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2-22 02:45:42

S.65

파일:Savoia-Marchetti S.65.jpg
사보이아-마르케티 S.65 (Savoia-Marchetti S.65)

1. 제원2. 개발 배경3. 쌍동체 구조4. 트윈 엔진5. 어정쩡한 시험 비행6. 들러리7. 무리한 재도전

1. 제원

형식 : 수상기 레이서
생산 : 사보이아-마르케티(Savoia-Marchetti)
운영자 : Reparto Alta Velocità
설계 : 알레산드로 마르케티(Alessandro Marchetti : 1884~1966)
초도비행 : 1929년
승무원 : 1명
전장 : 5.48 m (동체) / 10.70 m (플로트 포함) /전폭 : 9.50 m / 익면적 : 13.30 m2
중량 : 2,300 kg~2,800 kg
동력 : 이소타-프라스키니 아소 1-500(Isotta-Fraschini Asso 1-500) 12기통 액랭식 엔진(1,050마력) 2기
최대속도 : 645 km/h
생산수 : 1대

2. 개발 배경

이탈리아 팀 레파르토 알타 벨로시타(Reparto Alta Velocità : 고속비행대)는 1927년에 홈 경기장인 베니스에서 열린 슈나이더 트로피 경기에서 영국 팀에게 무릎을 꿇고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슈나이더 트로피를 빼앗긴 무솔리니는 몹시 실망했고, 두체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웠던 이탈리아 항공성(Ministero dell'Aeronautica)은 1929년에 열릴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항공성은 슈나이더컵 대회에 도전할 참가 기체와 엔진, 그리고 이 예민한 레이서들을 몰 파일럿들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정했다. 이윽고 1929년 초에 이탈리아 국내의 각 항공기 제작사에 슈나이더 트로피 전용 레이서의 설계를 요청하면서 참가를 독려했다.

수상기의 명문 사보이아 마르케티에서 수석 설계자로 근무하고 있던 알레산드로 마르케티는 이때 장거리 비행정인 S.64의 막바지 설계에 골몰하고 있었다. 원래 비행정에 있어서 그의 관심사는 속도가 아니라 안정성과 항속 성능이었던 탓에 그때까지 슈나이더 레이서 디자인을 제출한 일이 없었지만, 항공성은 마르케티에게 고위급 간부들을 보내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할 수 없이 일단 하던 작업을 뒤로 밀어놓은 마르케티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S.65의 초안을 제출했다. 1928년 3월 24일, 항공성은 마르케티의 고속 비행정을 2대 주문하고 기체번호 MM.101과 MM.102를 할당해주었다.


1927년 슈나이더 트로피 경기

3. 쌍동체 구조

이렇게 해서 실기 제작에 들어간 사보이아-마르케티 S.65는 길고 좁은 플로트 2개 위에 단엽 날개를 올리고 날개 중앙에는 탠덤 엔진을 설치하는 반면, 날개 뒷전에서 뻗어나온 트윈 붐 지지대가 꼬리날개를 지탱하는 구조를 가진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된다. 마르케티는 이 비행정을 고안하면서 2대의 강력한 엔진을 가장 적은 재료만을 써서 기체 구조에 통합시키는 목표에 집중했고 필요없는 요소는 과감히 생략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착수 과정에서 강한 충격을 받는 수상기에 완전한 단엽날개를 쓰는 것은 미덥지 못해 S.65는 트러스 구조의 스트럿과 그것을 보강해줄 브레이스 와이어를 버리지는 못했다. 날개 스파는 두랄루민을 쓰고 리브는 가문비나무를, 스트링거는 호두나무마호가니를 깎아서 만들어졌으며 상면에는 얇은 구리판을 프레스하여 만든 표면 냉각기가 부착되었는데, 합계 2,000마력이 넘는 고출력 엔진이 발생시키는 열을 식히려면 거의 날개 전체를 모두 덮어야만 했다. 표면 냉각기가 붙여지지 않은 곳은 에일러론 같은 가동 부분과 윙팁이 전부였다. 동체보다 훨씬 길어 8.75 m나 되는 플로트도 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자료에 따라서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 플로트는 기존의 것과 비교하면 중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바닥이 평평했고 안에는 연료탱크가 자리잡고 있었다. 플로트가 동체와 조립되었을 때 처음에는 뒤에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으나 역시 구조 강도가 불안했던 마르케티는 플로트 뒤쪽 상단에 두 번째 스트럿을 추가해 꼬리날개와 연결해 보강했다.

S.65는 각 플로트에서 꼬리까지 연장되는 추가 스트럿으로 1차 개수때 수정되었다. 꼬리와 방향타도 수평 미익 아래로 확장되었다. 꼬리를 지지하기 위해 각 날개 뒤로 뻗어나간 가느다란 붐은 속이 비어 있었고 내부에는 러더와 승강타를 움직여주는 조종 케이블이 통과했다. 이 트윈 붐을 구성하는 재료가 금속인지 나무인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나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연약한 구조인 탓에 알루미늄 같은 경금속이 아닐까 생각된다. 스태빌라이저는 붐의 끝 사이에 장착되었다. 1호기의 수직 미익은 수평 미익의 중심 위로 설치되어 일견 평범한 형태였지만 수직 미익이 확대되면서 수평 미익 아래까지 더 확장되도록 수정된다. 꼬리 날개 구조물은 전부 나무로 만들어졌고 직물로 덮여있었다.

날개 중앙에 도사린 2대의 이소타-프라스키니 아소 1-500 엔진은 하나의 길다란 나셀에 앞뒤로 장착되었다. 이런 형태를 푸쉬 풀 탠덤 엔진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조종석은 두 엔진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즉 이 나셀은 동체와 조종석을 겸하는 구조였으며 강철 파이프를 용접한 프레임으로 보강되고 매끈하게 다듬은 유선형 알루미늄 패널로 덮여 있었다. 표면 냉각기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특제 오일 쿨러는 조종석 양쪽에 설치되었는데, 주름진 돌출부에서 와류가 일어났지만 강력한 프로펠러 후류에 의해 기류가 정돈되는 효과가 있었다. 경기 도중 반환점에서 급선회할 때 조종사가 해면을 잘 볼 수 있도록 측면 시야를 개선하기 위한 2개의 창문이 오일 쿨러 위에 마련되었다. 전방 엔진 바로 뒤에는 자그마한 방풍창이 설치되었는데, 이것도 나중에 저항을 줄이기 위해 더 길고 간단한 형태로 교체되었다. S.65의 동체 나셀은 프로펠러 스피너를 포함하여 5.48 m 길이였다.


1929년 슈나이더 트로피 경기

4. 트윈 엔진

1,050마력을 발휘하는 이소타 프라스키니 아소 1-500 엔진은 표준형인 Asso 500을 특별히 개조한 것이지만, S.65에 관한 기술 자료는 별로 남아있지 않아 지금와서 이 엔진이 상용 제품과 얼마나 다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남겨진 몇 장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기성품과는 다른 3개의 캔틸레버 마운트와 거의 플러시 처리된 엔진 후방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배기 포트는 실린더 헤드의 바깥쪽에서 V측면으로 재배치되었다. 확장 기어가 조립된 감속기 케이스에는 워터 펌프와 점화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하부 크랭크케이스에 수직으로 새겨진 리브는 필시 필요없는 부분을 깎아내 중량을 덜어낸 엔진을 보강해주기 위한 구조일 것이다.

이 엔진은 Asso 500 Ri 엔진을 기반으로 이소타 프라스키니에서 DOHC 방식 엔진을 발명해낸 수석 엔지니어 주스티노 카타네오(Giustino Cattaneo)에 의해 대폭 개조되고 튜닝을 받은 것이다. 각 엔진은 3개의 캔틸레버 지주를 통해 조종석 끝에 있는 강철 격벽 - 엔진과 조종실을 분리하는 동시에 엔진 크레이들 구실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 에 직접 고정된다. 각 엔진 앞쪽에는 연장된 감속기가 있지만 유선형 카울링이 잘 커버하고 있다. 기어 케이스에는 대량의 냉각수를 순환시키기 위한 워터 펌프가 2대 장착되었고, 실린더 내에서 혼합가스를 점화시키기 위한 불꽃을 발생시켜줄 마그네토도 역시 2대가 설치되었다. 최종적으로 각 엔진은 3,000rpm에서 1,050마력의 최대 출력을 제공해준다.

카울링 각 측면의 바닥에는 두 개의 인렛이 있다. 이 인렛을 통해 유입된 공기는 카뷰레터로 흘러 들어온 다음 3개의 실린더로 흘러들어간다. 배기 포트는 엔진의 측면에 있고, 배기 가스는 카울링의 상단으로 배출된다. 두 엔진 모두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데 후방 엔진이 뒤를 향해 설치되어서 각 엔진의 프로펠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해 토크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금속제 2엽 블레이드 프로펠러는 고정 피치로, 회전 직경은 2.26 m였다. 설계주임 마르케티는 비행체가 끄는 후류가 더 큰 유도항력을 만들어내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 엔진에 끼워진 스피너는 전면 스피너보다 1/3 더 길다.

5. 어정쩡한 시험 비행

사보이아 사가 훗날 S.65의 설계도와 도면을 페기해버려 이 레이서의 정확한 크기를 알수 없다. 문서 자료에는 9.5 m의 날개폭과 플로트를 포함해 전체 길이는 10.7 m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에서는 10.05 m의 전폭에 8.83 m의 전장이라고 인용하고 있어 어떤 수치가 정확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S.65의 공허 중량은 2,300 kg에 이륙 중량은 2,800 kg로 알려지는데 이 정보 역시 뒷받침해줄 자료가 부족하다. 마르케티 주임은 S.65의 최고 속도를 600~645 km/h 사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1929년 6월 즈음, 사보이아의 테스트 파일럿인 알레산드로 파살레바(Alessandro Passaleva : 1895~1941)는 세스토 칼렌데(Sesto Calende) 공장 근처에 있는 마조레 호수(Lake Maggiore)에서 먼저 완성된 1호기 MM.101를 테스트했다. 파살레바는 기체를 수면에서 띄우지는 않고 물 위를 달리며 조종타의 효과를 점검했는데, 방향 조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술진들에게 개수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렸다. 2호기 MM.102는 앞서 언급한 꼬리 날개의 전반적인 개수가 가해졌지만 이 기체가 실제 시험 비행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호기를 2호기 사양으로 개수하는 사이에 2호기 MM.102는 1929년 7월에 데센자노(Desenzano)에 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 가르다호(Lake Garda)에 본부를 두고 있던 레파르토 알타 벨로시타에 납품되었다.

RAV에서 S.65의 비행 시험은 신참 조종사인 토마소 달 몰린(Tommaso Dal Molin : 1902~1930)에 의해 7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S.65의 실제 처녀비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몰린은 날고 기는 조종사들이 모인 RAV에서는 나이가 어리고 슈나이더컵에 직접 참가한 경험도 없었지만, 조종 솜씨는 누구에도 지지 않았다. 게다가 고의적으로 좁게 만들어진 S.65의 콕핏에 드나들기 쉬울 만큼 체구가 작았다. 그런 달 몰린에게도 S.65의 조종석은 너무 비좁아 낙하산을 매지 않았다. 사실 탈출한다 해도 머리 뒤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는 프로펠러가 조종사를 믹서기처럼 갈아버릴게 뻔했다. 1차 비행을 마치고 착수한 그는 엔진과 냉각 시스템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배기 가스가 너무 많이 콕핏으로 날려와 돌아온 달 몰린의 얼굴을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6. 들러리

S.65는 1929년 9월 6일부터 7일까지 영국 칼샷(Calshot)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레이스에 맞춰 완성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영국 팀에게 신형 레이서를 보여줘 사기를 떨어뜨리고 싶었기에, 어쨌든 기체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S.65가 칼샷에 도착하기 전에 하부 방향타를 둥글게 수정하고 더 긴 방풍창으로 바꾼 다음 날개 끝에는 매립형 손잡이를 추가했다. [1] 레이스에 앞서 MM.102호기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냈고, 한 번은 후방 엔진을 걸고 굉음을 울리며 1,050마력의 파워를 자랑하기도 했다. 많은 관중들은 S.65가 장차 미래 고속 항공기의 징조로 생각했다.

이탈리아는 1929년 대회에서 다시 슈나이더 트로피를 되찾아오기 위해 재래식 수상기 형태를 한 마키 M.67피아트 C.29를 그리고 미래적인 외관을 뽐낸 사보이아-마르케티 S.65와 피아지오 P.7 등 4종류의 새로운 레이서를 만들어냈다. 반면 그 사이에 영국은 온 힘을 수퍼마린 S.6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산만한 개발 정책을 무리하게 밀고 나간 결과 각 기종에 대한 연구개발비도 나눠져 버렸고, 그 결과 영국이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S.6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기체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손꼽히던 이탈리아 팀이 이렇게 힘을 잃는 동안 영국이 또다시 슈나이더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제 영국은 한 번만 더 우승하게 되면 트로피를 영구히 가져가게 된다.

다시 한번 패배의 분루를 삼키며 본국으로 돌아온 RAV의 수장 마리오 베르나스코니(Mario Bernasconi : 1892~1976)는 그 대신 수상기 세계 최고속 기록을 자신들의 손으로 갈아치워 자존심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며칠 후, 베르나스코니는 이 또한 쉽지 않은 목표임을 깨닫게 된다. 레이스가 끝나고 일주일 후인 1929년 9월 12일에 영국의 아우구스투스 올바(Augustus Orelbar : 1897~1943)가 조종하는 수퍼마린 S.6(N.247)는 575.7 km/h라는 새로운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만 것이다.

https://youtu.be/Qhs9j8TmVd0

7. 무리한 재도전

S.65는 1929년 가을부터 추가 개량 작업을 계속했고, 스탭들은 연말쯤 되자 충분히 S.6의 고속 성능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새로운 개조 포인트는 다양했다. 기체 여러 곳에 두랄루민을 써서 중량을 줄이고 모처럼 궁리해 달아놓은 평저형 플로트를 떼어내는 대신 V형 바닥의 플로트가 설치되었으며, 엔진 카울링은 양쪽으로 6개 뚫린 배기 포트로 수정되었다. 이 개조로 조종석에 스며드는 배기 가스 문제가 해결되었다. 엔진 자체는 그리 손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토마소 달 몰린은 해가 바뀐 1930년 1월 17일에 다시 가르다 호수에서 S.65의 시험 비행에 나서면서 다음날 있을 기록 도전을 준비했다. 1월 18일, 자신의 28번째 생일을 맞은 토마소 달 몰린은 이륙 시도를 했는데 세 번이나 비정상적으로 심한 요잉이 일어나 일단 중지했다. 네 번째 시도에서 S.65는 공중에 뜨는 순간, 급작스럽게 기수가 하늘로 치솟으며 곧추섰다. 찰나의 순간 50미터 상공에서 말뚝처럼 우뚝 선 기체는 그대로 실속에 빠지며 호수에 추락했다. 대기하고 있던 구조보트가 재빨리 달려갔지만, 달 몰린을 태운 S.65는 깊은 호수 바닥으로 빨려들듯 침몰했다. 가르다 호수의 평균 수심은 136 m에 가장 깊은 곳은 346 m나 되어 보통 잠수 장비로는 잔해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기체와 시신을 인양하기 위해서 영국에서 건조된 특수 인양선 아티글리오(Artiglio)가 투입되었고, 1월 29일에 S.65의 잔해를 건져낼 수 있었다. 젊은 조종사 달 몰린은 마치 콕핏에서 잠들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1월 30일에 장례 절차를 밟게 된다. 당시는 블랙박스 같은 기록장비나 원격 계측장비가 없어서 정확한 추락 원인은 단정지을 수 없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승강타가 아래로 꺾인 상태에서 받음각이 커지는 순간 어떤 요인으로 인해 원래 위치로 돌아오지 않아서 급격한 실속에 빠져 일어난 사고라고 추측하고 있다.



[1] 이 고리의 용도는 연락용 보트를 접안시키거나 부두에 결박할 때, 또는 기체가 뒤집히거나 가라앉았을 때 로프를 걸기 위한 용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