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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데이비드 흄 David Hume | |
출생 | 1711년 4월 26일 (구력)[1]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
사망 | 1776년 8월 25일 (향년 65세)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
국적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에든버러 대학교 |
경력 | 영국 대사관 비서 (1763-1765) 북부 외무장관 (1767) |
직업 | 철학자, 외교관, 경제학자, 역사학자 |
종교 | 무종교(불가지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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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2] 당시 영국의 경험주의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으며, 애덤 스미스와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운동[3]을 대표하는 인물이다.모든 앎은 강렬함(생생함)으로 느껴지는 감정적 '인상'에 불과하며, 이성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관념조차 사실은 인상에서 왔기 때문에, 지식은 이성적 추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얼마나 더 그럴듯한가'에 대한 개연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 또한 도덕의 선악 판단은 '그 도덕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유용한가'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여, 이후 공리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11년 4월 26일, 변호사인 조피프 홈과 그의 아내 캐서린 팔코너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흄은 에든버러에서 동남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천사이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곳에서 흄은 초등 교육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영재였던 그는 12살의 나이에[5]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 고전, 논리학, 형이상학, 뉴턴의 자연철학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2년 간의 대학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집에서 공부하면서 문필가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신경쇠약으로 침체기에 빠지기도 하고 설탕 상인 밑에서 일하기도 하던 중, 24살이 되던 해에 문필가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목적지는 시골 마을 라플레슈였다. 이곳에는 데카르트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 예수회대학이 있었다. 흄은 비록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학문적으로 비옥한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남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6]의 대부분을 집필했다. 흄은 이 책에서 경험과 관찰에 토대를 둔 새로운 인간학을 세우고자 했다. 이후 그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다시 영국 런던으로 간다.그의 첫 책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불과 20대에 쓴, "그 자체로도, 또 사상사에 끼친 영향으로도 역대 최고의 철학서"라 꼽히는 저서이지만, 당시 런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무신론자라는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까지 찍혔다. 이에 크게 실망한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가 "인쇄기에서 이미 사산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낙심했다. 게다가 흄은 이 책 때문에 한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를 받아 교수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애넌데일 후작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기도 하고,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제안으로 프랑스 원정길에 비서로 동행하기도 하는 등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결국 흄은 에던버러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변호사협회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다.
흄은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를 8년 간에 걸쳐 6권의 전집으로 출간했다. 그는 이 방대한 작업으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저술가", "스코틀랜드의 타키투스", "그 어떤 언어로 쓰인 책 중에서도 단연 최고" 등의 극찬을 받았다. 책의 인기는 어마무시해서 수십년 동안 영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역사서로 군림했다. 이 책의 성공으로 흄은 돈과 명예를 얻었다.
1763년 흄은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는 허트포드 경을 따라 파리로 갔다. 프랑스에도 흄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흄이 프랑스로 온다고 하자 파리 사교계는 그를 크게 환대했다. 그는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또 다른 현장이었던 파리의 살롱을 드나들며 드니 디드로, 달랑베르, 몽테스키외 등과 사귀었다. 한편 종교적 이유로 곤경에 처해 있던 장 자크 루소와도 이때 처음 만났는데, 한 때 비슷한 처지였던 흄은 이를 이해하고 그를 영국으로 초대하여 은신처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소는 흄이 자신을 중상모략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루소는 결국 흄에게 절교 선언을 한다. 이후 흄은 2년간 국무차관이 되어 공무를 수행했다.
말년에 흄은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에든버러로 돌아왔다. 그 동안 명예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많은 친구들과 사교의 즐거움을 누렸다. 상당한 식도락가이기도 했던 그는 요리에 진심이었다. 심지어 손님에게 요리 접대를 하기 위해 에든버러 신시가지에 새 집을 지었다. 하지만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대장과 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7] 그럼에도 항상 긍정적으로 살았던 그는 임종을 앞둔 상태에서도 놀라울 만큼 차분하면서 쾌활함을 유지했다. 1776년 4월에 짧은 자서전 《나의 생애》를 저술하고 8월에는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지었는데 여기엔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조카에게 자신이 죽고 난 후 출간해 달라고 부탁한다. 1776년 8월 25일,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에든버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올드 칼튼 묘지에 묻혔다.
3. 사상
이러한 원리들에 만약 설득되었다면, 우린 도서관에 갔을 때 무슨 난장판을 쳐야만 할까? 예를 들어 신학이든 강단 형이상학이든 책을 아무거나 한 권 쥐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묻자: "그 책에 양이나 수를 따지는 추상적 추론이 담겼는가?" 아니오. "그 책에 사실이나 존재 문제를 따지는 실험적 추론이 담겼는가?" 아니오. 그렇다면 불구덩이에 던져버려라. 그 책엔 궤변과 환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의 마지막 문장
칸트와 더불어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21세기 현대까지 끊임없이 인용되는 철학자다. 철학사적으로는 존 로크와 버클리를 이어 소위 '영국 경험론' 전통의 정점에 해당한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이러한 특징은 신, 실체 같은 형이상학을 배격한 점에서도 잘 드러나며, 이러한 정신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직접적으로 이어진다.『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의 마지막 문장
20세기 철학에서는 논리 실증주의가 흄의 후신을 자처한 대표적인 사조 중 하나였으며, 윤리학에서도 메타 윤리와 규범 윤리를 막론하고 큰 사상적 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철학과 수업에서 대부분 항상 어느 정도는 공부하며, 설령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없이 철학을 진행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셈.
3.1. 인식론
3.1.1. 인상과 관념
흄은 존 로크와 버클리로부터 물려받은 경험주의를 충실히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경험주의란, 모든 사실 문제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즉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면 그건 참된 앎이 아니다.[8] 이를 잘 보이기 위해 흄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지각을 다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인상(impression):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초적 지각. 밖으로부터(감각) 혹은 안으로부터(반성)[9]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혹은 모바일 기기의 화면의 모습은 인상이다. 즉 '지금 느끼고 있는' 인상을 말한다.
- 관념(idea[10]): 인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 회상 또는 상상을 통해 생성한 지각. 예를 들어 당신이 눈을 감고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스크린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게 관념이다. 즉 머리속에서 '재현해 보았을 때 떠오르는' 관념을 말한다.
흄의 설명에 따르면 인상과 관념의 구분은 강렬함[11]과 그 강렬한 느낌에 대한 감정의 차이에서 비롯될 뿐이다. 인상은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와서 나의 감정을 뒤흔드는 것이고, 관념은 그 인상을 다시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건조한 회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지식은 인상에서부터 시작되어 관념이 된다. 이렇게 인상의 복사물이 관념이라는 것이 흄의 "복사 원리(copy thesis)"이다. (다만 '공감'같은 특정한 종류의 관념[12]은 거꾸로 '인상'과 '그 인상에서 나온 감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감정은 흄의 도덕관의 기초가 된다.)
흄은 이 개념을 확장시켜, "인간은 상이한 지각들의 다발이거나 묶음에 불과하며, 이 지각들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서로 연결되어 영속적인 흐름과 운동을 만들어낸다."라고 주장한다. 흄에게 있어서 '자아'는 생각과 감정과 감각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인상과 인상에서 만들어진 관념들이 정연하게 모여 있는 집합이라는 것이다. 즉 인상의 네트워크인 셈.[13] 흄 이전의 자아 이론은 대부분 데카르트식의 '통일된 하나의 자아'(자기동일성)의 존재를 상정했었다. 하지만 흄은 이러한 이론을 부수어버렸고, 결국 자아도 무너뜨린 셈이 되었다.
3.1.2. 귀납의 문제
수학이나 논리학이 아닌 '사실 문제'를 따지기 위해선 연역논증이 아닌 귀납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흄은 귀납논증이 결국 순환논법에 의존한다는 강력한 논변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흄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흔히 현대에 "귀납의 문제"라고 불린다. 이는 흄의 철학을 넘어 인식론과 과학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변 중 하나로 기록된다. 대표적으로 칼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은 바로 이 흄의 귀납 문제에 의존한다.
3.1.3. 인과 회의주의
흄은 '경험'과 '인과적 지식' 사이에 절대적 관련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보면,사례: "큐대로 당구공을 쳐서 다른 당구공을 맞힐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다"
* 원인: 큐대로 당구공을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다.
* 결과: 당구공이 굴러가서 다른 당구공을 맞혔다.
* 원인: 큐대로 당구공을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다.
* 결과: 당구공이 굴러가서 다른 당구공을 맞혔다.
상식적으로 원인과 결과는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큐대로 당구공을 적절한 각도와 힘으로 타격했다면,(원인) 다른 외부 조건이 고정되는 한 반드시 당구공이 굴러가서 다른 당구공을 맞힌다는 것이다.(결과)
하지만 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인과의 작용을 관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본 것이라고는 하나의 사건 후에 일어난 다른 사건뿐이다. 이른바 인과를 구성하는 두 사건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 즉 인과를 작용시키는 힘 자체'는 절대로 볼 수 없다. 흄은 인과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인과가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이성의 효용성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과는 직관을 통해 가장 그럴듯한 이론임을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은 완벽하지는 않다는 전제하에서 우리는 이성을 사용해야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를 일러 흄의 '온건한 회의주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합리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완전히 합리적인' 지식은 얻을 수 없다.
논리적 추론의 한계에 대한 흄의 결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성만으로 지식의 토대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은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은 '논리적이고 절대적인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성을 전제로한 귀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귀납법이란, 수많은 사건으로부터 인과적 법칙을 추론해 내는 법칙을 말한다. 귀납법 자체는 이성적으로 그것이 옳다고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우리가 이성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더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닌 현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사실(지식)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합리적 이성으로 추론한 논리적 방법으로써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데카르트의 방식) 경험적 효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써 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흄의 방식)고 주장한다. 이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토대가 된다.
3.1.4. 기적에 대한 반론
인식론과 관련하여 흄이 과학적 회의주의에 기여한 부분이다. 아래는 그 원문에 해당한다.증언 자체가 기적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그 증언이 입증하고자 하는 사실보다 더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어떤 증언도 기적을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누가 와서 자기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고 내게 말한다면, 나는 즉시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곧, 이 사람이 나를 속이려거나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이 말한 사실이 정말로 일어났던 것인지를 따져 볼 것이다. 나는 하나의 기적을 다른 기적과 견주어 보다가 기적의 성격이 더 큰 것을 거부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그 사람이 말한 사건보다 더 기적적이라면 그럴 경우에만 그 사람은 나의 믿음이나 의견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관하여』
누가 와서 자기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았다고 내게 말한다면, 나는 즉시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곧, 이 사람이 나를 속이려거나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또는 그 사람이 말한 사실이 정말로 일어났던 것인지를 따져 볼 것이다. 나는 하나의 기적을 다른 기적과 견주어 보다가 기적의 성격이 더 큰 것을 거부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의 증언이 거짓일 가능성이 그 사람이 말한 사건보다 더 기적적이라면 그럴 경우에만 그 사람은 나의 믿음이나 의견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의 『기적에 관하여』
여기서 '기적을 봤다는 주장'과 '그 사람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부딪친다. 흄에 따르면 두 가지 설명 중 무엇이 반드시 옳은지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인 방법은 전혀 없지만, 둘 중 하나가 왜 다른 것보다 '더 그럴듯한지' 개연성을 보여줄 수는 있다.
인류 대다수가 더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이, 소수의 사람들이 그 반대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내용보다 '그럴듯한 확률이 더 높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성적 추론이 아니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14]
3.2. 윤리학
흄의 회의론은 극단적인 생각을 배제하는 '겸손의 회의주의'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독단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의 '확신'은 경험론자인 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15]따라서 흄은 인간의 삶이 '이성의 확신'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식 도덕관을 거부한다. 흄에게 있어서 도덕은, '이성'적 확신에서 나오는 도덕 행위가 아니라 '감정'(정념)에 좌우되는 도덕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도덕관은, 모든 선악 판단의 기초가 감정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에 따라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감정이 유발하는 '유용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인의 비겁함, 불의, 자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성질을 보이는 이들에게 반감을 느끼고 그들을 악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용기, 정의, 겸손은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므로 우리는 그러한 성질을 보이는 이들에게 호의를 느끼고 그들을 선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선악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감정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용한가, 받아들일 만한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도덕은 사회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도덕을 논할 때 다루는 감정은 타인에게 감정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공감'의 감정으로 한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의 감정이란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될 수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이 슬플 때 내가 슬퍼진다면 그 슬픔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16]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퍼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유발하지 않는다면 그 슬픔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즉, '공감'될 수 있는 감정에 한에서, 우리는 그 감정의 도덕적 유용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 사회의 "일반적인 관점"(general point of view)을 기준으로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관성 있는 도덕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안정되고 고정된 관점"을 가리키며, 또한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행동의 유용성에 대한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을 통해 수립된 것"이다.[17]
물론, 윤리의 바탕으로 삼기에 인간의 '감정'이란 별로 탄탄해 보이지 않지만, 흄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흄의 철학에 따르면, 이성적 추론은 물론이거니와 경험적 사실로부터도 도덕의 당위는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18] 따라서 부득불 감정에 대한 유용성만이 모든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윤리에 있어서 이성에게도 유일한 효용은 있다. 도덕적 공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확인'해주는 작용과 도덕적 공감이 전혀 다른 감정이나 잘못된 믿음으로 가는 것을 '보정'해주는 작용이, 이성의 역할에 해당한다. 여기서 흄은 이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흄은 이성 전부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흄은 지식의 토대로서의 이성은 무기력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로서의 이성은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조차 완벽하진 않겠지만,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더 큰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장소가 달라지면 유용한 것에 대한 감정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도덕과 관습에 일반적인 법칙을 세우기 어렵다는 흄의 논리는 '도덕적 다원주의'로 이어진다.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이며, 하나의 삶이나 한 사회가 그것들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 벌린이 1960년대에 '소극적 자유' 개념을 들고 나와 도덕적 다원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바탕이 되기도 한다.
4. 영향력
경험주의 철학의 정점이었던 데이비드 흄의 사상은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유독 한시대를 대표하던 천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사랑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를 거론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1~2위를 다툴 정도로 무게감있는 사상가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표하기 전에 흄의 책을 읽었었고 이를 통해 상대성 원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한 미공개 편지가 있다. #
- 찰스 다윈도 평생에 걸쳐 수차례 흄의 저작들을 읽었다. 특히 진화론의 연구과제를 구상했던 시기에, 다윈이 흄의 저작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다윈의 진화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 임마누엘 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고백한 바 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역시, “헤겔, 허버트 및 슐라이어마허의 전집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데이비드 흄의 각 장에서 더 배울 것이 많다”며 흄을 칭찬했다.
- 칼 포퍼의 반증주의 역시 흄의 인과회의주의를 연구하는 중에 만들어진 원리다.
-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그래야만 한다'라는 구절로 대표되는 흄의 주정주의를 받아들여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상해나갔다고 회고했다.
- 질 들뢰즈의 첫번째 저서 《경험주의와 주체성》은 흄에 관한 연구이다.
5. 어록
Be a philosopher, but amid all your philosophy be still a man.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그대의 모든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그대의 모든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
Generally speaking, the errors of religion are dangerous; those in philosophy only ridiculous.
일반적으로 종교의 오류는 위험하지만, 철학의 오류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의 오류는 위험하지만, 철학의 오류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그래야만 하며, 또한 (이성이 정념을) 섬기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임무가 있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그래야만 하며, 또한 (이성이 정념을) 섬기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임무가 있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다.
6. 주요 저작
흄이 생전에 발간한 철학 관련 저서들은 다른 철학자들보다 확실히 소수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언급되는 철학서는 다음 세 책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년 출판. 한국에서는 보통 인성론, 인간본성론이라고 부른다. 흄 철학의 거의 전모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지성에 대하여」, 「정념에 대하여」, 「도덕에 대하여」 세 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책은 심각하게 인기가 없어서 흄이 스스로의 문체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칸트가 이 책을 두고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책'이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the Human Understanding)》: 1748년 출판. 『인간오성탐구』라고도 불린다. 『인성론』의 참패를 맛본 뒤 인식론을 다루는 『인성론』 1권 「지성에 대하여」의 내용을 좀 더 정리해서 읽기 쉽게 쓴 책으로, 『인성론』의 대중용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성론』보다는 나았지만 그럼에도 『탐구』 또한 당대에 썩 잘 나가진 않았다. 원문
- 《도덕 원리에 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1751년 출판. 윤리학을 다루는 『인성론』 3권 「도덕에 대하여」의 내용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책이지만 강조점은 상당히 다르다. 흄은 이 책이 자신의 저작 중 최고라고 생각했다. 원문
전집을 편찬하면 수십권이 넘어가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과 학부생도 주요 저작을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저서의 수가 적다. 이는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글쓰기를 선호하였고, 3권의 철학책을 쓰고 난 뒤로는 대부분 짧은 정치적 에세이 또는 영국 역사서 저술[20]에만 힘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흄은 이 3권의 책만으로도 이후 서양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대철학자가 되었다.
7. 기타
- 흄의 고향인 에든버러에 가면 흄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1995년 공개. 발가락이 이상하리만치 튀어나와 있는 게 특징인데, 관광객들이 하도 만져대서 닳아버렸다. 만지면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흄은 미신을 극도로 비판했던 사람이다.
- 흄은 인종 차별주의적 시각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저서에서도 언급하듯 "백인들 외엔 문명화된 인종이 없다"라는 표현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모든 지식이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는 본인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의 머리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발상이긴 하다.
-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영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앤 시모어 데이머'가 그 주인공. 흄이 어느 날 데이머와 길을 가다가 조각상을 옮기는 이탈리아 소년을 만났는데 소년이 옮기던 조각상에 감탄해 시간을 지체했다. 데이머가 이걸 귀찮게 여기자 흄은 무심코 "넌 죽었다 깨도 저런 걸 못 만들걸?"이란 뉘앙스로 말해버렸고, 자존심이 강했던 데이머는 노발대발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문가이자 지체 높은 인물이었던 부모님을 졸라 조각가와 해부학자, 외과의 등에게 수업을 받아 영국 최초의 여성 조각가가 되었다. 데이머는 남성 위주의 시대 속에서도 명조각가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에 대한 흄의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아담 스미스와의 우정을 다룬 《무신론자와 교수(The Infidel and the Professor)》가 출판되었다.
- 장 자크 루소와의 치정(?)을 다룬 《루소의 개(Rousseau's Dog: Two Great Thinkers at War in the Age of Enlightenment)》가 출판되었다가 절판되었다.
[1] 신력 기준으론 5월 7일이다.[2] 화폐수량설의 원조이다.[3] 데이비드 흄이 계몽운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고 부정할 수도 없지만, '철학'으로만 따지면 '계몽주의'에 속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철학으로서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데, 데이비드 흄은 철학적으로는 이성보다 정념(감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으로 분류할 때는 계몽주의보다 경험주의로 분류된다. 물론 철학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회 운동으로서의 계몽주의를 말할 때에는 데이비드 흄도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되기도 한다. (철학 사조가 원래 애매하긴 하다. 굳이 나누자면 계몽주의보다 경험주의의 계보에 속한다는 것이다)[4] 이를 '온건한 회의주의적 경험주의'라 부르기도 한다.[5]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 시대에는 12살에도 대학교를 많이 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최근에는 흄이 천재 정도는 아니고 조기교육을 받은 영재 정도였다는 주장이 대세이다.[6] 줄여서 《인성론》이라고 한다.[7] 시대가 시대인지라 정확한 병명은 모르지만 혈변 등의 증상으로 보아 대장암으로 추측된다.[8]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관념 간의 관계'를 다루는 수학 및 논리학은 여기서 제외된다.[9] 흄은 내부 '관념'으로부터도 '인상'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공감'이다.[10] '이데아'가 아니고 '아이디어'이다.[11] 흄이 말한 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생생함'이다. 들뢰즈가 이 생생함을 두고 강렬함이라고 해석했는데, 강렬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직관적으로 쉽게 다가온다.[12] 굳이 쉽게 말하자면, 관념 중에서도 '공동 감정에 관련된 도덕적 관념'을 말하는 것. 흄이 대표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공감'이다. 다만 이 공감은 지금의 공감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입'에 더 가깝다.[13] 이는 이후 질 들뢰즈에게 큰영향을 미치게 된다.[14] 단, '자연법칙과의 비교를 생략한 증언은 거짓'이라는 흄의 주장은 '모든 증거'와 '일부 증거' 사이에서 생기는 모호함을 해결할 수 없다고 웨이틀리(Whately)는 지적한다. 웨이틀리는 흄의 오류를 명백하게 만드는 재밌는 패러디를 제시한다: '일부' 책은 쓰레기일 뿐이다; 흄의 책은 '일부' 책이다; 따라서... (흄의 책은 쓰레기다) "Some books are mere trash; Hume’s Works are (some) books; therefore, etc." # 그러나 '일부'를 가지고 연역적 추론을 하는 웨이틀리의 이러한 주장은 흄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귀납법의 기본 가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15] 이러한 점에서 흄의 도덕관은 양극단 사이에서의 도덕을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비슷하다. 극단이란 일종의 '확신'이고, 중용이란 그 극단을 피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16] 마찬가지로 기쁨도 상대에게 공감될 수 있다면, 그 기쁨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17] 어떤 감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그 사회의 관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8] 흄에게 있어서, '경험적 사실'은 귀납법으로 단지 지식을 얻는 데에, 보다 더 유용할 뿐이다. '도덕적 당위'를 발견하는 데에는 경험적 사실이나 이성적 추론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흄은 생각했다.[19] 제레미 벤담, 《A Fragment on Government (1776)》 p.269[20] 흄이 처음으로 이름을 날린 건 그가 쓴 철학저서들이 아닌 『영국의 역사(The History of England)』의 성공 덕분이었다. 흄의 담백하면서도 깔끔하고 품위 있는 문장력은 대중에게 사랑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참고로 영국의 역사를 썼지만 그의 저서에는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