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4 03:24:35

풍훤

馮諼[1]

1. 소개2. 맹상군의 식객 생활3. 의(義)를 사다4. 교토삼굴5. 열국지에서의 후일담

1. 소개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언변이 뛰어났던 맹상군 전문의 식객. 전국책과 사기의 맹상군열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생몰연도는 전국책, 사기(역사서) 등의 국내외 역사서에서도 나와있지 않다.

2. 맹상군의 식객 생활

풍환이 젊어서 뭘 하고 지냈는 지는 알 수 없고, 맹상군이 식객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2] 맹상군이 식객을 들일 때는 그 사람의 특기를 물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풍훤은 "그런 건 없고, 그저 그쪽이 선비를 좋아하신다고 하니 내 몸뚱아리 좀 의탁하러 왔소"라면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별의별 사람을 다 경험해본 맹상군은 그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 하등 숙소인 전사(傳舍)에 처넣고, 얼마 뒤 전사 관리인에게 근황을 물어보니 "꼴에 장검을 한 자루 갖고 있던데, 칼집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 밥상머리에 생선 한 마리가 없구나!' 노래를 부르더라"고 하였다. 맹상군은 이 말을 듣고 풍훤을 중등 숙소인 행사(幸舍)로 옮겨줬다. 물론 행사의 급식에는 생선이 나왔다. 그런데 얼마 뒤 행사 관리인에게 근황을 물어보니 "칼집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 나가려 해도 수레 한 대가 없구나!' 하더라"지 않던가? 결국 맹상군은 그를 상등 숙소인 대사(代舍)로 모셨고, 외출할 때마다 수레를 제공해주었다. 그런데도 풍훤은 5일 뒤 다시 칼집을 두들기고 "장검아 돌아가자! 여기 있어 봤자 내 집이 없구나!" 노래를 불러대니, 천하의 맹상군도 결국 짜증을 냈다고 한다.[3]

3. 의(義)를 사다

어쨌건 이리하여 높은 자리에 올랐는데도 풍훤은 1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니트 세월을 보냈고, 처음으로 맡게 된 일이 빚쟁이들에게서 돈을 뜯어오는 일이었다. 당시 맹상군은 제나라의 재상이긴 했어도 워낙 식객이 많아 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기 고향 땅인 설(薛)에서 돈놀이, 즉 대부업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말발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풍훤의 재능을 시험해 볼 겸 맹상군은 풍훤에게 수금을 부탁했고, 풍훤도 흔쾌히 여기에 응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설 땅에 도착한 풍훤은 우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얼마간이라도 이자를 갚을 수 있는 집에서 돈을 받아 10만 전이란 거금을 거두어 맹상군에게 보고했고, 맹상군은 "집에 부족한 게 있으니 무엇인가 사서 돌아오도록 하라"또는 "우리 집에 무엇이 부족한지 보고 사오시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맹상군의 편지를 받은 풍훤은 이자를 낼 수 있든 없든 맹상군의 빚쟁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모은 후 받아낸 이자 10만 전을 가지고 큰 잔치를 벌였고, 잔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영주님께서 돈을 빌려준 까닭은 생계가 어려운 백성들이 본업에 종사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이자를 받는 까닭은 빈객들을 모실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었고, 빈궁한 사람들도 따로 적어놓으라 했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채무를 이행하라는 말씀이잖아요."
"아뇨, 영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그렇게 약속하고 차용증을 불태워버리라 하였습니다."
"?! 채권을 포기하신다는 얘깁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영주를 섬기는 여러분들께서는 잘들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이러하니 부디 배반만은 말아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러고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서를 몽땅 불태워 버렸다. 당연히 참석했던 사람들은 풍훤에게 거듭 절을 했다고.

이후 풍훤이 설에서 돌아오자 그의 비범한(…) 일처리 소식을 들은 맹상군이 화가 나서 풍훤을 소환했다. 맹상군은 풍훤을 나무라며 "내가 백성들에게 대부업을 하는 것은 내가 보유한 봉읍이 작아 수입도 적으니 지금 3천이나 되는 식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모으고자 함인데, 이자 받은 돈으로 소를 잡고 술을 사서 잔치를 벌이고 차용증을 불살랐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요?" 라고 말한다.
이에 풍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단 충분한 고기와 술을 준비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빠짐없이 모이게 할 수 없어 돈에 여유가 있는 자와 아닌 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갚을 기한을 정해줄 수 있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은 10년을 기다려도 이자는 못 받고, 독촉했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쩝니까. 그러니 공과 백성들 사이에 의(義)를 사서 돌아오게 되고 명성을 높이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 말을 잃은 맹상군은 결국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4. 교토삼굴

얼마 뒤 잘 나가던 맹상군도 결국은 진나라와 초나라의 이간질 끝에 제나라 왕의 미움을 사서 파면당했고 뜯어먹을 게 없어져서 식객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털레털레 고향 설 땅으로 간 맹상군은 백성들이 자신을 환영하는 걸 보자 "일전에 의를 사왔다는 말의 뜻을 오늘에야 알겠다"며 매우 감동했는데, 그때까지 곁을 지키던 풍훤은 수레 한 대를 달라고 하더니 "약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둔다(狡兎三窟)고 하니 이제 내가 굴을 두 개 더 파서 공을 두 다리 쭉 뻗고 잠들게 하겠다"며 나섰다. 얘도 이제 갈 핑계 찾는 줄이나 알았던 맹상군은 여비까지 쥐어주며 그를 환송했다.

그런데 풍훤은 그 길로 위나라 왕을 만나[4] "위와 제가 자웅(雌雄)을 겨루어 웅(雄)이 되는 쪽이 곧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입을 털기 시작한다. 왕이 "어떻게 하면 위나라가 웅이 될 수 있느냐" 물으니 풍훤은 "지금 제나라가 전문을 버렸으니 빨리 전문을 주워먹으라. 제나라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이 제나라를 원망하고 있으니 제나라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며 꼬셨고, 위왕은 아싸 조쿠나 하며 사신에게 금을 잔뜩 실어 제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풍훤은 제나라로 재빨리 돌아가 왕에게 "제와 위가 자웅을 겨루어 웅이 되는 쪽이 곧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왕이 "제나라가 웅이 될 수 있느냐"고 하자 풍훤은 "안 되겠는데? 네가 파면한 전문을 위나라 왕이 주워먹으려 한다더라. 전문이 위나라 재상이 되면 임치(臨淄: 제나라의 수도)는 물론 즉묵(卽墨)도 안 남을 것이다. 위나라가 남의 나라 재상을 모셔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빨리 전문이 못 달아나게 막으라"고 압박을 넣었다.[5]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확인해보니 정말로 금을 실은 수레가 제나라에 들어오고 있었고, 기절초풍한 제왕은 전문을 도로 불러 원래의 자리에 1천 호의 식읍까지 추가로 내주며 싹싹 빌어야 했다.[6]

전문이 복직하자 흩어졌던 식객들도 뜯어먹을 거 없나 하고 다시 모여들었고 풍훤이 그런 식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자 전문은 "난 식객 대접하길 좋아해서 언제나 그 놈들을 최선을 다해서 대접해줬더니, 내 처지가 어렵다고 튈 땐 언제고 이제와서 무슨 낯짝으로 다시 기어들어와! 만약 그들이 돌아오면 내가 저놈들 낯짝에 침을 뱉어줄테다." 라며 매우 화를 냈다. 이에 풍훤은 갑자기 함께 타고 가던 수레에서 내려서 전문에게 절을 하였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전문은 "식객들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런 게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시장이 아침엔 바글바글하다 저녁에는 썰렁한 이유가, 아침 시장을 좋아하고 저녁 시장을 싫어해서일까? 돈이 많고 자리가 높으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당신이 지위를 잃자 선비들이 전부 떠났다고 해서 일부러 식객들이 오는 것을 막을 필요까진 없다. 이전처럼 그들을 대우하시길 바란다.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 수레에서 내려와 풍훤에게 깨달음을 줘서 고맙다고 절하며 식객을 대접했다고 한다.

5. 열국지에서의 후일담

정사에서는 위의 내용이 끝이지만, 열국지에서는 후일담이 나온다. 맹상군의 사후 풍훤은 위나라로 갔고 그곳의 다른 전국사군자인 신릉군에게 의지했다. 신릉군이 조나라와 위나라에서 2차례나 진군을 이기자 진나라 장양왕이 신릉군을 억류하기 위해 진나라로 불렀다. 풍훤은 자신이 옛날에 섬겼던 맹상군과 초회왕의 사례를 들며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신릉군은 자신의 다른 빈객인 주해를 보냈고 주해는 신릉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죽었다. 장양왕은 채택의 계책을 받아들여 채택하여 신릉군과 위나라 왕 사이를 갈라놓게 했고 그 계책이 주효해 신릉군은 니트족으로 전락해 하릴없이 주색으로 소일을 하다가 죽었고, 풍훤 또한 그 뒤를 따르듯이 죽었다.[7]


[1] 전국책에서 기록된 이름이고, 사기에서는 풍환(馮驩)으로 등장한다.[2] 전국책에서는 기원전 295년(주 난왕 20년) 사람을 보내 식객으로 받아달라고 한다.[3] 전국책에서는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싶어도 봉양할 돈이 없구나!" 징징댔는데, 약이 오른 맹상군이 그 돈까지 대주자 더 이상은 징징대지 않았다고 한다.[4] 전국책 기준. 사기에서는 진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그리고 풍훤은 뭣도 없는 사람이니까 맹상군의 식객이라는 것으로 왕을 만났다는 것인데, 식객이라는 것만으로도 왕을 만나볼 수 있는 걸 보면 맹상군의 명성도 엄청 높았다는 이야기가 된다.[5] 실제로 제민왕 말기 5국이 침공해 제나라 72개 성 중에서 즉묵과 거(莒) 둘만 빼고 다 뺏겨 멸망 직전까지 갔다(…). 마침 맹상군이 위나라 재상일 적의 일이고 이 과정에서 위나라는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결국 맞아떨어졌네?[6] 나중에 풍훤은 전문에게 "선왕의 제기를 하사받아 설 땅에 종묘를 세우라"는 보신책을 알려줬고, 당연히 전문은 이것을 그대로 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종묘가 있으니 제나라 왕이 그 땅을 공격하면 패륜을 저지르게 되는 제약이 생기게 되었다. 헌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소인배 제나라 왕은 훗날 설 땅을 밀어버린다(…).[7] 열국지 102회에 나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