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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22/개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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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ATF 사업 시작
2.1. F-22 개발의 시작2.2. 경쟁사 선정 후
2.2.1. 기체 및 항전장비 경쟁2.2.2. 추진 체계 경쟁
2.3. 시제기 시험비행 경쟁의 시작2.4. 경쟁의 승자
3. F-22A 생산까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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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22의 상세한 개발 역사를 다룬다.

2. ATF 사업 시작

2.1. F-22 개발의 시작

1970년대에 미국의 정찰위성에 소련의 새로운 신형전투기들의 시제기들이 포착되었고,[1] 미 공군은 이에 대항할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2]

이것은 1960년대에 미 공군이 F-4을 배치하면서 제공권 장악의 필요성을 잊었을 때, MIG-25의 배치에 쇼크를 받은 미 공군이 TF-X 사업을 통해 F-15을 확보하면서 제공권 장악을 달성한 형태와 상당히 유사한데, F-15을 통해 제공권 장악의 필요성을 잊어가던 미 공군은 다시 신형 소련 전투기의 대응할 전투기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미 공군은 공대공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결국, 공대공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개발에 들어간다. 1981년에 탐색 개발에서 체계 개발 연구 단계에 진입하고 드디어 연구가 아닌 공식적인 무기 체계 개발 사업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1982년 3월부터 예산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체계 개발이 지연되었지만, 1983년부터 다시 예산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자 사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2차대전이 제트 전투기를 만들었다면, 1980년대는 제트 전투기를 성숙시키는 시대였다. AFTI 등의 기술 개발 사업 등을 통해 다양한 항공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합성소재 및 경량합금, 신형 비행제어장치 및 통합 항공전자장비, 개량형 추진체계, 스텔스 기술 등이 개발되었다. 물론 저 기술들은 후에 전부 F-22에 적용된다.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1년 11월에 ATF 사업이 실전 운용단계에 들어가면 미 공군의 일선 전투기인 F-15와 F-16이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되면서 ATF 사업은 F-15와 F-16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로 배치될 계획이 세워진다. 그리고 요구 성능 및 작전 능력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 이때 ATF 사업 일정이 확정되는데, 1987년에 실물 모델 개발(FSD)을 하고 1993년에서 1994년에 IOC를 취득하기로 계획되었다.

RFI을 제출한 항공사들은 대부분이 다목적 전투기(MRF)로 개발 계획을 잡고 있었던 반면, 맥도넬 더글러스사만이 F-15를 대체할 제공 전투기가 필요하다고 답을 하였고, 미 공군은 21세기에 존재할 위협에 대체할 수 있는 제공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1982년 8월 29일에 사업 지침이 발표되면서 사업 명칭도 최종적, 정식적으로 ATF 사업으로 명칭된다. 미 공군은 ATF 사업을 2가지 사업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차세대 전술전투기 기체 및 시스템을 개발할 회사로 록히드, 보잉, 제너럴 다이나믹스, 그러먼, 맥도널 더글라스, 노스롭, 록웰 인터네셔널 총 7개 회사와 100만 달러 상당의 탐색 개발을 계약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엔진 사업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사, 프랫 앤 휘트니(P&W)사와 각각 2억 200만 달러의 엔진 기술 시연 계약을 맺었고 여기서는 앨리슨, 개럿, 텔레다인/CAE도 참여한다.

이렇게 계약을 맺은 기체의 탐색 개발을 맡은 회사들은 19개의 모델을 제출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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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회사들이 내놓은 모형들은 다 다른 형태지만 F-X의 임무와 성능 달성을 위해 슈퍼 크루즈 능력을 포함한 강력한 추력비의 엔진, 전방위 스텔스 능력을 지향하면서 무장과 연료를 탑재하는 크기, 복합소재의 사용, 당시로썬 최첨단의 AESAR 사용, 통합항공전자장비 등이 포함된다.

이런 수많은 개발을 통해 1982년 12월에 각 업체들이 내놓은 RFI 최종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미 하원은 ATF 사업에 약 2300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한다. 그리고 1983년 5월에 최종 RFP가 개발 업체들에게 보내졌고, 같은 달에 엔진 최종 RFP가 제너널 일렉트릭, 앨리슨, 프랫 앤 휘트니 3개 업체에 전달된다. 최종 RFP가 나왔을 때는 스텔스 기술도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 방면에서는 이미 F-117을 제작해 본 록히드와 노스롭에 유리했다.

1983년초 오하이오 주에 있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에 있는 항공시스템 개발부(ASD)에서 ATF 사업국이 건립되고, 국장으로 앨버트 피치릴로 대령이 임명되면서 경쟁의 시작을 알린다. 1983년 9월 미 공군이 7개 업체와의 탐색개발 계약을 하고 ROC를 제출하라고 하였는데, 업체들은 1984년 말에 기본 요구 조건을 받는다. 이때 요구 조건은 작전반경 800마일, 마하 1.5 수준의 슈퍼 크루즈 능력, 2000FT 이하의 STOL능력, 이륙총중량 50000lbs, 통합적 스텔스 능력이라는 1980년대에는 불가능한 기술 구현을 받았는데 플러스로 대당 가격은 4000만 달러 이하[3] 였다.

1985년 9월에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ATF의 RFP가 작성되었고 1985년 10월 공식 승인을 받고 7개의 항공기 업체들에게 RFP가 전달된다. 그리고 1986년 1월까지 피드백 제출 기한을 주지만, 업체들의 반발에 4월로 연기되고 탐색 개발 단계에서 보잉, 제너럴 다이나믹스, 그러먼, 록히드, 노스롭, 맥도널 더글러스, 록웰 인터네셔널이 참가한다. 이 탐색 개발은 1986년 10월 말에 종료되지만 연구 과정에서 그러먼은 미 해군과의 계약을 위해 탈퇴하였고, 록웰 인터네셔널은 B-1B 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결국 탈락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항공업계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킬 ATF는 1986년 7월에 받은 제출서를 토대로 록히드와 노스롭의 설계가 우수하다는 최종적 평가를 받는다. 이로써 ATF의 기체를 개발하는 2개의 회사는 록히드노스롭으로 굳혀졌다.

2.2. 경쟁사 선정 후

2.2.1. 기체 및 항전장비 경쟁

이렇게 사업이 시작되고 경쟁사에게도 강력한 후보가 존재하였는데, 그건 바로 록히드사였다. 이 회사는 1986년 6월부터 보잉, 제너럴 다이나믹스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였고, 10월에 개발 방향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노스롭은 맥도널 더글라스 사와 손을 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결국 1986년 8월에 두 컨소시엄에서 한 개의 컨소시엄이 ATF 사업의 승자가 될 것으로 분명해졌다.

록히드 컨소시엄은 각각의 특장점을 살려 작업을 분담하였는데, 록히드는 F-117A 사업의 경험을 살려 설계와 제작을, 보잉은 주력인 항전장비의 개발과 통합을,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F-16의 최초 FBW 통합 경험을 살려 FBW시스템의 통합을 맡았다.[4] 이렇게 해서 각 회사가 1/3씩을 분담하기로 하였으나, 1993년 3월에 록히드가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전술 항공기 부문을 매수했고, 그 결과 작업 비율은 2/3이 되었다.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마틴 마리에타 사와 합병함으로써 록히드 마틴으로 회사명을 바꾼다. 록히드 마틴이 F-22와 관련해 맡았던 작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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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에타 공장(구 록히드): 무기체계로서의 전체적 조립 작업과 전면 동체의 제작, 수직미익과 수평미익 및 주익의 제작, 후방 동체의 최전면부와 에일러론 및 플랩프론의 제작, 랜딩기어의 제작, 전자장비 개발과 통합, 최종 조립. 최종 조립 후 도색.
- 포트워스 공장(구 제너럴 다이내믹스): 중앙 동체의 제작, 무장 관련 장비 제작, F-22전용 전자전 시스템 개발과 제작, CNI 시스템의 개발 및 통합, 장착품 관리 및 INS의 개발과 제작, 지원 시스템 개발.

보잉은 록히드와의 약정에 따라 F-22 전체 작업의 1/3을 맡았다. 주요한 작업은 시애틀 공장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제작 주요 부위는 주익과 후방동체의 후반부이다. 엔진 부착부의 제작과 TVS장착 작업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훈련 시스템, 조종사 생명 보장 시스템, 화재 방호 시스템, 항공기 전체 스텔스 코팅과 적외선 방출 절감책의 개발 등도 담당했다. 보잉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전 장비 융합 작업인데, 이를 위해 보잉은 자사의 보잉 757 여객기를 개조하여 전자전 장비 비행시험장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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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개조되었던 보잉 757[5]. 오리가 되었다

이 B757기는 기수를 F-22와 동일하게 만들고, 그안에 AN/APG-77을 장착했다. 그 외에도 F-22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AN/ASQ-220 CNIS이나 ECM 전자장비, IFDL 장치 등도 장착했다. 동체 앞 카나드에는 CNI관련 장치나 방어용 전자기기들을 장착하였고, 객실 앞부분 왼쪽에는 F-22와 동일한 조종석을 재현하여 각종 장치의 동작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하였다.

노스럽과 맥도널 더글러스 컨소시움도 역할을 분담하는데, 노스럽은 F-5, F-20 설계 경험을 통해 획득한 전투기 경량화와 첨단재료 및 스텔스 기술을 통합하였고, 맥도널 더글러스 사는 매우 많은 전투기를 개발한 경험을 살려 기체 제작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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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0월 3일에 두 컨소시엄은 각각 2대의 시제기를 제작하여 시연 평가에 제출하도록 선정되고 약 6억 9100만 달러의 예산을 받음으로써 록히드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MODEL1132를 내놓고, 노스롭을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N-14라는 모델을 내놓음으로써 각각 YF-22 라이트닝 II와 YF-23 블랙 위도우 II로 제식명을 부여받는다. 6억 9100만 달러 중 약 1억 달러가 레이더 및 전자센서에, 2억 달러가 항전장비 통합에, 그 이외 비용은 기체 개발에 할당된다.[6]

그 후, 시연평가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는데 시연 평가는 다음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

1단계 - 시스템 제원 개발.
2단계 - 항전 시제기.
3단계 - YF-22A/YF-23A 시제기.

이렇게 단계대로 하여 마지막 단계에서 시제기를 내놓은 후 1989년에 시제기가 첫 비행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1990년 8월에 실물 개발 제안서 제출을 마감한 뒤 1990년 말에 사업자를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개발 지연이라는 문제가 터지고 만다. 시제기의 출고 시기가 다가오자 각 컨소시엄은 자체 중량을 50000lbs에서 55000lbs로 수정하기 시작한 직후, 개발 지연이 시작되기 시작하는데, 개발 지연의 이유는

록히드 - 당초 문제가 적었던 사다리꼴형 날개에서 역 다이아몬드형 주익[7]으로 설계 방식을 변경하면서 부가적인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게다가 AOA상태에서도 저속으로 비행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기체 전면부를 상당히 줄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 설계변경이 필수였다. 따라서 풍동 시험을 통해 기수와 수직미익의 형태를 최적화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노스롭 - 항전장비 통합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YF-22와는 다르게 미래 지향적 형태를 띠고 있던 YF-23은 항전장비 소형화가 절실했고, 이에 따른 비용 증가와 개발 지연이 시작됐다. 뒤이어 기체 구조적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는데, 비행 중 진행되는 수직미익 쪽 진동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록히드사와 비슷하게 풍동 시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엔진 역추진기에 존재했다. 이는 원래 ATF의 설계요구조건으로, 참여업체 중 하나인 맥도널 더글라스가 F-15S/MTD를 통해 세밀하게 평가했지만 큰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문제는 무게와 정비면을 조정함으로써, 상쇄할 수 있다는 노스롭와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ATF 통합사업부가 결론을 내렸다. 비행 중 엔진 역추진기를 사용하면 방향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대기중으로 엔진 열을 냉각시켜 내보내야 하는데 심각한 냉각 문제가 일어나서 스텔스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 업체들은 설계 변경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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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컨소시엄들은 요구된 성능에 맞추기 위해 여러 기술을 적용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여, 설계를 변경하기 시작하는데, 그로 인해 예정된 일정이 연기되었다. 1987년 중반 ATF 사업국은 설계 변경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너무 터지는 바람에 결국 그해 7월 허가한다(...)[8]

결국 7월 13일, 설계 수정 과정을 거친 설계안 1132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록히드사는 설계한 모형을 이용하여 상당 시간을 풍동 시험에 썼는데, 제어성과 안정성에서 무려 6517시간을 쓰고 항공역학 분야에 5405시간을, 고속 항력/안정성/제어에 4000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록히드는 기동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는 항공기를 만들길 원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설계 문제점이 가장 컸었지만.

이런 록히드사에 큰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으니, 록히드사가 자체 추측으로 얻은 YF-23의 RCS값이 YF-22보다 작았다는 점이다. 록히드와 보잉 통합 ATF 개발부는 이를 엔진에서 뿜어나오는 열과 적외선이 문제인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스롭에서 채용하지 않은 2D TVS를 채택한다. 물론 채택 초반에는 오직 대기와의 접촉 면적을 늘려서 적외선 피탐 면적을 줄이기 위해 채택했지만, 추력편향장치를 장착한 직후 시험비행에서 기동성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9]

2.2.2. 추진 체계 경쟁

이 경쟁에서는 P&W사가 GE사에 비해 우세를 보였다. 이 즈음에는 차세대 전투기 엔진(AFE)라고 불린 이 엔진의 RFI에 따르면, 1983년 5월에 이미 30000lbs의 추력이 요구되고있었다. 그해 9월에 시제 엔진 제작 및 테스트를 위해 양사에 각각 5억 5000만 달러가 지급된다. 당시 P&W의 엔진은 PW5000, GE사의 엔진은 GE37이라고 불렸고, 후에 공군은 이 엔진들에게 F119와 F120이라는 제식명을 부여한다.

최초의 예비비행 정격 시험(PFRT)과 지상 가속임무시험(AMT)은 1986년에 비감향성의 시제 엔진을 가지고 실시한다. 감향성 엔진으로 시험 평가를 실시한 건 2년 뒤였다. 이들은 차기 전술기를 위해 추진체계를 최대한 발전시키기 시작하는데, 엔진 역추진기 등 여러 문제를 터뜨려 은근 욕을 많이 먹는다(...)

2.3. 시제기 시험비행 경쟁의 시작

두 업체의 시제기는 RCS 평가를 위해 실험에 들어갔고, 뉴멕시코 주 화이트샌즈에 위치한 미 공군 레이더표적산란시설(RATSCAT)에서 일련의 실험평가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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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SCAT에서 실험중인 F-22.

계약이 시행된 지 4년이 흐르고 원래 예정된 일정에서 1년 지연된 1990년에 드디어 차세대 전술 전투기들의 시제기들이 시험 비행을 시작한다. 1990년 6월 22일에 노스롭이 YF-23을, 록히드는 그해 8월 29일 YF-22을 출고시켜 경쟁이 시작된다. 역사상 최대의 사업이다 보니 무려 통합 시험비행팀의 규모가 록히드사는 약 300명을 넘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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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첫 비행은 역시 더 빨리 출고된 YF-23(N231YF:PW엔진 장착 기체, 기체 번호 87-800)가 하게되었다. 7월 7일에 안정적인 첫 비행을 기점으로, 2달 후인 9월 14일 4차 비행에서 최초 공중 급유에 성공했고 9월 18일에는 슈퍼크루즈 비행을 마하 1.43을 기록하여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그리고 11월 30일 날 87-800 기체는 제34차 비행을 끝으로 모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GE사의 엔진을 장착한 N232YF 역시 10월 26일 첫 비행을 시작으로 11월 29일 슈퍼크루즈 마하 1.6을 달성한다. 그리고 12월 18일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결과적으로 YF-23A의 최고속도는 마하 1.8, 최대 상승고도는 1만 5240미터였다. 참고로 노스롭 컨소시엄의 주요 목표는 스텔스성과 운동성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장 시험은 전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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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F-22는 9월 29일, N22YF(GE사 엔진 장착 기체) 기체의 최초 비행을 기점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소티를 올려가기 시작하고, 한 달에 10회 비행을 달성하였다. 물론 5차 비행 때 랜딩기어의 배선 접촉 때문에 랜딩기어가 접혀지지 않는 문제점이 터지기도 하였지만 독립배선을 통해 직접 랜딩기어를 접을 수 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10월 25일, 9차 비행에서 최초의 초음속 비행에 성공하였고 26일에는 최초의 공중 급유에 성공한다. 그 후로 1주일 만에 받음각 60도를 기록하여 록히드에 목표를 만족 시킨다. 그리고 1호기는 마지막 비행에서 최대 속도(마하 2로 추정)과 최대 하중(7G 이상 추정)을 기록했다.

뒤를 이어 N22XY(PW사 엔진 장착)이 투입되었고, 이 기체는 11월 28일의 11차 비행에서 AIM-9M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고 12월 20일 AIM-120을 성공적으로 발사한다. 초음속 비행을 집중적으로 시험한 기체 2개는 1990년 12월 28일부로 모든 시험비행을 종료한다. 1호기와 2호기는 합쳐 약 74회의 비행을 실시하였다.

2.4. 경쟁의 승자

시연평가 기간에 YF-22가 보여준 비행 데이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풍동 시험 및 시뮬레이터의 데이터와 면밀하게 비교한 결과 대부분의 데이터가 일치하였다. 착륙 평가의 경우 엔진 1개만을 사용하여 실시한 착륙과 20노트의 바람이 측면에 부는 가운데 실시한 착륙이 모두 성공하였다. 회전 성능은 예상보다는 나빴다. 3만FT 상공에서 마하 0.9로 비행할 때 최대회전각도는 초당 200도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80도였고, 4만 피트 상공에서 마하 1.5에서 비행할 때는 시뮬레이션상으론 초당 185도였으나 실제 각도는 175도였다. 시험비행에서는 YF-22의 진동감소능력이 뛰어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편대비행과 공중 급유를 쉽게 만족시켰다.

YF-23 역시 스텔스와 통합 항공장비 측면에서는 YF-22보다 우세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기동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심각하게 느린 점과 뒤늦게 여차저차 개발 일정에 맞춘 록히드사와 다르게 지속적으로 지연이 돼 버렸다. 그 외에도 당시 개발된 시제기 중 가장 비싸다는 YF-22를 뛰어넘을 정도로 과도한 비용 덕분에 결국 탈락하고 만다.

치열한 경쟁이 지속된 지 8년이 지난 1991년 4월 23일, 미 공군장관 도널드 라이스 장관은 록히드/보잉/제너럴 다이나믹스 컨소시엄의 합작인 YF-22가 승리했음을 발표한다. EMD 제작 단계로 넘어감과 동시에 PW사의 F119-PW-100이 GE사의 F120-GE-100을 이기고 ATF 사업의 공식엔진으로 선정된다.

이렇게 기본이 되는 최초의 개념 연구부터 선정까지 34년, 사업의 탐색 개발부터 선정까지 22년이라는 긴 시간은 끝나고 공중을 제패할 전투기가 탄생되기 시작한다.

3. F-22A 생산까지

1997년 9월 7일, 첫 양산형인 EMD(기술 및 제작 개발용) F-22가 초도 비행에 성공한다. 당초 계획으로는 EMD 11기 중 2기를 복좌형인 F-22B로 생산하려고 했으나 비용문제 때문에 1인용 F-22A 9대만 제작하였다. 9호기는 2002년 4월 15일 초도비행을 실시한다.

EMD는 각종 기술 시험과 실용 시험에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EMD기는 캘리포니아 주 에드워드 기지의 시험 부대로 인도된다. 1호기는 일단 분해하여 에드워드 기지까지 수송, 현지에서 재조립하여 1998년 5월 20일부터 비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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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되어 수송되는 EMD 1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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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F-16D와 시범비행중인 기체번호 91 - 4002의 EMD 2호기.

EMD 2호기는 1998년, 3호기는 1999년, 6호기는 2002년에 각각 시험비행 등을 통해 민간에 공개된다.

파일:external/www.air-and-space.com/_BEL5352%20F-22A%2091-4007%20P-51D%20N2580%20Six%20Shooter%20F-15E%2089-0485%20A-10A%2080-0206%20right%20front%20in%20flight%20m.jpg [10] 여기에 찍힌 F-22는 PRTV 1호기인 기체번호 91-4007이다.

EMD에 이어 만든 PRTV(양산형 준비 시험기) 6대는 부대배치를 위한 시험용으로 초기 운용시험평가(IOT&E)에 사용하였다. 이 작업은 네바다 주의 넬리스 기지를 중심으로 실시하였다.

PRTV 1호기의 초도 비행은 2002년 10월 12일이고, 10월 23일 미 공군에 인도된다. 본격적인 양산형인 로트1 생산분은 2003년 9월 23일부터 플로리다 주의 틴들 공군기지의 훈련부대[11]에 인도되었고, 훈련 부대에서 1개 대대를 편성하여 작전부대로 인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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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시험비행 중인 기체 번호 99-4010과 99-4011의 각각 PRTV 4호기와 5호기.

지금까지 EMD기는 제 411시험 비행대대에서 계속 운용하였으나, EMD 3호기가 시험비행 중 제한 하중을 초과하는 바람에 비행을 중단하고, 미공군 박물관에 전시된다. 또한 5호기 역시 비행임무를 맡지않고, 조종사가 지상에서 조작 순서를 학습하기 위한 GF-22A로 전환하여 랭글리 기지의 제1전투비행단에서 사용된다. 그 외 나머지 7기는 현재 틴들 공군기지에서 F-22A 조종사 양성을 위한 훈련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PRTV 6대는 3대가 전투비행단에, 3대가 시험비행단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총 사업액 673억 달러에 달하는 ATF사업은 2011년 12월 13일에 기체번호 10-4195의 195번째 기체가 ROLL OUT을 함에 따라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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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포착된 시제기는 미코얀 설계국 9-01과 T-10 시제기였다. 두 기체는 몇 년 후에 MIG-29와 SU-27로 발전한다.[2] 간혹 TAC-85라 명명된 프로젝트가 F-22 개발의 시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프로젝트는 속도도 지지부진한데다 1:1 목업은커녕 설계안만 있었고 개발 목적(공대지 기체였음) 또한 F-22와 많이 다르며 록히드 마틴의 기체도 아니다. 또한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대표로 하는 해외 밀리터리계에서도 ATF가 F-22의 개발 시작이라고한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록히드 마틴 공식 사이트의 F-22 설명에도 1981 ATF 사업을 통해 F-22 개발이 시작됐다고 쓰여있다.링크참고[3] 대당 약 460억원이라는 요구 조건을 받았으나.. 지금의 F-22의 대당 가격은 1억 5천만 달러 즉 약 1700억으로 4배에 가까운 가격이다.. 심지어 2000년대에는 2억 달러였다[4] 제너럴 다이나믹스의 분담이 좀 적어보일지 모르나, 절대 아니다. 현재 전 세계를 비행하는 대부분의 항공기는 FBW에 의해 운항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시스템이다. 그걸 통합하는 사업은 매우 큰 사업이다.[5] 레지번호 N757A로 757의 프로토타입 기체이다.[6] 참고로 미 공군은 시제기를 컨소시엄마다 각각 2대씩 제작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 이유는 P&W사의 엔진과 GE사의 엔진을 각각 장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공군에 정식으로 배치되지 않아서 민항기 번호도 부여받는데, GE사의 엔진을 장착한 YF-22는 N22YF로, P&W사의 엔진을 장착한 YF-22는 N22XY로 명명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노스럽의 YF-23 중에 P&W사 엔진을 장착한 기체는 N231YF, GE사 엔진을 장착한 기체는 N232YF로 명명된다.[7]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시연 평가 초기에 제안했던 설계안이었다.[8] 이때를 노려 록히드사는 이륙거리 조건을 2000ft에서 3000ft로 늘린다.[9] 이는 후반으로 갈수록 록히드사 설계의 큰 주력 장점이 된다.[10] 상당히 유명한 짤인데, 네이버 등지에는 세월의 흐름이란 이름 등으로 돌아다닌다.[11] 현재 틴들 공군기지의 훈련대대는 43rd Fighter Squadron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