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5 14:56:28

피재길



皮載吉

생몰년도 미상

조선 후기의 의사.

그에 대해서는 홍양호의 이계집에 수록된 피재길소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의원 집안의 아들로 아버지는 종기 치료를 업으로 삼아 약을 잘 만들었으며,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의술을 전수받지 못해서 어머니가 보고 들은 것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전수했고, 일찍이 의서를 읽은 적 없이 약재를 모아 고약을 만드는 것만 알았다.

스스로 만들 것을 팔아 뒷골목을 다녀 의원 축에 들지 못했지만 사대부들은 그 소문을 듣고 불러 약을 시험했다가 효험이 있었다.

1793년에 정조가 머리에 부스럼을 앓아 여러 침과 약을 시험했지만 오랫동안 치료하지 못해 얼굴과 턱 부위까지 번졌고, 피재길의 이름을 아뢰는 자가 있어서 피재길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궐에 들어가 웅담에 여러 약재를 합해서 고아 고약을 만들었다.

며칠이면 치료되겠느냐는 정조의 물음에 피재길은 "하루면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면 거둘 수 있다"라 답했고, 정조의 증세도 그 말대로 회복되었다. 이로 인해 피재길은 7월 16일에 내의원의 침의에 임명되었고, 나주의 감목관에 임명되었다. 약원의 여러 의원이 놀라 탄복하고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해 그의 이름은 나라에 알려지고 그의 처방인 웅담고는 천방의 처방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800년 6월 22일에 정조의 진찰을 하고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김한주, 백동규 등과 함께 진찰했다. 정조가 승하하자 7월 4일에 강명길, 심인과 함께 국문을 받고 헌부로부터 탄핵되었다가 7월 14일에 무산부로 유배되었다가 1803년 2월 6일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