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바클레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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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초대 | 초대 |
아일랜드의 前 축구인 | ||
윌리엄 바클레이 William Barclay | ||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 윌리엄 에드워드 바클레이 William Edward Barclay | |
출생 | 1857년 6월 14일 | |
아일랜드 더블린 | ||
사망 | 1917년 1월 13일 (향년 59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국적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감독 | 에버튼 FC (1888~1889) 리버풀 FC (1892~1895) |
경영인 | 에버튼 FC (사무총장) 리버풀 FC (1892~1898 / 사무총장) 잉글랜드 축구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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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축구인으로, 에버튼 FC와 리버풀 FC의 초창기 보드진과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리버풀 감독 시절에는 존 맥케나와 공동 감독을 지냈다.2. 지도자 및 경영인 경력
윌리엄 바클레이는 종교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중산층의 아일랜드인으로 1880년대 요크셔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머지사이드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에버튼 FC의 전신 세인트 도밍고 교회에서 일하게 된 이후, 1888년 축구 클럽으로 창단된 에버튼에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에버튼에서 약 한 시즌 동안만 감독으로서 팀을 지휘하며 짧은 재임 기간을 보냈으나 감독일 뿐 아니라 에버튼의 이사진에 줄곧 포함되어 있던 인물로, 에버튼에서 재무담당관과 초대 사무총장직 또한 수행했다. 1888-89 시즌 그는 에버튼을 이끌며 12개 팀 중 8위의 성적을 지켰으며, 9승 2무 11패를 기록했다.창단 당시의 리버풀 FC[1] |
그러나 이후 에버튼이 존 하울딩과의 갈등 관계 속에 안필드를 떠나 구디슨 파크로 이전하게 되면서 리버풀 FC가 창단되었는데, 바클레이는 이 때 리버풀을 창설하기 위해 안필드에 남았던 인물 중 하나로서 리버풀 구단 창단 직후 구단의 초대 감독이자 초대 사무총장직[2]을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바클레이는 존 맥케나와 함께 구단의 공동 감독으로 올라 팀을 이끌었는데, 당시 리버풀의 감독직은 현대의 감독직과 다르게 선수들을 경기에서 지휘하는 인물과 선수단을 관리하는 인물이 서로 나뉘어져 있어 이와 같은 이원 감독직으로 이루어졌다. 바클레이는 주로 선수단을 관리하며 팀을 전체적으로 운영하는 현대의 풋볼 디렉터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3]
바클레이는 풋볼 리그에 팀을 등록하고 초기 팀의 선수들을 영입하는 과정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는 팀을 운영함에 있어 '만능의 능력자'로 불리우며 팀을 이끄는 과정에서 찬사를 받았고, 하울딩이 초창기에 지원한 500파운드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해온 것으로 유명해졌다. 또한 팀의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 하울딩에게 팀의 이름을 '리버풀 풋볼 클럽'이라고 지을 것을 제안한 인물이라고도 알려졌다. 바클레이는 맥케나와 함께 1893-94 시즌에 팀을 2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 다음 시즌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긴 하였으나, 이후 맥케나보다 1년 일찍인 1895년에 리버풀 감독직을 내려놓고 구단의 이사진으로 완전히 합류하여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서도 일했던 바 있다. 리버풀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총 91경기에 52승 17무 22패를 기록했다.
3. 말년
윌리엄 바클레이의 묘비 |
1917년 1월 30일 정신 이상 증세를 호소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클레이의 죽음은 지역지 '리버풀 에코'에 의해 전해졌으며 해당 언론은 그에 죽음에 관해 '한 때 더 나은 위치에 있다.'라는 평을 남겼다. 그의 묘소는 리버풀 지역 내 벨파스트에 위치해 있는데 묘비에는 에버튼과 리버풀 구단 엠블럼과 함께 그가 양 구단의 초대 감독이자 초대 사무총장이었으며, '리버풀 풋볼 클럽'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인물이라는 영예가 기록되어 있다.
2017년 타임즈는 윌리엄 바클레이에 관한 기사에서 그가 클럽에 기여한 것에 대해 "처음 4년 동안 그는 리버풀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장비 담당관이자, 게임의 운영자이자, 구단의 비서이자, 팀의 감독이자, 영입 담당관이었다. 존 하울딩이 앉아서 자신의 새로운 구단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하는 동안 바클레이는 그것을 이루어냈다."라고 그의 삶을 요약했다.
4. 기록
4.1. 감독
- 리버풀 FC (1892~1896)
-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1893-94
5. 여담
- 2021년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이 에버튼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리버풀과 에버튼을 모두 감독한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
- 1893-1894 시즌 사상 첫 노스웨스트 더비를 지휘한 감독이다. 당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맥케나의 리버풀은 1부 리그에서 최하위를 차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4]와의 승강 플레이 오프를 진행했다. 경기는 리버풀의 2-0 승리로 끝이 났고, 이 경기로 리버풀은 승격, 맨유는 강등을 맛보게 되었다.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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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바클레이&맥케나 | 2대 왓슨 ★★ | 3대 애시워스 ★ | 4대 맥퀸 ★ | 5대 패터슨 | |
6대 케이 ★ | 7대 웰시 | 8대 테일러 | 9대 샹클리 ★★★ ★★★ | 10대 페이즐리 ★★★★★★ ★★★★★★★★ | |
11대 페이건 ★ ★★ | 12대 달글리시 ★★★ ★★ | 13대(대행) 모란 | 14대 수네스 ★ | 15대 에반스 ★ | |
15&16대 에반스&울리에 | 16대 울리에 ★★★★★ | 17대 베니테스 ★★★ | 18대 호지슨 | 19대 달글리시 ★ | |
20대 로저스 | 21대 클롭 (클롭 체제) ★ ★★★★★★ | 22대 슬롯 (슬롯 체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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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바클레이 | 2대 몰리뉴 ★ | 3대 커프 ★★ | 4대 소이어 | 5대 매킨토시 ★★★★ | |
위원회 | 6대 켈리 ★ | 7대 브리튼 | 8대 버찬 | 9대 케어리 | |
10대 캐터릭 ★★★ | 11대(대행) 이글레스톤 | 12대 빙엄 | 13대(대행) 버튼쇼 | 14대 리 | |
15대 켄달 ★★★ | 16대 하비 | 17대(대행) 가브리엘 | 18대 켄달 | 19대(대행) 가브리엘 | |
20대 워커 | 21대 로일 ★ | 22대(대행) 왓슨 | 23대 켄달 | 24대 스미스 | |
25대 모예스 | 26대 마르티네스 | 27대(대행) 언스워스 | 28대 쿠만 | 29대(대행) 언스워스 | |
30대 알라다이스 | 31대 실바 | 32대(대행) 퍼거슨 | 33대 안첼로티 | 34대 베니테스 | |
35대(대행) 퍼거슨 | 36대 램파드 | 37대 다이치 | |||
★프리미어 리그 | ★EFL 챔피언십 | ★FA컵 |
[1] 하단 정중앙의 인물이 리버풀의 창립자 하울딩이다. 왼쪽은 존 맥케나, 오른쪽이 윌리엄 바클레이[2] 지금의 부회장직과 유사하다.[3] 맥케나와 바클레이 중 누가 진짜 초대 감독인지에 관한 의견은 나뉘어지기도 하나, 둘 모두 이사진과 감독직 모두에 속해있었고 당시로서는 감독직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개념이 자리잡지를 못하여 두 인물 모두를 공식적인 초대 감독으로 보는 편이다. 단, 맥케나는 선수 선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실질직인 감독에 가까운 코치역할, 바클레이는 풋볼 디렉터에 가까운 역할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4] 당시 이름은 뉴턴 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