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13 20:19:19

피드나

파일:피드나 유적.jpg

1. 개요2. 역사

1. 개요

그리스어 Πύδνα
영어 Pydna

그리스 동북부의 유적. 테살로니카에서 서남쪽으로 35km, 펠라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기원전 5-2세기 마케도니아 왕국 시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 피에리아 지역의 중심지였으나 14세기에 서남쪽의 키트로스에 대체되며 버려졌다. 기존 도시 유적 중 동쪽 절반은 바다에 잠겼고, 서쪽 절반만이 현존한다. 시가지 일부만이 발굴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점토 성벽의 북부와 13세기 십자군 성채 등이 잔존한다.

2. 역사

파일:피드나 십자군.jpg
십자군 시기 성채 유적

마케도니아테살리아 지역을 이어주는 요충지였기에 미케네 문명기부터 마을이 있었고, 트라키아 인들이 거주했다. 기ㅣ원저 6세기부터 피드나는 자체 동전을 발행했다. 기원전 5세기 알렉산드로스 1세에 의해 일대는 마케도니아 왕국령이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인 기원전 432년에 아르케스트라토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포티데아와 함께 피드나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기원전 410년에 피드나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르켈라오스 1세와 아테네 해군이 각각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포위해 항복시켰다. 이후 아르켈라오스 1세는 주민들을 더욱 내륙의 키트로스로 이주시켰는데, 그가 11년 후 사망하자 다시 원래 시가지로 돌아왔다.

기원전 364년 아테네 장군 티모테오스가 피드나를 점령했으나 기원전 357년 필리포스 2세암피폴리스와 교환하자 해두고 점령해버렸다. 이후 성벽이 파괴되었다. 기원전 317년에는 필리포스 2세의 부인이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모친 올림피아스 태후가 양아들 필리포스 3세 부부를 죽인 후 피드나로 피신했다. 다만 이듬해 봄 마케도니아의 섭정 카산드로스가 피드나를 포위한 끝에 함락, 올림피아스를 처형했다. 기원전 168년, 6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피드나 전투에서 페르세우스를 격파한 후로는 로마 공화국 령이 되었다. 로마 제국 시기 피드나는 로마 가도가 지나는 중소 도시로 유지되었다.

4세기 들어 피드나에는 기독교가 주류가 되었고, 첫 바실리카 (성당)이 세워졌다. 피드나를 중심으로 한 주교구는 키트로스로 명명되었고, 점차 도시 지명도 키트로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6세기 초에는 2번째 바실리카도 세워졌고 성 알렉산데르에 봉헌되었다. 다만 우물과 저수조를 갖추고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던 2번째 바실리카는 9세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공격으로 불탔다. 전란이 이어지며 성채에는 외부와 이어지는 지하 통로가 세워졌고, 바다 건너 할키디키 반도와의 소통을 위한 봉화대도 설립되었다. 6세기에 세워진 성벽은 10세기에 1.4m 두께로 보강되었고, 사각 성탑이 추가되었으며 일부 성문들도 성벽이 되었다.

키트로스 주교는 879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했다. 11-12세기 키트로스 (피드나)는 테마 산하 카테파니콘 (절도사령)의 치소였다. 1204년 4차 십자군의 포위 후 함락된 키트로스에는 라틴 가톨릭 주교구가 세워졌고, 테살로니카 왕국에 속했다. 라틴 시기 주교 성당은 성채로 개조되었고, 영주가 거주할 성탑이 세워졌다. 계속해서 피에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이던 키트로스의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 2기인 14세기에 기존 시가지를 떠나 현재의 키트로스 (아르케라오스 1세가 이주시켰던 곳)로 이주했고, 이로써 기존의 키트로스는 피드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16세기 초까지 성채는 계속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