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프랭크 베리먼 Frank Berryman KCVO, CB, CBE, DSO | ||
본명 | 프랭크 호턴 베리먼 경 Sir Frank Horton Berryman | |
출생 | 1894년 4월 11일 | |
호주 식민지 빅토리아 식민지 질롱 | ||
사망 | 1981년 5월 28일 (향년 87세) | |
호주 자치령 로즈베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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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멜버른 고등학교 호주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시드니 대학교 | |
복무 | 호주 자치령 육군 (1915~1954) | |
최종 계급 | 중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호주의 군인.2. 생애
질롱에서 철도운전수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1] 해럴드 그림웨이드가 지휘하는 제2사단 제4포병여단으로 배치되었으며 이집트까지 이동했으나 갈리폴리에 가지 않고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1916년 대위로 진급해 아라스 전투당시 사단본부에 있다가 포대장으로 배치되어 전투를 치렀다. 소령으로 진급하고 파스샹달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다.전후 귀국해 군수장교로 배치되었으며 이후로도 참모직을 수행했다. 참모대학을 수료하고 줄리어스 브루치 휘하에서 연락장교로 있었다. 1935년 중령으로 진급하고 호주육군본부 작전차장으로 복무했고 1940년 제3사단 작전참모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 해 대령으로 진급했고 제6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단장이던 아이번 매케이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또한 17여단장 스탠리 새비지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1941년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어 바르디아 전투에서 작전상 실수를 저질러 비전투손실이 많았으나 토브룩 전투에서 공을 세워 만회했다. 준장으로 진급해 제7사단 포병대장으로 임명되어 사단장 아서 앨런과 함께 시리아-레바논에서 비시프랑스군과 전투를 치렀다.
그 해 8월 동인도 자바섬으로 이동해 1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1942년 9월 소장으로 진급해 육군참모부장으로 지내다가 1943년 존 라바랙의 후임으로 시드니 로웰이 뉴기니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베리먼은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영연방최고사령부에 있다가 필리핀 탈환전 당시 전장으로 복귀했다.
일본의 항복 조인식 당시 토머스 블레이미와 같이 있었고 1946년 동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직시절 군의 사회 공헌을 강조해 대민지원에 병력을 투입시켰다. 군 부지안에 꽃, 나무를 심어 별명이 꽃집 주인 프랭크였다. 1954년 제대했고 198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