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밀카르 𐤇𐤌𐤋𐤊 Hamilcar[1] | Ἁμίλκας | |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 미상 |
미상 | |
사망 | 미상 |
미상 | |
국적 | 카르타고 |
지위 | 카르타고 사령관 |
참전 전쟁 | 제1차 포에니 전쟁 -테르마에 전투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 -아디스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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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맞서 싸운 고대 카르타고 장군.2. 행적
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와 다른 인물이지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 몇몇 후대 역사가들은 두 사람을 동일인물로 착각했다. 기원전 261년 카르타고 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드레파나 항구를 요새화하고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하면서 로마군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러던 중 카르타고군에 복무하던 4천 명의 갈리아인들이 급료를 받지 못하자 로마 편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는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되자 속임수를 썼다. 용병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특정 장소로 보낸 뒤 한 병사에게 탈영병인 것처럼 위장해 크라수스에게 가서 갈리아인들이 있는 장소를 알리게 했다.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이를 믿고 갈리아인들을 포위 공격해 섬멸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이에 대해 로마군은 잠재적인 동맹군을 잃었고 그들 자신도 손실을 입었다고 평했다.기원전 259년,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2개 부대로 나뉘어서 공세를 개시했다.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다가 밀레 해전 후 로마의 편에 섰고 현재 카르타고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마켈라 시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았고, 다른 부대는 테르마에 시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하밀카르는 마켈라와 테르마에 중 어느 쪽을 도울 지 고심한 끝에 테르마에로 향했다. 하밀카르가 테르마에 인근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이 이미 테르마에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매복시켜 놓고 정탐꾼을 풀어서 적의 정보를 파악했다. 얼마 후,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다. 보조 군단으로서 로마군과 함께 하던 이탈리아 동맹군이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을 어찌 분배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파로포스와 테르마에 사이에 숙영지를 따로 세우고 로마군과 교류를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밀카르는 즉시 이탈리아 동맹군을 급습했다. 이탈리아 동맹군은 적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4,000 내지 6,000명이 궤멸되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테르마에를 한창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은 동맹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철수했다. 그 후 테르마에에서 겨울을 보낸 하밀카르는 기원전 258년 봄 가까운 곳부터 되찾으려 들 거라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시칠리아의 중심부인 엔나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가볍게 함락시켰다. 하밀카르는 여세를 몰아 시라쿠사 남동쪽 해안 도시인 카마리나로 진격해 역시 손쉽게 공략했다. 카마리나는 전쟁 발발 때 카르타고와 연합해 로마를 대적했다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선 시라쿠사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아마도 시라쿠사를 압박해 카르타고와 손잡게 하려고 카마리나를 공략했던 것으로 보이나,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끝까지 로마를 지지했다.
기원전 258년 여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시칠리아 섬에 진입한 뒤 파노르무스에 접근했다. 그는 하밀카르를 도발해 성벽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하밀카르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는 동료와 함께 히파냐, 미티스트라티온, 엔나를 공격해 모조리 함락시켰다. 특히 기원전 259년 로마군의 공성을 7개월간 버텨냈던 미티스트라티온은 이번에도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수비대가 야밤에 빠져나가자 항복했지만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불태워진 뒤 주민 전원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카이아티누스는 카마리나로 이동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지만, 대대장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플라마가 분견대를 이끌고 적의 주의를 산만하게 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이어 카마리나를 포위한 뒤 시라쿠사에서 보낸 공성 무기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기원전 257년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57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가 이끄는 로마 육군 및 해군은 틴다리스를 육지와 해상에서 협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로마 함대가 틴다리스 만에 정박하고 있을 때 하밀카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가 전투 대형을 펼치지 않은 채 인근 해역을 지나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레굴루스는 즉시 출격 명령을 내렸지만, 먼저 준비가 된 10척의 배만 이끌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적이 자신들을 향해 뛰쳐나온 것을 보고 일순간 당황해 후퇴하려 했지만, 곧 적의 공세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함대는 선원들의 탑승이 완료되지 않아서 육지에 정박해 있었고, 레굴루스의 기함은 사실상 단독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즉시 뱃머리를 돌려 무모하게 돌진하고 있는 적선들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9척의 로마 함선들이 적군의 충각 전술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지만, 레굴루스의 기함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빠른 항해"와 "훌륭한 선원" 덕분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나머지 로마 함대가 전장에 도착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카르타고 함대는 서둘러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0척이 나포되고 8척이 침몰되었다. 나머지 함대는 리파리 섬으로 피신했다. 그 후 틴다리스는 로마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기원전 256년, 하밀카르는 한노와 함께 카르타고의 본토인 아프리카로 쳐들어오는 로마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두 장군은 즉시 에크노무스에서 5마일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함대를 집결시켰는데, 그 수가 350척에 달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함대에 14만 명의 선원, 노 젓는 사람, 군단병이 있었으며 카르타고 함대에 15만 명이 탑승했다고 밝혔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과장이라고 간주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해전인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후 에크노무스 곶 앞바다에서 330척의 로마 함대와 마주치면서, 에크노무스 해전이 발발했다.
로마 함대 사령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는 크고 강력한 함대를 전방과 중앙에 배치하고 각각의 측면과 후방에 2개의 편대를 추가로 편성했다. 이 4개의 함대는 집정관 본인이 탑승한 기함을 중심으로 쐐기 진형을 형성했고, 후방에는 2개의 예비 편대가 일렬로 배치되어 수송선들을 보호했다. 카르타고 함대는 이에 맞서 전체의 3/4를 우익이 바다를 향해 뻗은 형태로서 일렬로 나란히 배치했다. 나머지 1/4는 카르타고 전선의 약간 앞쪽에 비스듬히 배치된 좌익을 형성했다. 좌익과 중앙은 하밀카르가 지휘했고, 나머지 부대는 한노가 지휘했다.
레굴루스와 불소는 쐐기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어서 카르타고 함대가 우수한 항해술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로마 함대가 전방을 향해 진격하자, 하밀카르는 중앙의 카르타고 전함들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적이 뱃머리를 돌려 물러나자, 로마 병사들은 적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고 있다고 여겨 추격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로마의 선두 편대가 후방의 편대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한노는 우익의 속도가 빠른 선박들을 이끌고 로마 쐐기 대형의 후방에 있는 4번째 편대를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하밀카르도 좌익 편대를 이끌고 로마의 3번째 편대를 급습했다. 또한 일부 카르타고 함대는 후방에 동떨어진 적 수송선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3번째와 4번째 편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해안쪽으로 밀렸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적 함선에 코르부스를 내리 꽂아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적선에 승선에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한편, 레굴루스와 불소가 이끄는 선두 편대는 후퇴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포획했다. 그러던 중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격을 중단한 뒤 뱃머리를 돌려 아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 함대의 배후를 찔렀다. 불소는 해안 근처에 좌초될 위기에 몰린 3번째 편대를 구했고, 레굴루스는 4번째 편대를 구조했다. 이에 하밀카르와 한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로마군은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기원전 256년 겨울, 아프리카에 상륙한 로마군 지휘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카르타고에서 남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아디스(현재 유티나) 시로 진격해 포위하고 주변의 시골을 약탈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밀카르, 하스드루발, 보스타르에게 적군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하밀카르가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이끌고 온 5,000 보병과 500 기병을 포함해 로마군과 비슷한 전력을 규합한 뒤 아디스로 진군했다. 이후 아디스 인근의 바위 언덕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폴리비오스는 이들이 카르타고군의 주력인 전투 코끼리와 기병이 제 역량을 발휘하기 힘든 바위 언덕에 군대를 배치시킨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비판했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로마 군단병의 위력이 강한데다 병력을 급하게 긁어모은 터라 신병이 많으니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으므로 지형에 의지하여 방비한 것은 나쁜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레굴루스는 적이 아군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주둔한 것을 보고 병력을 둘로 나눠서 새벽에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은 적이 기습하러 온 것을 사전에 눈치채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첫번째 로마 부대는 카르타고군의 맹렬한 저항에 고전하다가 언덕 아래로 밀렸다. 그러나 카르타고군 상당수가 밀려나는 적을 쫓느라 전열을 이탈해 버렸고, 레굴루스는 2번째 부대를 이끌고 그런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했다. 이에 카르타고군은 언덕에서 퇴각했고, 기병대와 전투 코끼리는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투입되지 않다가 퇴각했다. 로마 측의 기병은 고작 500명밖에 안 됐기에 섣불리 추격하지 않았고, 로마 보병들도 전투를 온종일 치르느라 지쳐서 퇴각하는 적을 쫓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적이 버리고 간 진영에 가서 마음껏 약탈했다.
폴리비오스는 아디스 전투 후 하밀카르의 행적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누미디아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밝혔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하밀카르는 반란을 진압한 뒤 수많은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극도의 잔인성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