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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홍재묵 (洪在默) |
| 출생 | 1900년대?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
| 사망 | 1949년 이전~1949년경 (정확한 사망일 불명) |
| 국적 | 대한민국 |
| 학력 | 불명 (형제 중 일부는 일본 도쿄 모 대학 졸업) |
| 직업 | 지주, 기업인, 사회운동가 |
| 대표 경력 | 조양방직주식회사 설립자·초대 사장 강화기선운수조합 조합장 |
| 친족 | 형 홍재용 (제2대 강화군수, 강화요업 사장) 홍재승 (6.25 당시 강화치안대장) 홍두섭 (강화금융조합장) |
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강화도 최대 지주 가문 출신의 대지주이자 근대적 산업자본가.강화 최초의 본격 인견방직 공장인 조양방직을 순수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하여 “강화 직물 산업의 아버지”로 불린다.
전통적 봉건 지주에서 공장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드문 사례이며, 지역사회에서는 구휼·체육·교육 등에 거액을 기부한 대표적 향반 유지였다.생애 및 활동대지주 시절홍씨 강화 집안의 핵심 일원
1930년대 기준 홍씨 가문 전체 논 소유 면적 600ha(약 180만 평) 이상, 소작인 3,000명 이상
주로 쌀 대일 수출로 부를 축적했으나 1930년대 일제 미곡통제정책으로 위기 → 산업 전환
2. 산업인으로 전환
1933년 강화 최초 인견공장 설립을 결심1933~1936년 발기인 모집, 자본금 50만원(당시 화폐가치로 거액) 확보
1937년 조양방직주식회사 본격 준공 (강화읍 향나무길5번길 12 일대)초대 사장: 홍재묵
부사장: 동생 홍재용 (도쿄 모 대학 졸업)
직기 50대 이상, 인견·마직·염색 생산
1935년 경성–김포–강화 화물운수회사 창립 주도
1949년 강화기선운수조합 조합장 취임 (공식 활동 마지막 기록)
사회·향선 활동재해 시마다 의연금·구휼미 대량 기부 (1930~1940년대 동아일보에 수십 건 기사)
노상에서 해산한 걸인 모자 식량·치료비 전액 부담
강화 남산 테니스코트(현재 남산정구장 전신) 개인 돈으로 건설 후 무료 개방
전강화 육상·정구대회 상금 및 경기장 제공
1935년 소작인 19명에게 토지 1만여 평을 15년 할부로 분양 → 자작농 창설 (소작인들이 기념비 세움)
나예방협회, 강화체육회 등에 정기적 기부
3. 말년과 사망
1942년 전시 통제 강화로 미쓰비시 계열 이세현에게 조양방직 매각1949년 6월 강화기선운수조합 창립총회에서 조합장으로 선임된 것이 마지막 공식 기록
그해 이후 신문·공문서에서 이름이 사라져 1949년 전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
정확한 사망일과 사인은 현재까지 미상
4. 평가
강화도 역사에서 “봉건 지주 → 근대 기업인”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전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조양방직은 1939년 대화재, 1958년 폐업, 2010년대 복합문화공간 재탄생을 거치며 지금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공장 건물이다.여담현재 조양방직 카페·미술관에 가면 홍재묵·홍재용 형제 사진과 당시 직조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2013년 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 주요 촬영지로 전국적 인지도를 얻음
강화 주민들 사이에서는 “홍재묵 사장님 공장”이라는 표현이 지금도 심심찮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