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하상근(河祥根) |
본관 | 진주 하씨 |
생몰 | 1889년 5월 19일 ~ 1953년 4월 1일 |
출생지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1] |
사망지 | 경상남도 남해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하상근은 1889년 5월 19일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예모(李禮模),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尹柱舜)이 주도한 독립만세계획에 가담해 4월 3일 남해읍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하상근은 남양리 노상에서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해 행진했다.시위대가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경찰주재소에 밀고했다. 이에 시위대는 날이 어두워졌고 정보도 샜으니 다음날 남해읍 장날을 이용해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일단 해산했다. 다음날인 4월 4일 아침, 하상근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천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시위대는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 쳤다. 주재소 경찰들이 어찌할 바 몰라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해 사천경찰서에 지원 요청을 했다. 시위대는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 때 자진해산하려 했다가 김치관이 사천 경찰서에 지원 요청을 했다는 걸 알게되자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했다.
그러나 하상근은 뒤이언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고, 1919년 9월 23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남해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3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하상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