략이 벌어질 지도 모르니, 그 전에 잉글랜드군을 프랑스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381년 2월 재소집된 삼부회는 3월 1일부터 1년간 전쟁세를 걷기로 합의하고, 그 대가로 수많은 도시 헌장과 특권이 합의되었다. 한편, 장 드 베리의 통치를 받던 랑그독 주민들은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그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소요를 연이어 일으켰다. 급기야 1381년, 프랑스 남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가 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악착같이 거두는 세네샬 3명을 약탈자라고 비난하면서, 랑그독 주민들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원을 해제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세네샬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호응한 랑그독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은 샤를 6세와 함께 진압에 착수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군의 공세로 랑그독 각지에서 심각한 약탈이 발생하자, 가스통 3세 페부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65,000 프랑을 즉시 왕실에 지불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가스통 3세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랑그독 주민들은 항복하고 베리 공작에게 복종하는 대신 자신들을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배상해달라고 요청했고, 프랑스 왕실은 이를 받아들였다. 1381년 12월, 베지에에서 열린 랑그독 의회에서 14세 이상의 모든 주민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했다.

1382년 1월 17일, 프랑스 왕실은 나폴리 원정을 떠나는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지원하기 위해 간접세를 부과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2월 27일 캉, 루앙에서 간접세에 반발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뒤이어 팔레즈, 오를레앙, 랭스, 아미앵, 라옹 등지에서 반란이 터졌다. 급기야 3월 1일 파리에서 납망치로 무장한 폭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파리 주변 마을을 종횡무진하면서, 세리들을 모조리 때려 죽이고 건물들을 파괴했다. 이에 호담공 필리프가 이들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그는 일전에 세금을 내기를 거부해 체포되었던 부르주아 4명을 석방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지만, 폭도들은 관습법을 어긴 죄로 투옥된 다른 죄수들이나 정치범들도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폭도들에 의해 풀려난 전임 파리 장관 휴그 오브리오가 그들을 이끌길 거부하자, 폭도들이 전의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후 샤를 6세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체포된 폭도 40명을 처형하고, 시민들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7번째 처형이 진행될 때 시민들이 강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체포되었던 폭도들이 도로 풀려났다. 이후 샤를 6세는 루앙으로 출진해 반란군의 항복을 받아낸 후 루앙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참수되었고, 루앙의 자치권은 몰수되었으며, 왕에게 선임된 총독이 루앙을 이끌었다. 그러나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은 이후에도 세금 납부를 대놓고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했다.

2.1.2. 플란데런 원정

1382년 1월 24일 겐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5월 3일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은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10,000 명의 프랑스군이 아라스에 집결했다. 샤를 6세가 명목상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이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11월 12일, 프랑스군은 코미네스 마을 인근의 리스 강에서 플란데런 반란군 900명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리스 강의 유일한 다리를 끊어서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야밤에 400명의 프랑스 기사를 이끌고 강 건너편으로 건넌 뒤 다음날 아침 플랑드르 반란군과 교전했다. 그 사이에 다리를 재건한 프랑스군 대부분이 건너갔고, 플란데런군은 패주했다. 이후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와 마을은 프랑스군에 평화 협상을 요청하고 프랑스 왕실에 몸값을 지불했다.

프랑스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파스상델레 인근의 루즈베케 언덕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언덕 반대편에 진을 쳤다. 11월 27일 아침,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 기병대의 돌파를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밀집된 정사각형 대형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올리비에는 안개 속에서 진군해오는 적을 확인하고 보병대에게 적과 맞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중기병에게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플란데런군은 프랑스 보병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 중기병들의 측면과 후방 공격에 직면했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혔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은 원형 방진을 치고 항전했지만, 사방에서 원거리 무기를 발사하고 기병들이 계속 전열을 흐트리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고, 필립은 전사했다.

루즈베케 전투 후, 샤를 6세는 브뤼헤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내고 120,000 프랑의 공물과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이후 파리로의 귀환길에 오른 샤를 6세는 플란데런 주민들이 프랑스에 저항하는 상징이 된 쿠르트레 시를 철저히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이 프랑스 기사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데 기여했던 황금 박차 500쌍을 쿠르트레의 노트르담 교회 예배당에서 끌어내 모조리 파괴한 뒤, 도시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자신의 도시를 위해 왕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렇게 쿠르트레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프랑스 장병들에게 학대당했다.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자크마트 시계를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디종으로 가져가서 노트르담 드 디종 교회의 탑 위에 설치했다.

플란데런 반란이 평정되자, 프랑스 북부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샤를 6세는 1383년 1월 11일 파리에 입성한 뒤 군대를 파리의 여러 요충지에 배치해 시민들을 감시하게 했으며, 반란의 주요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단순 가담자에게는 벌금을 매겼다. 1월 27일에는 파리 시 자치권의 몰수가 선포되었고, 왕이 파리 상인의 장관과 파리 시의회 의원을 직접 선임하며, 파리 시의 부르주아 관리는 군주에게 직접 보고하는 기관으로 대체되었다. 1383년 3월 1일, 파리 시민 각 가정 대표가 맨몸으로 왕궁으로 찾아와서 프랑스 총리 피에르 도르주몽으로부터 반란에 가담한 것이 잘못된 이유를 전해들은 뒤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했고, 샤를 6세는 파리 시를 사면하겠다고 선언헀다. 뒤이어 루앙 시는 6만 프랑의 벌금을 지불하고 모든 경제적 특권을 잃었는데, 특히 센 강의 무역선들에 관세를 자율적으로 걷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랑그독 전역은 800,000프랑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2.1.3. 디스펜서 십자군

루즈베케 전투 패전 후에도, 겐트 주민들은 반란을 꿋꿋이 이어갔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와 프랑스 왕국이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진정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헨리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헨리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헨리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한 뒤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 플란데런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으며, 5월 25일 루이 2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플란데런 연합군을 됭케르크 인근에서 격퇴했다.

잇따른 승리에 기세가 한껏 오른 기사들은 플란데런 백작과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이프르 시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리처드 2세는 전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의 휘하에서 맹활약한 노장 윌리엄 뷰챔프가 이끄는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프랑스와 플란데런에 대한 공격을 미루라고 지시했다. 헨리는 왕의 명령에 따르려 했지만, 기사들이 이프르를 공략해야 한다고 계속 촉구하고 겐트 수뇌부 역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자,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383년 6월 8일, 헨리의 십자군이 이프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에 착수했다.(이프르 공방전) 하지만 이프르 주민들은 수비대장 얀 돌트르(Jan d'Oultre)의 지휘하에 농성 준비를 이미 완료했다. 도시 교외의 주거지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이때 나온 목재는 흙으로 된 성벽과 돌로 만들어진 성문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두 개의 도랑을 도시 주위에 파 두었고, 말뚝으로 강화된 높은 가시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성벽의 방어를 보강했다.

십자군은 포위 첫날부터 사흘 동안 도시의 정문인 템플 게이트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성벽을 완전히 포위했고, 흙을 사용하여 외부 도랑을 메웠다. 포위 8일째인 6월 15일에 포병대를 동원해 방어 시설을 공격해 손상을 입혔지만,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 십자군은 이후에도 수시로 도시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포격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를 돕기 위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한 루이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수비대와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으면서 잉글랜드군을 앞뒤로 괴롭혔다.

8월 8일, 헨리는 겐트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철수했다. 겐트군은 이후에도 도시를 포위했지만 9월 10일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헨리와 기사 휴 칼블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십자군은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년 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8월 15일 아라스에서 소집된 뒤 플란데런으로 이동해 8월 말에 테루안에 이르자, 헨리는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했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헨리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헨리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1.4. 플란데런 평정과 경제 부흥

잉글랜드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난 뒤에도 겐트는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던 1384년 1월 30일,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이후 외동딸 마르그리트가 플란데런 여백작이 되었고, 호담공 필리프는 아내의 권리에 따라 플란데런을 관리하게 되었다. 필리프는 플란데런 전쟁을 마무리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그는 기 2세 드 퐁타예르와 장 드 기스텔을 플란데런 백국 총독으로 선임하고, 플란데런 귀족들에게 세금 징수 책임을 맡겼다. 또한 요새의 개조 및 건설을 위한 사업을 단행했다. 1384년 1월, 필리프는 겐트 시와 15개월간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로이링헨 협정을 체결한 뒤 겐트를 제압하기 위한 병력을 준비했다. 겐트 시민들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10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지원군을 받았다.

1385년 5월 휴전이 끝나자, 겐트 시민들이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브뤼헤를 공략하려고 시도했고, 담 항구를 장악했다. 필리프는 즉시 슬로이스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8월 28일에 담을 공략했다. 하지만 겐트의 방어가 워낙 강해서 무력으로 공략하기엔 무리라고 보고, 그 대신에 도시의 모든 보급선을 차단해 굶주리게 했다. 이후 겐트 시민들은 도시 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자고 간청했고, 필리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385년 12월 18일, 양자는 투르네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는 겐트 주민들을 사면하고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벌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후 모든 플란데런 도시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플란데런 전쟁이 막을 내렸다.

호담공 필리프는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플란데런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세금 특혜를 부여해 황폐화된 도시에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도록 촉진했으며, 잉글랜드와의 무역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잉글랜드 화폐보다 약간 적은 양의 금을 함유한 플란데런 금화를 주조했다. 그 결과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필리프는 상당한 자본 이득을 얻었다. 필리프의 이같은 성과를 지켜본 프랑스 왕실은 자기들 역시 지나치게 높은 프랑화의 가치를 절하하고 통화를 늘림으로써, 상품 유통을 촉진하기로 했다. 그 결과 프랑스 경제는 되살아났고, 연이은 반란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은 안정되었다.

2.1.5. 스코틀랜드 파병과 마게이트 해전

1369년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한 이래, 프랑스 왕국은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가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을 탈환했다. 그 후 프랑스 궁정에서는 이참에 잉글랜드까지 쳐들어가서 끝장을 내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385년 5월, 장 드 비엔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1]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하던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 해 겨울 스코틀랜드군 4,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렌드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나 뒤이은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한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이 약탈당하자,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긴 스코틀랜드는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다. 장 드 비엔은 나중에 프랑스 왕실이 돈을 보내준 덕분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샤를 6세 궁정이 샤를 5세 시절과는 달리 해군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자 크게 실망하여 오스만 술탄국에 맞서 십자군을 결성한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에 가담했다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1386년 10월,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국을 공격한 프랑스에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할 병력과 선박을 모으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가 1385년 투르네 협약을 맺고 그에게 귀순한 플란데런인들이 호담공 필리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잉글랜드군이 상륙하면 즉시 호응하여 친잉글랜드 정권을 세우리라 기대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선임되었다.

1387년 3월 16일, 아룬델 백작은 센드위치 항에서 60척의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프랑스 함대와 카스티야 함대가 지난 가을부터 슬로이스 항에 3만 명의 군대와 1,200척의 함대를 집결시키고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이들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계획은 호담공 필리프가 갑작스런 병환에 걸리는 바람에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선박이 슬로이스에 머물면서 무역 선박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387년 3월 24일 출항한 아룬델 백작의 잉글랜드 함대는 얼마 후 마게이트 앞바다에서 플란데런 선박과 카스티야 선박 분견대가 포함된 프랑스 함대가 호송하는 와인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이들을 향해 달려들자, 수많은 플란데런 선박이 도주했고 다른 선박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이내 압도되어 슬로이스 항으로 패주했다. 아룬델 백작은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한 끝에 3월 25일 슬로이스 항구 인근 카잔트 섬 앞바다에서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슬로이스 항구 외곽 정박지에 세워진 7척의 배를 추가로 노획하고 슬로이스 항구에 정박한 적선 11척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

그 후 잉글랜드 함대는 슬로이스 항을 2주 이상 봉쇄하면서 항구에 접근하는 선박들의 물품을 탈취하거나 선박 자체를 나포했다. 하지만 아룬델 백작은 항구를 점령하는 대신 해변에 육군을 상륙시킨 후 해안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플란데런인들이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를 상대로 봉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항구를 봉쇄한 잉글랜드군 내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죽어가자 잉글랜드로 귀환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 원정에서 수십척의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불태웠고, 무거운 짐을 실은 카스티야 선박 3척을 포함해 68척의 선박을 나포했다. 이렇듯 해군이 마게이트 해전에서 많은 손실을 보자,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2.1.6. 브르타뉴 사건과 헬러 원정

1387년 6월 26일,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이 반에서 열린 연회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장 4세는 그를 가방에 가둔 뒤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지만, 이내 명령을 철회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는 몸값으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블랑, 조슬랭, 주곤 및 르 길도 요새를 장 4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1388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장 4세가 압수한 영토를 올리비에 5세에게 돌려주지만 몸값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중재했다. 이후 올리비에와 장 4세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388년, 헬러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룩셈부르크 공작 벤첼 1세의 미망인인 브라반트의 잔으로부터 영지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샤를 6세가 중재에 나섰지만, 기욤 7세는 라틴어로 된 모욕적인 도전장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프랑스 왕실은 이에 분개해 응징하기로 결의했고,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지휘 아래 즉시 군대를 이끌고 헬러 공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프랑스군은 필리프의 제안에 따라 브라반트-에노로 이어지는 길 대신에 아르덴-에노를 거치는 행군을 택했다. 이는 자기 영지가 약탈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필리프의 계산이었다.

1388년 10월 13일, 빌헬름 7세 폰 율리히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코렌지히에서 프랑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브라반트의 잔은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고, 부르고뉴의 보호 아래 놓였다. 1390년 9월 28일, 그녀는 필리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양도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원정을 수행한 프랑스군은 험난한 지형을 갖춘 아르덴을 왕복하면서 큰 손실을 입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샹파뉴에 돌아온 프랑스군의 몰골이 거지떼나 다름없었다고 기술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에 대한 군대와 민중의 인기는 매우 떨어졌고, 샤를 6세의 고문들은 이를 필리프의 권세를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2.2. 친정 선언

1388년 10월 28일, 샤를 6세는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진두지휘한 헬러 원정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뒤 군대의 선두에 서서 랭스에 입성했다. 1388년 11월 3일, 샤를 6세는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랭스의 주교 궁전에서 삼부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이제 나이가 충분히 찼으므로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랑하는 삼촌들에게 "나와 왕국의 일을 위해 겪었던 수고에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던 호담공 필리프와 베리 공작 장은 당황했지만, 샤를 6세의 행위에 문제삼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샤를 6세는 프랑스 재무관 장 드 몽테규,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시종관 뷔로 드라리비에르, 프랑스 그랜드 마스터이자 고문 장 르 메르시에, 왕실 평의회 의장 피에르 드 빌렌의 보좌를 받으며 나라를 무난하게 이끌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이들 다섯 명을 마모셋(Marmouset)이라 지칭했는데, 그 의미는 "왕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2.3. 브르타뉴 원정과 첫번째 광기

1392년 6월 13일, 프랑스 무관장으로서 프랑스군 전체를 통솔하던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이 생폴 호텔에서 개인 저택으로 이동하던 중 라 페르테 베르나르, 프레시네, 사비에 영주인 피에르 드 크라옹이 이끄는 무리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피에르 드 크라옹은 사비에 요새로 피신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브르타뉴 공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이 올리비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으며,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올리비에 5세는 분명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사주했을 거라고 여겼다. 프랑스 왕실은 장 4세에게 피에르 드 크라옹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장 4세는 거부했다.

그 후 샤를 6세는 올리비에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암살 미수범을 숨기는 장 4세를 응징하겠다고 선포하고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했다. 그해 여름 원정군이 숨막히는 더위 속에 르망 숲에 들어섰을 때, 누더기 옷을 입은 한 노인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왕이 타고 있던 말 굴레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더 이상 가지 마십시오, 고귀한 왕이시여! 당신은 배신당했습니다!"

신하들은 그를 왕에게서 밀쳐냈지만,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가 후방에서 계속 고함을 지르는 걸 내버려뒀고, 샤를 6세는 그런 노인을 연신 돌아보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후 르망 숲의 가장자리에 이르렀을 때, 모래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탄 말이 모래밭에 막 발을 내디뎠을 때, 왕의 창을 짊어지는 임무를 맡은 시종이 졸다가 왕의 창을 어느 시종의 투구에 떨어뜨리면서 투구와 창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당시 말 위에서 졸고 있던 샤를 6세는 그 소리를 듣고 광란 상태에 빠져 별안간 고함을 내질렀다.
"배신! 배신자다! 놈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Sus, sus aux traîtres ! Ils veulent me livrer !)

그는 검을 빼들고 미친듯이 휘둘려 시종 4명을 손수 쳐죽였다. 동생 루이 1세 도를레앙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급히 왕에게서 무기를 빼앗았고, 왕은 곧 발작을 일으킨 뒤 땅바닥에 엎어졌다. 그 후 샤를 6세는 수레에 묶인 채 이송되었고, 이틀간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회복되었다. 이후 샤를 6세는 82세의 의사 기욤 드 하시니의 치료를 받았다. 기욤은 왕의 질환은 우발적이고 선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샤를 6세는 감각을 되찾고 열이 가라앉자 파리로 보내진 뒤 성에서 성으로 여행하며 휴식을 취했다. 원정은 중단되었고, 샤를 6세의 삼촌들이 왕이 정신병에 걸렸음을 확인한 후 섭정을 다시 맡았다. 그들은 마모셋으로 일컬어지던 샤를 6세의 측근들의 직위를 박탈하고 왕국에서 추방했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2.4. 발 데 아르당 사건과 심화되는 광기

샤를 6세의 정신 건강은 르망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취약했다. 그는 자기 몸이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고 느꼈으며, 어떻게든 자기가 '파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예방 조치를 했다. 더 이상 말을 타지 않았고, 걷기를 멈췄으며, 소가 끄는 방석을 가득 실은 수레에 실려 운반되었다. 그렇지만 초기만 해도, 광기는 규칙적으로 발생했으며, 단지 자기 몸이 깨지는 걸 염려하는 정도에 그쳤고,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명석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393년 1월 28일,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는 시녀인 카트린 드 파스토브린의 세번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때 왕의 측근들은 우울증에 걸린 왕을 위로하기 위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드는 여흥을 준비했다. 샤를 6세는 이에 동참하기로 하고, 다섯 명의 젊은 귀족과 함께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다. 무도회장은 어두컴컴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행되어 귀부인들을 공황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이때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이들을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들이댔고, 이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 네 명이 타 죽고 샤를 6세는 베리 공작부인 잔이 망토로 덮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일명 '발 데 아르당(Bal des Ardents)'이라 일컬어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루이가 샤를 6세를 암살하려고 일부러 횃불을 들이댔을 거라고 추정한다.

다음날, 왕이 무도회장에서 짐승 흉내를 냈다가 하마터면 타 죽을 뻔했고, 왕의 시종 4명이 타 죽어버렸다는 소식이 파리 전역에 전해졌다. 이에 분노한 파리 주민들은 샤를 6세를 위험에 빠뜨린 고문들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가장 방탕하고 타락한 신하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샤를 6세는 삼촌들의 부축을 받으며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이 건재함을 보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재난의 책임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셀레스틴 수도회에 자금을 기부해 예배당을 신축하고 불타 죽어버린 네 영혼을 위한 미사를 매일 거행하도록 했다.

발 데 아르당 사건 후, 샤를 6세의 광기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했다.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점점 더 짧아졌고, 광기의 정도는 더욱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급기야 샤를 6세는 아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베니딕토 수도사 미셸 펜투앵에 따르면, 샤를 6세는 "나를 뻔뻔스럽게 쳐다보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이자보에게 괴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으며, 자신에겐 자녀가 없고 결혼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보는 광기에 휘말린 남편에게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이자보는 남편과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여기고 호텔 바르베트(Hôtel Barbette)에서 따로 살았다.

샤를 6세가 걸린 정신병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 일부 고병리학자들은 편집증성 단기 정신병적 장애일 거라고 추정했고, 일부 학자들은 조현병이었을 거라고 추정하며, 양극성장애였을 거라는 추정도 제시된다. 정신병의 원인에 대해, 샤를 6세의 부모인 샤를 5세와 잔 드 부르봉이 6촌 관계였던 것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고, 친척인 루이 2세 드 부르봉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증조부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 드 클레르몽도 광기의 징후를 보였던 점을 근거로 정신병이 유전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은 어떻게든 샤를 6세를 고쳐보려 애썼다. 의사들이 치료할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자, 점술사와 종교인에게 의존했으며, 수많은 종교 행렬을 조직해 하느님께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샤를 6세는 끝내 죽을 때까지 광기에 시달렸으며, 신학자들은 점술사들을 왕궁에 들여보낸 것에 비난하는 성명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2.5.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약과 결혼 협약

파일:Richard and Isabella on their wedding day in 1396.jpg

1391년 5월, 칼레에서 곤트의 존이 잉글랜드 대표 자격으로 프랑스 사절단과 접촉했다. 그리고 1392년 3월 아미앵에서 존이 다시 사절단과 접견해 2달간 협상했다. 이때 프랑스 사절단은 존과 그의 후계자들이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잉글랜드 내에서 이에 불만을 토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그럼에도 1393년 3월부터 6월까지 롤링햄에서 새로운 협상이 이뤄졌고, 그 결과 리처드 2세가 프랑스 국왕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하되, 상당한 영토를 반환받고, 아키텐 공국의 최종 지위는 중재 법정에 의해 결정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합의는 잉글랜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존은 1394년 3월부터 5월까지 롤링햄에서 추가 협상을 벌였지만 교착 상태를 해결할 방안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139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오스만 술탄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을 구원할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다. 이때 잉글랜드 측도 호응해 많은 기사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실은 리처드 2세에게 샤를 6세의 어린 딸 이자벨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아키텐 및 가스코뉴 주권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니 종전은 어렵겠지만 장기 휴전을 대신 맺자고 제안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동의했고, 1396년 3월 파리에서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약혼과 28년간의 장기 휴전이 체결되었다.

1396년 10월, 칼레 시 인근의 국경지대에서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회담이 열렸다. 이때 이자벨 공주가 리처드 2세에게 인도되었고, 11월 1일 칼레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리처드 2세는 30세였고, 이자벨 공주는 7세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주민들은 오랜 적수이며 대립교황을 따르는 프랑스와 결혼 협약을 맺은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여기에 샤를 6세는 리처드 2세가 복종해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리처드를 돕고 지원하며, 그의 침해에 맞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자, 잉글랜드 영주들은 리처드 2세가 장차 프랑스군을 불러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영주들을 제압하려 들까 두려워했다. 특히 우드스톡의 토머스리처드 피츠앨런은 리처드와 이자벨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곤트의 존은 리처드를 지지했다. 그 결과 이자벨의 결혼은 의회의 승인을 얻었고, 이자벨은 1397년 1월에 잉글랜드 왕비로 즉위했다.

2.6. 아비뇽 봉쇄

1394년, 오스만 술탄국을 대상으로 벌일 십자군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던 호담공 필리프는 서방교회 대분열 때문에 십자군의 호응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파리 대학에 분열을 종식할 수 있는 권고안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파리 대학은 몇 달간의 숙고 끝에 세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1. 타협의 길: 교황이 스스로 분열을 종식하도록 맡긴다.
2. 양도의 길: 두 교황이 동시에 사임하고 다른 사람을 선출한다.
3. 협의의 길: 분열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공의회를 개최한다.

1395년 2월, 필리프가 주관한 국왕 평의회는 양도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 모두 사임에 동의하지 않았다. 1396년, 캉브레 주교 앙드레 드 룩셈부르크가 사망하자, 측근인 루이 드라트레무아유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이를 거부하고 자기가 총애하는 인물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후 필리프와 베네딕토 13세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398년, 파리에서 열린 주교 회의는 프랑스 왕을 위해 교황으로부터 교회 혜택과 세금을 철회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교황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며, 왕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법안을 제정할 권한을 맡았다. 아비뇽 교황은 오직 영적인 권위만 누릴 수 있었다. 베네딕토 13세가 이 조례를 따르길 거부하자, 필리프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베네딕토 13세를 더는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9월 1일, 프랑스 왕실 관리들은 성직자들이 아비뇽에 남을 경우 프랑스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아비뇽 추기경 23명 중 18명이 프랑스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4년 반 동안 아비뇽 교황궁을 봉쇄했다.

1403년 3월 11일 밤 아비뇽에서 탈출한 베네딕토 13세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일방적으로 교황 지지를 철회한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추기경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결국 샤를 6세는 봉쇄를 풀었고, 베네딕토 13세는 아비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베네딕토 13세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교황청에 납입한 50,000 프랑을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넘기기로 했다.

2.7. 오와인 글린두르 지원

1399년,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잉글랜드 국왕에 옹립되면서, 리처드 2세와 이자벨의 결혼으로 맺어진 양국의 협약이 깨졌다. 1400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뒤 수년간 잉글랜드군을 잇따라 물리치며 웨일스 대부분을 석권한 오와인 글린두르는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는 잉글랜드 왕국의 공세를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외세의 도움을 받기를 희망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지배자들을 대상으로 동맹을 요청해 봤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프랑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웨일스의 성직자인 '젊은 그루퍼드'와 존 핸머를 프랑스로 보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 왕국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웨일스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이 키드웰리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공성전을 치렀다. 여기에 스코틀랜드까지 프랑스 왕실의 설득을 따라 오와인을 돕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략선은 웨일스 주변에서 활동해 여러 잉글랜드 선박을 나포하고 오와인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1403년, 브르타뉴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하고 저지 섬과 건지 섬, 플리머스 항을 황폐화시켰고, 프랑스 함대는 와이트 섬에 상륙했다. 1404년, 프랑스 함대는 웨일스 병사들을 승선시킨 뒤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해 다트머스에 불을 지르고 데본을 파괴했다.

1405년 7월, 장 2세 드 리외가 이끄는 3,000 가량의 기사 및 맨앳암즈로 구성된 프랑스-브르타뉴군이 브레스트를 떠나 웨일스 서부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식수를 못해 많은 말이 갈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장 2세 드 리외는 오와인에게 우수한 공성 장비를 제공했고, 오와인은 이를 토대로 헤이버포드웨스트 시를 공략했지만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웨일스-프랑스 연합군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글래머건과 궨트를 통과했고, 뒤이어 헤러퍼드셔를 지나 우스터셔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은 우스터 시에서 10마일 떨어진 그레이트 위틀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마주쳤다. 헨리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에버리 힐에 진을 쳤고, 오와인은 이에 맞서 반대편 언덕에 진을 쳤다. 이후 그가 진을 친 언덕은 '오와인 언덕'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양군은 8일간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양측 모두 철수했다.

140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평화 조약 체결이 임박하자, 장 2세 드 리외를 비롯한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웨일스에서 철수했다. 이에 다급해진 오와인 그린두르는 웨일스 교회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받들게 할 테니 자신들을 계속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프랑스 왕실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오와인 글린두르는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공세로 인해 쇠락한 끝에 1409년 대부분의 영역을 잃고 웨일스 산악 지대에 은거해 유격전을 이어가다가 1415년을 끝으로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2.8.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정쟁

2.8.1. 루이 1세 도를레앙 vs 호담공 필리프

샤를 6세가 광기에 시달리면서 통치를 더 이상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면서, 샤를 6세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권한을 놓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왕은 광기에 시달리는 가운데 둘 중 한 쪽의 압력을 받으면 그 의견에 따랐다가, 정신을 잠시 차리면 명령을 취소하고 또다른 쪽의 뜻을 따르는 식으로 일관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플란데런 백작을 겸임하면서 잉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백년전쟁 종식을 추구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딸 이자벨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양국간의 평화 협상을 꾸준히 이어갔다. 반면, 루이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해 샤를 5세 치세 때 공략하지 못한 지역을 마저 공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된 뒤 파리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던 1399년 5월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필리프가 파리 밖으로 나간 사이, 루이가 헨리에게 접근했다. 6월 17일, 헨리와 루이는 정식 동맹을 맺었고, "서로의 친구의 친구이자 서로의 적의 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그 후 헨리는 루이 1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로 귀환했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이 사건에 격분했고, 루이 1세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다.

1401년 12월, 필리프는 수도 주변에 소규모 군대를 집결시킨 뒤 루이 1세를 위협했다. 이에 베리 공작 장, 이자보 드 보부아르, 앙주 공작 루이 2세가 필리프와 루이 1세를 중재해 내전이 벌어지는 걸 겨우 막았다. 1402년, 루이 1세는 필리프가 부르고뉴에 간 틈을 타 샤를 6세로부터 주권 총독 직위를 얻어 예외적인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파리로 귀환한 필리프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샤를 6세를 압박해 공동 원조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루이 1세는 부르고뉴 공국이 부르고뉴 본토와 플란데런 백국 및 아르투아 백국 사이의 영토를 연결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공국을 담보로 획득했다. 룩셈부르크 공국은 훗날 선량공 필리프 시기에 이르러서야 부르고뉴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필리프는 프랑스 궁정에서 루이 1세의 지지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정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8.2. 루이 1세 도를레앙 vs 용맹공 장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사망한 후 용맹공 장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용맹공 장이 아직 미숙한 나이인 점을 이용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을 프랑스 궁정에서 배제하려 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를 유혹하려 했고, 심지어 강간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 정적들의 비방일 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루이는 친 잉글랜드 파인 부르고뉴 공국을 견제하고 과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침공 위협을 과장하면서 프랑스 내의 반잉글랜드 정서를 부추겼으며, 가스코뉴를 향한 원정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5년 7월, 샤를 6세를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받았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전통적으로 왕세자에게 수여되는 지위였는데, 그가 이 직위를 받은 건 샤를 6세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루이는 어쩔 수 없이 노르망디 공작위를 포기했다.

용맹공 장은 이 기회를 틈타 루이 1세를 권좌에서 밀어내기로 마음먹었다. 1405년 8월 15일, 장은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 데다 무익한 전쟁을 벌여 백성을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오를레앙 공작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루이는 이에 크게 놀라 도팽 루이이자보 왕비를 데리고 파리에서 도피했다. 그러나 장은 8월 19일 쥐비시 인근에서 왕세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장은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고등법원은 장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루이는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고, 장 역시 이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베리 공작이며 프랑스 전임 국왕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의 협상을 벌였고, 1405년 10월 16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공작이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했다.

1406년 5월,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선의 요충지인 브랑돔을 점령했고, 많은 요새가 잇따라 프랑스에 투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는 잉글랜드 세력을 프랑스 남서부에서 축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외면할 수 없다고 여기고, 9월 18일 1만 군대를 친히 이끌고 가스코뉴로 진격해 블레를 점령하고 부르를 포위했다. 그러나 부르 수비대와 시민들이 결사 항전하면서, 공성전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프랑스 재무부를 관장하고 있던 루이는 부르에서 고전하면서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용맹공 장이 칼레를 탈환하기 위해 모으고 있던 자금을 자기 쪽으로 빼돌렸다. 이로 인해 칼레 원정은 취소되었고, 장 1세는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406년 12월, 프랑스 함대가 생쥘리앵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참패하면서 부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에게 해상을 통해 보급할 길이 막혀 버렸다. 결국 프랑스군은 1407년 1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부르 원정이 실패하면서 위신이 떨어지자, 루이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경책을 내놓았다. 1407년 4월 28일, 그는 왕실 의회에 종사하던 부르고뉴 인사 26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축출했다. 이에 분노한 용맹공 장은 루이의 무능과 독단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일자, 이자보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루이와 용맹공 장에게 화해할 것을 거듭 호소했다.

2.8.3. 루이 1세 도를레앙 암살 사건과 용맹공 장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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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11월 20일, 두 사람은 프랑스 궁정에서 엄숙한 화해 서약을 교환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 후인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은 막 출산한 이자보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던 중 마레 지구에서 부르고뉴 공작의 부하였던 라울 당크통빌이 이끄는 복면을 쓴 암살자 15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과 파리의 프레보는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장과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파리 프레보가 추밀원 회의에서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자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장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와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한 뒤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1407년 12월 13일,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면서 가스코뉴 원정 실패 등 온갖 실책을 저지르던 오를레앙 공작을 경멸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장을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못낸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장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초기에는 보복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장은 뜻밖에도 정적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세가 살아났다. 그는 수많은 귀족과 무장한 호위대를 이끈 채 아미앵에 입성한 뒤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악인이었으니 그를 죽인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파리 대학 총장이자 신학자 장 프티를 비롯한 파리대학 신학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이 폭군이었으며, 폭군을 살해하는 건 정당하다며 장을 옹호했다. 이후 협상이 결렬된 뒤, 장은 기병 1,500명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2월 28일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장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그는 샤를 6세를 찾아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장이 찬탈하려 들 것을 두려워한 이자보 왕비는 3월 11일에 도팽 루이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를 탈출했다.

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 요한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는 장의 주요 동맹자였기에, 장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친 오를레앙 세력은 이 때를 틈타 파리로 쳐들어가서 곧바로 장악한 뒤 장에게 내려졌던 사면령을 취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장은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켰다.[2]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장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1409년 3월 장은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장은 추밀원과 재무부를 비롯한 주요 요직에 자리잡고 있던 오를레앙 파벌을 대거 숙청했다. 특히 샤를 6세의 총신이었던 장 드 몽테규를 체포해 약식 재판을 거쳐 참수했다. 또한 1409년 11월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도팽 루이에게 양도하게 했다. 1409년 12월 31일, 도팽 루이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왕실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에, 장이 추밀원을 진두지휘했다.

2.9.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

1410년, 살해된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인 샤를 1세 도를레앙은 장인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에게 자신 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나르 7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 클레르몽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 등을 끌어들여 부르고뉴에 맞섰다. 그가 부르고뉴파에 대항하는 정파의 리더를 자처했기에, 이들 파벌은 그의 가문 이름을 따서 '아르마냑파'라고 일컬어졌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파리를 강력한 군세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파리로 진군하지 못했다.

1412년, 도팽 루이는 장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샤를 6세의 고문이었다가 장에게 밉보여 피살된 뒤 방치되어 있던 장 드 몽테규의 유해를 장과 상의 없이 매장했다. 이는 도팽이자 국왕 대리인으로서 장에 맞서는 아르마냑파를 포용하는 동시에 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413년 1월, 장은 파리 삼부회를 소집해 정부를 개혁하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촉구했다. 장의 지지 세력인 북부 프랑스 도시 대표들로 채워진 삼부회는 부유한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정부의 부패와 귀족들의 재정적 착취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파의 정책과 개혁의 방향성이 명확해지면서 장은 상류층 시민들과 대귀족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도팽 루이는 이 때를 틈타 대귀족들과 면밀히 접촉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413년 3월, 도팽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은 뒤 장의 측근인 장 드 베이를 상서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뱅센에서 열릴 예정인 토너먼트를 구실로 샤를 6세를 파리에서 탈출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르고뉴파 기사들과 정치 조폭들, 그리고 급진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폭도 수천 명이 4월 27일 그레브 광장에 모여 대재무관 피에르 데 에사르를 비롯한 도팽 루이의 측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루이가 머물고 있던 별장으로 쳐들어갔다. 도팽 루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측근들 중 누구도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군중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반역죄로 처벌받은 50명의 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군중은 이후에도 반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파리 시의 부유한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공포를 뿌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당파의 상징으로 하얀 색 두건을 맞춰 입으며 세력을 과시했고, 부르고뉴파의 주요 지지 세력인 파리 시 도축업자 조합과 그들의 대장인 시몽 카보슈의 이름을 따서 카보쉬앵이라고도 불렸다. 루이는 이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고 카보쉬앵의 배후에 있는 장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힘이 없었기에 이들의 전횡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해 5월, 일명 카보쉬앵 칙령이라 불리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도팽의 파벌과 부유한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숙청을 이어갔다. 이에 격분한 파리 유력자들이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특히 장을 그동안 지지했던 파리 대학마저 카보쉬앵의 만행을 비난했다. 7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카보쉬앵의 전횡으로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고 상거래가 마비되면서 생업에 지장을 받는 등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파리 시민들이 즉시 성문을 열어줬고, 아르마냑파는 파리에 입성한 뒤 카보쉬앵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장은 급히 파리를 탈출해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는 장을 지지했던 모든 동조자들에 대한 맹렬한 탄압을 실시했고, 도팽 루이는 루브르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다. 이에 루이는 장에게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장은 이를 기회삼아 루이가 아르마냑파 반역자들의 인질로 이용당하고 있으니 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1414년 1월, 장은 파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가 부르고뉴파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측근 몇 명을 체포했다. 그해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이에 장의 동생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아르마냑파에 항복했다. 장은 수세에 몰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414년 7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아르마냑파 원정군에 끌려왔던 도팽 루이는 장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르마냑파 수뇌부 역시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4일, 장은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사면받았고, 아르마냑파는 철수했다. 이렇게 양자의 화해를 중재하는 데 성공하면서 입지가 강화된 도팽 루이는 1414년 9월 4일 '부르고뉴파(Burgundians)', '아르마냑파(Armagnac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의 입지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끝에 그를 납치해 믈룅 성에 감금하고는 아라스 평화 협약에서 합의된 사면 대상 중 장의 측근 일부를 제외하는 칙령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장은 이에 격노했지만,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과 싸웠다가 매국노라는 비난을 살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칙령을 인정했다. 1415년 4월, 도팽 루이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믈룅 성에서 빠져나온 뒤 파리에 돌아왔다. 이후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했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었고, 도팽 루이의 측근들이 이를 대신했다. 또한 도팽 루이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를 파리 시 외곽으로 쫓아냄으로써, 부르고뉴파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였다.

2.10. 잉글랜드 왕국의 침략

1414년, 아르마냑파는 아라스 협약을 체결해 부르고뉴파와의 내전을 중단한 뒤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해 양국간의 전쟁을 완전히 종식하는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프랑스가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런던 탑에 포로 신세로 전락한 상태라서 자기가 출진할 때 스코틀랜드가 후방을 칠 여력이 되지 않으므로, 전쟁을 벌이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요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헨리 5세는 1356년 장 2세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뒤 지불해야 했던 몸값 중에서 현재까지 지불되지 않은 160만 크라운을 즉시 지불하고, 노르망디, 투르네, 앙주, 브르타뉴, 플란데런 백국, 그리고 아키텐의 토지 소유권을 넘겨주고,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게 해준다면 에드워드 3세 대부터 이어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르마냑파 지도자이자 프랑스 무관장 샤를 1세 달브레는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고, 샤를 5세가 공략한 아키텐 일부를 돌려주고, 카트린과 결혼시키면서 지참금 60만 크라운을 보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다.

1414년 11월, 헨리 5세는 윈체스터 주교이자 이복형제인 헨리 보퍼트의 주관하에 열린 의회에서 프랑스 측이 자신의 요구를 조롱하고 자신을 모욕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국의 영역을 강제로 빼앗고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을 지원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지지를 표명하고 특별세를 거두기로 했다. 여기에 잉글랜드의 성직자들과 부유한 젠트리, 요먼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군자금을 충당했다. 헨리의 군대는 6천 명의 장궁병과 2천 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창기병과 검병을 포함한 중보병, 65명의 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판금 갑옷은 밀라노와 뉘른베르크 수입산이었다.[3] 국왕은 신선한 고기를 확보하게 위해 소와 양을 항구까지 몰고 간 다음 즉석에서 도축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군대를 수송하기 위한 1,500척의 함대가 사우샘프턴 항에 집결했다.

1415년 8월 17일 아르플뢰르 해안에 상륙한 잉글랜드군은 한달여간 아르플뢰르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다수는 이질로 인한 병사자였다. 코트니 주교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도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또한 약 5,000명은 너무 아파서 프랑스에서 원정을 계속할 수 없어서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듯 피해가 막심했기에, 국왕 평의회는 헨리 5세에게 프랑스 침공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자고 권고했다.

하지만 헨리는 이를 거부하고 원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1,200명의 수비대를 아르플뢰르에 배치한 뒤, 900명의 맨앳암스와 5,0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칼레로 들어가서 군세를 회복하려 했지만,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솜 강 여울목을 미리 선점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적 수비대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후 도하 가능 지점을 극적으로 찾아내어 솜 강을 건넜다. 그러나 10월 24일 칼레로 재차 향하던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에서 최소 14,000명, 최대 25,000명에 달하는 프랑스군과 마주쳤다. 수적으로 매우 열세한 데다 힘겨운 공성전에 이은 고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거의 탈진 상태였던 잉글랜드군으로서는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부시코 원수' 장 2세 르 맹그르샤를 1세 달브레는 계곡 너머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전투 대열을 유지한 채 대치하는 동안 밤이 찾아왔고, 잉글랜드군은 잠도 자지 못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군이 늘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안그래도 많은 프랑스군이 더 많아지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다음날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1415년 10월 25일에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6천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진이 쭉 빠져 프랑스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몰랐으나, 헨리 5세의 지략과 프랑스군의 성급함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대승을 거두었다. 이날 프랑스군 지휘관 장 2세 르 맹그르와 샤를 1세 달브레는 전사했다. 이때 헨리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동생 랭커스터의 험프리 앞에 서서 항전하다가 프랑스 귀족 장 1세 달랑송이 휘두른 도끼에 투구를 가격당해 땅바닥에 쓰러져 하마터면 죽을 뻔 헀지만,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목숨을 바쳐가며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후 헨리 5세는 칼레를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대승을 거뒀음을 널리 알렸고, 잉글랜드 전역이 환호했다.

2.11. 연이은 패배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파가 막대한 손실을 입자, 용맹공 장은 이 기회를 노려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도팽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무시당했다. 이에 아르마냑파의 수장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된 뒤 부르고뉴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장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드는 파리 시민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의 침략과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갈등 재개로 정국이 혼란스럽던 1415년 12월 18일,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가 도팽 루이가 장과 손잡고 파리를 넘길 거라고 의심해 독살했을 것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본다.

1416년, 프랑스 측은 잉글랜드에게 넘어간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벌였다. 프랑스와 제노바 함대는 항구를 봉쇄했고 프랑스 지상군도 아르플뢰르에 주둔한 잉글랜드 수비대를 육상에서 압박했다. 아르플뢰르 수비를 맡고 있던 도싯 백작 토머스 보퍼트는 이에 맞서 1,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선발한 뒤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1416년 3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한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 인근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다가 카니바빌에서 방향을 돌려 아르플뢰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아르마냑 백작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파견한 프랑스 분견대가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이 모든 말과 짐을 후방에 배치하고 전투 대형을 결성하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하여 적의 전선을 돌파했지만 적군의 후방을 요격하는 대신 짐을 약탈하고 말을 훔치는 데 열중했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인근의 작은 울타리 정원으로 후퇴한 후 해질녘까지 방어했다. 그러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보퍼트는 야간 행군을 감행해 현장을 빠져나갔다.

3월 11일 아르플뢰르 인근 해변에 이른 잉글랜드군은 절벽 위에 프랑스군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결성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시신을 약탈했다. 그 사이에 맨앳암즈 2,000명과 1,000명의 궁수병, 민병대 1,000명이 접근했다. 이들은 잉글랜드군에 접근하지 않고 고지대에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들을 뚫지 못하면 아르플뢰르에 돌아갈 수 없었기에, 보퍼트는 강행 돌파를 명령했다.

잉글랜드군이 명령에 따라 고지대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아쟁쿠르 전투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 이때 아르플뢰르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수비대가 적의 측면을 요격하자, 간신히 전열을 유지한 채 물러나던 프랑스군은 아예 무기를 집어던지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160명이 전사한 데 비해 프랑스군은 200명이 전사하고 8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마냑 백작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50명을 추가로 교수형에 처했다.

발몽 전투 이후 프랑스 육군이 아르플뢰르 근처에 얼씬하지 못했지만, 해상 봉쇄는 여전히 이어졌다. 이에 헨리 5세는 7월 22일 함대를 모집해 이스트 서식스의 비치 헤드 곶에 집결시킨 뒤, 친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지휘를 맡겼다. 베드퍼드 공작은 8월 15일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해군과 셰프드코 해전을 치른 끝에 적선 3척을 나포하고 대형 선박 한 척을 침몰시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15,000명에 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베드퍼드 공작의 공적을 치켜세우려는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베드퍼드 공작의 활약으로 아르플뢰르 봉쇄는 풀렸고, 헨리 5세는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2차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417년 3월, 헨리 5세는 사우샘프턴에 대병력을 집결했다. 기록에 따르면, 사우셈프턴에 집결한 병력은 15,000명의 맨앳암즈 및 장궁병,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고용된 선박들을 포함한 1,500척에 달하는 함대였다. 여기에 포병, 공병, 광부, 갑옷 제작자 및 기타 보조원들까지 합치면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417년 7월 20일, 잉글랜드 함대는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이 아르플뢰르에 상륙하거나 볼로뉴 인근에 인근에 상륙하리라 예측했지만, 헨리 5세는 센 강의 남쪽 제방에 있는 작은 마을인 뚜끄 마을 인근 해변에 상륙했다.

이후 46명의 새로운 기사를 임명하고 클라렌스 공작이자 자신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고 앞장서서 각지의 성과 마을들을 공략하고 철저히 약탈하게 했다. 클라렌스 공작은 상륙 3일 만에 여러 마을을 공략하고 수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하고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인이 겁탈당했는데, 수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리시유 주교인 토머스 베이신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공포가 밀어닥쳤다. 그 누구도, 거의 누구도 도망하는 것 외에는 안전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도시와 요새에서 대부분의 마을과 요새에서 수비대를 가진 지휘관들이 성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리고 주민들이 제지되지 않았다면, 확실히 몇몇 곳에서 일어났듯이 마을들이 텅 빈 채로 남겨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오랜 평화와 질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잉글랜드인들이 다른 이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흉포한 짐승들이며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잉글랜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루앙에서 군대 소집령을 내리고 잉글랜드군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정적인 용맹공 장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관심은 그 쪽으로 향했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인들은 프랑스군의 별다른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잉글랜드군의 침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잉글랜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캉으로 진격했다. 뒤이은 2차 캉 공방전에서, 캉 수비대와 주민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끝내 제압되었다.

헨리 5세는 성별에 관계없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찾을 수 있는 모든 시민을 시장으로 몰아넣은 뒤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최소 2,000명이 학살되었고, 핏물이 거리를 가득 흘러내렸다고 한다. 언덕 위의 구 시가지와 성채는 좀더 버텼지만 신시가지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로 인해 곤경을 겪다가 16일 후인 9월 20일에 항복했다. 헨리는 구 성채를 지킨 병사들에게는 말, 무기, 장비, 그리고 각각 2,000에쿠스의 동전을 챙기고 떠나도록 허용했다. 반면 민간인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도시에 남거나 입고 있는 옷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700~2,000명의 시민이 도시를 떠났다고 한다. 캉을 공략한 헨리 5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르장탕, 팔래스, 셰르부르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공략했다. 이후 바이외, 코탕탱, 에브뢰, 쉴부르, 알랑송 등지의 주민들이 앞다퉈 귀순하면서, 노르망디 대부분이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2.12. 용맹공 장의 파리 진군

파일:Massacre of the Armagnacs by the Bourguignons, Paris, 1418.jpg

잉글랜드군이 파죽지세로 노르망디를 휩쓸고 있을 무렵, 아르마냑파는 새로운 도팽인 샤를 왕세자를 손아귀에 쥔채 파리에서 권력을 이어가면서 용맹공 장에 대항했다. 그들은 이자보 왕비가 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들의 대의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해, 1417년 7월 샤를 왕세자를 부추겨서 그녀를 투르로 내쫓았다. 이자보는 이에 분노해 장과 합세했고, 장은 트루아 정부를 세우고 아르마냑파에 대적했다. 1418년 5월 29일 새벽, 부르고뉴군이 파리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해 하루 동안 4,000명을 살해했다. 며칠 후, 군중이 살아남은 아르마냑파가 갇혀 있던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6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아르마냑파 수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특별 감옥에 갇힌 뒤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6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당시 생폴 호텔에 있던 도팽 샤를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을 비롯한 몇몇 아르마냑파 장교들에 의해 구출되어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그 후 파리에 입성한 장은 부르주로 피신한 도팽 샤를에게 사절을 보내 저항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와서 부모인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의 보호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아르마냑파의 조언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이에 장은 1418년 9월 16일 생모르데포세에서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만나 아르마냑파가 도팽 샤를의 두 형(루이 드 기옌, 장 드 투렌)을 살해했고 도팽 샤를을 납치했다고 성토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반포했다.

1418년 7월 3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루앙 공방전을 감행했다. 루앙 수비대와 시민들은 파리 정부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가는 대도시이며 프랑스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 도시를 버릴 리 없다고 믿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장은 헨리 5세와 밀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구원을 호소하는 루앙 대표단에게 500명의 무장병, 1,000명의 궁수, 12,000명의 파리 민병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보내주지 않았고 단지 600명의 민병대만이 루앙에 찾아왔다. 이후 루앙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전령이 지원을 호소하자, 장은 냉랭하게 답했다.
"너희 자신을 스스로 돌봐라."

결국 1419년 1월 19일, 루앙은 오랜 굶주림으로 수많은 이들이 아사하는 참변을 겪은 끝에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루앙을 공략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프랑스 국민들은 이에 분노해 장을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골적으로 위협하자, 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샤를 왕세자 및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기로 했다.

2.13. 용맹공 장의 최후와 트루아 조약

1419년 7월 8일, 장은 푸이르포르에서 샤를 왕세자와 만나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평화 조약과 동맹을 제안했다. 퐁소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은 샤를 왕세자와 고문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다만 아르마냑파는 장이 부르고뉴인들이 점령한 요새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행위를 재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샤를 왕세자와 장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프랑스 전역에서 내전 종결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1419년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장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이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했다. 이로 인해 파리를 지키지 못한 장의 명성은 추락했다.

파일:Assassinat_de_Jean_sans_Peur.jpg
용맹공 장의 최후.

1419년 9월 10일, 샤를 왕세자와 아르마냑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하자며 몽뜨흐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몽뜨흐 다리에서 샤를 왕세자와 대면했지만, , 아르마냑파 기사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용맹공 장의 아들로 부르고뉴 신임 공작이 된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 왕자와 아르마냑파를 공개적으로 성토했고, 이자보 역시 이 사건에 크게 놀라 도팽 샤를을 비난하는 대열에 참여했다.

1420년 5월, 선량공 필리프와 이자보는 샤를 6세를 부르고뉴의 도시인 트루아로 데려왔다. 왕은 그곳에서 문서에 서명했지만, 그 의미를 거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트루아 조약으로 명명된 이 조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이자보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국왕이 되며,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이 뒤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 반면 도팽 샤를은 용맹공 장을 부당하게 살해하여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린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자보가 아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도팽 샤를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사생아라고 선언했다고 주장했지만, 트루아 조약에는 도팽 샤를이 사생아라고 규정되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아무튼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독립을 잃고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다만 조약에 따르면, 샤를 6세와 이자보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과 왕비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2.14. 최후

《병상의 샤를 6세와 주치의》
(1400년대. 세밀화.).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는 42년의 통치 끝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때 헨리 5세는 그보다 2달 전인 1422년 8월에 사망했고,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 아기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이에 불복해 부르주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했고, 많은 프랑스인들도 샤를 6세가 광기의 영향으로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으니 무효이며, 프랑스의 왕관은 왕의 소유물이 아니니 왕이 처분할 수도 없으므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병합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 후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온전히 세우기 위한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 연합과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유일한 군주로 받드는 아르마냑파간의 기나긴 전쟁이 벌어졌다.

트루아 조약 때 헨리 5세와 결혼했던 그의 딸 카트린은 헨리 6세를 낳은 뒤, 오언 튜더와의 사이에서도 사생아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다.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형제로, 적출로 인정받아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였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훗날 장미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어 헨리 7세로 즉위해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3. 가족

  • 이자보 드 바비에르(1370 ~ 1435):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슈테판 3세의 딸.
  • 오데트 드 샹디베르(1390 ~ 1425): 샤를 6세의 정부. 일명 '작은 왕비'.
    •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1407 ~ 1458): 사생아. 1428년 샤를 7세에 의해 합법적인 자녀로 인정됨. 1428년 벨빌앙푸아투의 영주인 장 3세 하르페단의 아들인 루이 드 벨빌의 부인이 됨.

4. 여담

루브르 박물관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던 도중 유적이 드러났고 그중 황금 투구가 발굴되었는데 샤를 6세의 투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유물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존망의 위기로 서유럽을 돌아다니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를 가장 극진히 대접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성 드니 축일연 행사에 초청하고 루브르 궁전을 숙소로 제공하는 등 크게 환대하였는데 당시 휘하 영주들이 황제는 정교도의 수장이라 하여 이렇게까지 극진히 대접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쌩까고 그냥 강행했다. 이후에는 지원병을 청하는 황제의 요청에 따라 실제로 적게나마 지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1] 맨앳암즈 1,000명, 기마 궁수병 500명 등[2] 이때 그는 반란군을 향해 앞장서서 돌격해 용맹을 떨쳤고, 이 때문에 지지자들로부터 '용맹공(sans Peur)'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3]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밀라노와 뉘른베르크가 갑옷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