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단두대에서 살아남기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에서 모티브를 따왔다.2. 작중 행적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로 공산주의의 시초라고 불리는 프랑스 혁명기의 인물. 본작에서는 바렌 사건 이후 역사개변으로 인해 프랑스 정계가 훨씬 안정되면서 평범하게 정당 활동을 하게 된다. 평등파에 입당하여 화려한 대중연설로 상퀼로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에베르의 경계를 샀지만 결국 에베르를 밀어내고 평등파의 수장이 되었다.[1]한때는 로베스피에르가 상퀼로트를 구원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개혁을 인정하면서도 그 개혁은 결국 상퀼로트들에게는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고 실망한다. 1세대 공산주의자답게 사상의 공백이 많기는 하지만 그 특유의 사상 덕분에 파리에서 빠르게 유명인사가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물론 공산주의자답게 대중 독재를 추구해서 위험한 인간인 건 매한가지다.
그러다가 성심당이 주도한 프랑스의 농촌 혁명과 이탈리아 혁명전쟁 과정에서 농촌을 '해방구'로 설정하고 농촌과 도시를 포위하는 마오주의적 원리에 따른 게릴라전 양식을 보고 농촌에서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2] 생쥐스트가 성심당의 농업협동조합 조직 원리에서 모티브를 따온 '민중독재'를 주장하자 '농촌협동조합'을 도시에서 적용한 '도시 협동조합'을 고안하게 된다. 그래서 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상퀼로트의 공동소유를 통한 협동조합 경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지만, 박민혁은 미래인으로서 이를 반박한다. 산업혁명 이후의 모더니즘 사회를 모르는 바뵈프의 특성상 막상 성공시켜도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표류할 가능성이 크고, 그 자체적인 위험성 때문이다.
농사는 기본적인 수요는 일정하나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공급량이 매년, 분기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플랜테이션 같은 사치재 산업은 예외로 둔다 치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심당에 귀속된 프랑스 농민들이 종사하는 곡물과 과일이다. 제 아무리 사람이 검약하다 한들 사람은 먹어야 인체라는 생체기계가 멀쩡히 돌아가는 반면, 한 사람의 소득이 갑자기 2배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먹는 밥이나 빵의 양이 이에 비례해서 2배나 그 이상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고로 가축이 먹을 사료가 되었건, 사람이 먹을 곡물이 되었건 인구가 급증하지 않는 한 시장 수요는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정작 공급량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농사는 자연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올해는 풍년이라고 가격방어를 위해 내년에는 밀을 조금만 재배하자거나, 반대로 올해는 흉년이었으니 내년은 풍년을 노려보자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소유, 공동 분배를 통해 모든 면에서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협동조합 체제가 농촌에서 선호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의 변덕 1번에 망하는 게 농사일인 만큼 살아도 다 같이 살고 죽어도 다 같이 죽는 협동조합 체제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흉년이나 풍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든 한 해를 버티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정부 개입이 절실한 재난 상황에서도 일일이 농가를 찾아다니며 구제하지 않아도 협동조합이라는 단일창구를 통하여 지역 농가 전체를 구제할 수 있기에 농촌에서 농협 체제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그러나 도시는 다르다. 생활에 필수적인 소비재든, 부수적인 사치재든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공산품은 사람의 뜻대로 공급량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대신 시장 수요도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1달 전에 옷 여러 벌 사입은 사람이 1달 뒤에는 옷 한 벌도 안 사입을 수도 있고, 한 해에 자동차를 산 사람이 내년에 새로운 자동차를 살 거라는 보장이 없으며, 30년 전에 구입한 가구를 내내 쓰다가 바꾸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의 수요와 달리 체계적인 연구나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통계 없이 이런 공산품의 수요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장의 수요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건, 협동조합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인 안정성이 되려 집단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물건이 잘 팔릴 때 괜히 사업을 확장하거나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면서 조합원 개개인이 나눠 가지게 되는 몫을 늘리려 할 거고, 반대로 물건이 안 팔릴 때는 수익은 없는데 조합원을 내쫓을 수도 없어서 다 같이 센 강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최악에는 그냥 조합장과 그 일당이 반대 계파에 속한 조합원들을 대거 정리해고하면서 다른 사기업체와 별반 다를 바 없어질 수도 있다.[3]
"바뵈프 의원님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도시 협동조합만으로 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수요와 공급의 나선을 조율하실 생각이십니까? 조합원들의 고용 안정성과 공정한 수익분배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이 수요와 공급의 나선을 절충시킬 방안, 혹은 그 실마리라도 제시하실 수 있다면 이 프랑스의 총재로서 기쁘게 바뵈프 의원님의 경제적 민주화 제안을 검토해보겠습니다."
바뵈프는 이제 막 도시 협동조합을 고안한 상황이라 그 한계점을 정확히 꼬집을 거라고는 예상을 못해서 당황하고, 대신 바뵈프의 방금 제안은 수요는 일정하지만 별다른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직종에 한해서는 안정적이라는 뜻이기에 사기업체와 투자자본의 기여가 지극히 제한적인, 사실상 버려지거나 유권자들의 혈세로 유지되는 직종들에 한해서 실험적으로 적용해보자고 제안하였다. 21세기 정부 부처에 지원금 받으며 공공복지 차원에서 유지되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제안한 거지만, 수요가 일정하지만 수익이 제한적이고 사기업체의 기여가 거의 없다는 건 모두가 기피하는 3D 직종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평등파 쪽에서는 불쾌해했다.
이후 바뵈프는 사실 다 알고 있던 거 아니냐고 박민혁을 따로 찾아가서 항의하고, 박민혁은 카미유의 카페에서 만나 대화하게 된다. 박민혁은 너를 못 믿었던 게 아니라 상퀼로트를 믿을 수 없었기에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지만 시기상조라 생각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뵈프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싫어했지만 주인공은 좌익 성향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바뵈프에게 호의적이었고,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변할 세력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 지식 일부를 가르쳐주고, 로베스피에르도 부자들만 해먹는 나라는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국 허락해줬다.[4]
현재 바뵈프를 비롯한 평등파가 지지층으로 삼고 있는 상퀼로트는 '가지지 못한 자'로, 무언가를 소유하게 된 자는 상퀼로트가 아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버려질 것이라고 단언했다.[5] 이전의 앙시엠 레짐 정부가 특권계층을 위해 존재했듯이, 시민 정부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시민의 절대적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는 것 또한 정부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바뵈르는 그 논리대로라면 펜대 굴리는 '노동'을 하지만 상퀼로트처럼 절대적 빈곤에 신음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했고, 박민혁은 상퀼로트와 노동자의 개념을 합친「프롤레테르(prolétaire)」 개념을 제시한다.
상퀼로트는 '가지지 못한 자'고, '노동자'는 '직업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하는 자」라는 교집합되는 집단이 존재한다. 사무직들은 자신들의 전문 지식 때문에 수익 구조적으로 사업가, 공장주와 유사한 그들만의 모형 정원을 소유하고 있지만[6]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고, 몸에서 나오는 노동력을 동등한 조건의 타인보다 값싸게 팔아야 하며, 언제든지 자신보다 나은 조건의 타인에게 대체될 수 있다. 이들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기에 생산 수단을 가진 자에게 맞설 수 없다.
가정을 부양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득을 위하여 노동력을 팔러 나왔지만, 같은 처지의 가정과 경쟁하기에 가정을 부양하기 위한 최소한의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가장이 혼자서 가족을 부영하지 못하기에 가족 구성원이 저마다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고, 이들은 성인 남성보다 나약하기에 더 싼값에 노동력을 판다. 이러면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기에 성인 남성도 급여를 낮춰 제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런 악순환에 의해 다들 누구보다 싼값에 제 노동력을 팔려고 발버둥치는 새로운 임금 노예시장의 사이클이 구축되고, 그 급여로는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더욱 제 몸값을 낮춰야만 한다. 앙시앵 레짐의 종교 윤리와 위선마저 자취를 감추게 된 뒤 등장하는 날것 그대로의 탐욕과 악덕, 곧 모더니즘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7]
이들이 구원받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다. 모두가 더 이상 그런 조건으로 제 노동력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견뎌야 하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끔찍한 요구이며, 단 한 명의 배신자도 용납되지 않기에 보통의 조직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기에 평등파는 이 프롤레테르에게 정당을 조직하고, 오직 임금 노예 해방을 위한 조합을 결성하여 단결시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스파르타쿠스들에게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한 먹을 것과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공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지 정당이며, 그 자신 또한 부르주아지의 일원인 로베스피에르(박민혁)와 급진당의 손이 닿는 것은 쁘띠부르주아가 한계고, 무엇보다 집권당의 특성상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한들 질서와 안정을 해칠 정도까지 격렬히 투쟁할 수는 없다.
현재 프랑스 코뮌에는 농민에게는 성심당이, 금융가와 사업가들에게는 온건공화당이, 소시민들에게는 급진당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prolétariat)」에게는 아직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상퀼로트가 되고 싶어서 남아있는 자들은 없기에,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약간의 희망만 보여도 금세 계급을 배신하고 혁명을 배신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들 그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건 아니며, 정말 천운이 따라서 평생을 무위도식할 수 있을 만큼의 일확천금을 벌지 못하는 한 그 계급은 평생 낙인처럼 대물려서 이어지는 족쇄가 된다.
혁명은 오직 제 손으로 쟁취하여야 의미가 있지, 시작부터 부르주아지의 일방적인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혁명사의 첫 시작부터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일방적인 자비를 베풀어서 모든 게 잘 풀렸다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피땀 흘려 쟁취할 필요 없이 좋게 좋게 말로 하면 알아서 위에서 자비를 베풀어줄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을 갖게 된다.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탈무드). 바뵈르 본인이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처우가 극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그 뜻을 이어받는 사람이 나온다. 그가 실패하더라도 이념과 방법론은 더욱 보강될 것이며, 그다음 시대에 또다시 그를 이어받는 이가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혁명은 불멸로 남게 된다'.
더 이상 이어받을 이가 없다면 더 이상 계도하고 보호해줄 인텔리겐치아가 필요없을 만큼 프롤레타리아의 처우가 개선되었다는 뜻이 되며, 아무리 압제자들이 탄압한다고 한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그라쿠스 형제와 스파르타쿠스가 실패했다고 하여 그들을 추앙하는 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늘의 프랑스가 자유롭지 않다고 하여 내일의 프랑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랑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장차 문명의 발전도상에 따라 세계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는 비극이고 저주이다. 그러니 프랑스의 스파르타쿠스가 되어보라는 것.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거세지면 부르주아지의 공포도 더해지고, 그들은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 강한 정부를 요구하며 집권당에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궐기하면 부르주아지가 맞서고 자신들이 그 사이를 중재하면 부르주아지는 안전을,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리를, 자신들은 다음 선거에 내세울 업적을 가져갈 수 있는 공생관계가 성립된다.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다.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평범한 생물이라는 의미이다. 먹고, 자고, 싸고, 번식하는 등의 욕구를 충족해야만 행복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비참해지는 원초적인 생물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절대다수의 인간은 생물로서 원초적인 욕구만 충족시켜줘도 현 체제에 순응한다. 불평불만이야 있겠지만 그걸로 끝. 자유를 짓밟는 독재자가 나타나도 그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면 기꺼이 찬성표를 던진다. 사람이 자유를 갈망하게 만들려면 부자유함이 아닌 사람들의 욕구 불만에 집중해야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모형 정원은 없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제아무리 자유를 대가로 모든 욕구를 충족시킨 듯 보여도 그 안에는 미비한 점이 존재하며, 그 아킬레스건을 정조준해야 한다. 경제불황이든 빈부격차든 육아 문제든 간에 사람들의 원초적인 욕구와 직결된 체제모순을 부각하여 궁지로 몰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극소수의 반골만이 아닌 보편적인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항쟁이 가능해진다.
자유는 문화의 일종으로 후천적인 교육에 따라 습득되는 관념이다. 자연 그대로의 동물적인 본성에 기초한 폭주는 자유가 아닌 단순한 방종이며, 자유의 정의와 범위는 그 시대와 국가, 법제나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부자유함 또한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 만들 수 있고, 자유를 갈망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지만 인문환경과 충분한 대중계몽은 인간에게 자유를 갈망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평등은 경쟁이다. 인간은 끝없이 이웃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질투심 많은 생물이라 끊임없이 타인을 자신보다 아래에 두고 싶어 하고, 제 머리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못 견뎌 하면서도, 막상 자신과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의 까마득한 아래나 위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는 평등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종교나 혈통, 재산에 기초한 권위가 만들어지기 전의 원시 사회는 평등 그 자체였다. 다들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서로 제가 더 나은 자리를 맡고 싶어했을 것이며, 역할 구분에 따른 피라미드나 지도자는 존재해도 원시적인 폭력을 제외하면 위계질서라고 할 게 없으니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금방 끌어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위적인 권위를 때려 부수면 서로의 급을 자신과 같게 만들려고자 하는 인간 본성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도 평등해지게 된다.(물론 최소한의 질서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권위는 필요하지만.)
21세기의 사상을 18세기 사람(...)에게 때려박았으니 바뵈프는 당연히 어안이 벙벙해졌고,[8] 무신론자(유하게 봐도 불가지론자)인 바뵈프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왔나 잠깐 의심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게 되고(무려 그 바뵈프가 패배감을 얼굴에 드러냈다) 로베스피에르를 내심 스승으로 삼게 된다.[9] 바뵈프는 빙베스의 방법론을 배워 프롤레타리아 궐기를 주도, 박민혁의 오랜 소망을 이루게 된다. 계급한계론에 로베스피에르와 일치된 결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모든 걸 대리인을 통해 수행하려는 로베스피에르를 이해하나[10], 반면 인류는 자신이 누구 덕에 이런 세계에 살고 있게 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며 로베스피에르의 행보를 후대에게 전승할 마음을 먹는다.
3. 기타
[1] 이후 에베르는 은신하게 되는데, 에베르는 평소 신랄한 말투 때문에 인망이 없던 데다 장외에서 후대의 나치를 방불케 할 정도의 혐오팔이로 대중을 선동하고 지지를 끌어모으던 악랄한 정치적 행보 때문에 정적이 매우 많아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퀼로트 출신이라서 부르주아지를 싫어한다는 점 때문에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박민혁조차 이를 알고 에베르를 싫어하게 되었을 정도.[2] 원 역사에서는 마오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사상이 체계화되지 않은 데다 방데 전쟁과 같은 농촌혁명적 시도가 모두 외부적 요인으로 실패하여 농촌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착각이 18세기 말~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성공적인 사례도 규모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원인.[3] 그 외 협동조합만으로 경제를 굴리자는 생디칼리슴이 파시즘의 기원이 될 정도로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인 권력구조가 만들어지기 쉽다던가, 효율성이 떨어진다던가 등의 지적도 할 수 있지만 19세기 초 사람에게 설명해봐야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략했다.[4] 로베스피에르는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공화국의 이름을 빙자한 귀족 과두정도 극혐했다. 대한민국 출신이었던 박민혁으로 가면 조선시대 영향 때문에 공평하게 다 조지는 전제군주가 저들만 해먹겠다는 귀족 과두정 놈들에 비하면 차악이라고까지 했을 정도.[5] 이 때문에 상퀼로트는 자코뱅이 몰락하자 상퀼로트는 부르봉 왕정복고를 지지했으며, 그다음에는 나폴레옹 3세를 지지했고, 도로 파리 코뮌을 지지하기도 했다.[6]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등장하는 화이트칼라 사무직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이때 파리는 막 산업 혁명을 시작하는 시기였다.[7] 주인공은 칼 마르크스가 이런저런 문제는 많아도 이전에는 접점이 없다고 여겨졌던 '상퀼로트'와 '노동하는 자'의 교집합을 발견해 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하는데 성공한 것이 19세기 이후 사상사에 매우 큰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평했다.[8] 바뵈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로, 1세대이기 때문에 칼 마르크스 이후처럼 사상이 체계화되지 않았었다.[9] 박민혁이 한 말은 현재에서 미래를 유추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거인에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히' 설명해주는 인상을 받아 의도치 않게 정체를 알아맞추기도 했다.[10]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를 혁명적 부르주아지로 정의하며 그 한계를 인지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초인주의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