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헨리 모턴 스탠리 Henry Morton Stanle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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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41년 1월 29일 웨일스 덴비셔 덴비 |
| 사망 | 1904년 5월 10일 (향년 63세) 잉글랜드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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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언론인, 탐험가 |
| 정당 | 영국 자유통일당 |
1. 개요
영국의 언론인이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2. 일생
2.1. 초기 생애
헨리 스탠리는 1841년 1월 28일 웨일스 덴비셔의 덴비에서 존 롤랜즈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패리는 당시 18세였으며, 미혼모로서 그를 버리고 연락을 끊었다. 아버지는 출생 몇 주 만에 사망했고, 스탠리는 사생아로 세례받았다. 이러한 출생의 낙인은 그의 삶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그는 처음엔 조부 모세스 패리에게 길러졌으나, 다섯 살에 조부가 사망하자 여러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세인트 아세프 빈민구호소에 보내졌다. 이곳은 과밀과 방임으로 인해 학대와 성폭력이 만연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탠리가 원장의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0세 때 어머니와 이복형제가 잠시 그 구호소에 왔지만, 그는 그들이 가족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1859년, 18세의 스탠리는 미국으로 이주해 뉴올리언스에 도착했다. 그는 상인 헨리 호프 스탠리와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고 그의 성을 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대 연구자들은 그가 실제로는 부유한 스탠리를 만나지 않았으며, 평범한 상인 제임스 스피크가 진정한 후원자였다고 본다.
이후 스탠리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했다. 처음에는 남군(Arkansas 제6보병연대)으로 싸우다 샤일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이후 북군으로 전향하여 복무했으나 병으로 곧 제대되었다. 회복 후 상선에서 근무하다 1864년 미 해군에 입대, USS 미네소타호의 기록병으로 복무하면서 포트 피셔 전투(1차·2차)에도 참여했다. 그 후 기자 활동을 시작, 새로운 모험을 찾아 나섰다.
2.2. 아프리카 탐험
1867년, 에티오피아 황제 테워드로스 2세가 영국 사절단을 인질로 잡자,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 특파원으로 영국군과 함께 파견되었다. 1868년 마그달라 전투에서 그는 전보 기사 조작 을 통해 전 세계 최초로 기사를 보도했으며, 이후 스페인 혁명과 중동 및 흑해 지역 취재를 수행했다. 그는 이집트,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크리미아, 카프카스, 페르시아, 인도 등을 여행하며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1871~1872년, 스탠리는 실종된 선교사·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찾기 위한 리빙스턴 탐험 진행했다. 그는 잔지바르에서 192명의 인부를 고용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일지에는 111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열대병, 도망, 말의 죽음 등으로 원정은 극도로 험난했다. 1871년 11월 10일, 그는 현재의 탄자니아 우지지 근처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했다. 그때의 인사 “Dr. Livingstone, I presume?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는 유명해졌지만, 그의 실제 일지에는 기록이 없고 해당 페이지가 찢겨져 있으며, 두 사람의 편지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스탠리가 후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창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스탠리는 이후 리빙스턴과 함께 탕가니카호가 나일강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했으며, 귀국 후 경험을 담은 책 《How I Found Livingstone》(1872)을 출간해 큰 명성을 얻었다.
1874년, 뉴욕 헤럴드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스탠리에게 또 다른 아프리카 원정을 후원했다. 그의 목표는 중앙 아프리카의 대호수와 강을 탐사하고 지도화하며, 빅토리아호와 탕가니카호를 순회하고 나일강의 근원을 찾는 것이었다. 1875~1876년 사이 스탠리는 빅토리아호가 단 하나의 유출구만 가지고 있으며, 이는 1862년 존 해닝 스피크가 발견한 리폰 폭포임을 확인했다. 1876년 11월부터 1877년 8월까지 루알라바 강을 항해하며 강이 서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서 그것이 콩고강임을 확인했다. 이후 그는 강을 대서양까지 추적했다. 원정 중 스탠리는 구획식 배와 나무로 파낸 카누를 사용하여 폭포와 급류를 우회하며 진행했고,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으며 마지막 백인 동료 프랭크 포콕도 사망했다. 원정은 현지인들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스탠리와 그의 팀은 228명으로 출발해 999일 후 1877년 8월 9일 콩고강 하구 근처 포르투갈 보마 전초기지에 도착했을 때 114명만 생존했고, 유럽인은 그 중 스탠리 혼자였다.
1877년 4월 15일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 명의로 중앙 아프리카에 첫 원정을 보냈으나, 원정대 4명 중 2명이 태양열과 열병으로 사망하자 나머지 대원들은 포기했다. 레오폴드는 경험 있는 탐험가가 필요함을 깨닫고 스탠리를 영입하려 했으나, 그는 영국 국기 아래 아프리카 탐험을 계속하고자 했으나 영국 외무부와 웨일스 황태자는 스탠리의 약탈과 살인 소문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8년 6월 스탠리는 레오폴드에게 받아들여지고 11월에 5년 계약을 체결했다. 스탠리는 콩고 급류를 우회하는 도로와 무역 거점 건설을 제안하고, 자재와 인력을 우회로로 운송하며 레오폴드와의 통신을 스트라우흐 대령에게 맡겼다. 1879년 스탠리는 콩고로 떠나 레오폴드 명령 하에 활동했으며, 레오폴드는 아프리카 토착민에게 정치적 권한을 주지 않고 백인이 모든 권력을 갖도록 지시했다. 스탠리는 콩고에서 일어난 참상을 기록하면서도 유럽 문명이 토착민을 지배해야 한다는 관점을 나타냈다. 프랑스가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를 통해 콩고 지역에 진출하며 브라자빌을 세우자 레오폴드는 분노했고, 중앙 아프리카의 권력 균형을 위해 베를린 회의를 추진해 스탠리가 그린 콩고 경계를 공식 확인하려 했다. 1885년 베를린 협정이 체결되어 콩고 분지의 자유무역 구역과 중립 지역을 규정하고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으나, 상업과 항행 감독 권한을 초강대국이 행사할 수 있는 조항 때문에 레오폴드는 불만이었다. 1890년 레오폴드 재위 25주년 기념일에 스탠리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레오폴드 훈장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유국 수익성을 논의하며 고무 생산 가능성을 주목했고, 스탠리는 콩고의 강과 지류에서 쉽게 고무를 채취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1891년 고무 채취권이 배분되었으나, 이후 강제노동으로 인한 착취가 발생했다.
1880년 2월 21일 스탠리는 급류를 지나 50톤에 달하는 장비와 해체된 증기선 2척, 바지선을 끌고 약 2년 동안 도로를 건설했으며, 스탠리 풀에 도착한 후 안지쿠 왕국의 마코코 왕으로부터 킨탐보 근처에 도시를 건설할 부지를 받았다. 인근 왕 응알리마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조 이줄루 언덕에 레오폴드빌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이 도시는 킨샤사로 인구 1,700만 명을 가진 급성장 메가시티가 되었다. 스탠리는 잔지바르의 가장 강력한 노예상 티푸 팁과 협상을 통해 상류 콩고의 새로운 지배자를 인정하고, 티푸 팁이 레오폴드빌과 다른 거점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그의 마지막 강 상류 거점을 허용해야 했다. 1886년 스탠리는 남수단의 에쿠아토리아 주지사 에민 파샤 구출 원정을 이끌었으며, 레오폴드 2세의 요청으로 콩고 강 경로를 통해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극심한 고난과 많은 인명 손실 속에서도 1888년 에민 파샤를 만났고, 루웬조리 산맥과 에드워드 호수를 지도화하며 1890년 생존자들과 함께 내륙에서 나왔다. 그러나 원정 중 다른 유럽인들의 잔혹 행위와 10세 소녀를 희생하는 사건으로 평판은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