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2:00:54

한돈석

성명 한돈석(韓敦錫)
자 / 호 형숙(亨淑) / 세은(世隱)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896년[2] 11월 2일 ~ 1935년 5월 21일
출생지 전라도 남원도호부 오지면 어은리
(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3]
사망지 전라북도 임실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돈석은 1896년 11월 2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오지면 어은리(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에서 한규협(韓圭浹)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족숙 한규영(韓圭英)에 입양되었다.

1919년 3월 지방 유지 이기송(李起松)·오병용·이만의(李萬儀) 등은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천도교 및 기독교와 은밀히 연락하여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장날 오후 2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는데, 한돈석은 이때 참여했다. 시위 대열은 점점 불어나 800명이 넘었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주동자 이기송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에 그는 오병용·이병렬(李秉烈)·김일봉(金一奉) 등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일본인 순사 촌상(村上)은 이기송을 풀어주었다.

그는 이에 힘입어 다시 오수리 장터로 돌아와 2천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하며 일본인이 경영하던 상점을 파괴했다. 또한 면사무소에 들러 조선인 직원들에게도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으며,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 도중 체포된 김영필(金永弼) 등이 석방되도록 했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그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그는 총을 빼앗고 고택기를 경종대로 끌고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남원 헌병대와 임실경찰서 무장대가 무차별 발포하자 사상자가 여럿 발생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그는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해 9월 3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1년형으로 감형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임실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5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한돈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안양공파 30세 석(錫) 항렬.[2]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 1894년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봉현리·홍곡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한상준 전 국회의원과 한상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