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Titus Otacilius Crass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1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시칠리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시칠리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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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총독. 아프리카 해안가를 수시로 공격하여 카르타고에 타격을 입혔다.2. 생애
그가 속한 오타킬리우스 가문은 베네벤토 출신의 평민 씨족이었다. 기원전 3세기 초 파비우스 씨족과 결혼 관계를 맺은 덕분에 로마로 이주할 수 있었고, 이후 노빌레스 집안으로서 여러 요직에 임용되었다. 아버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261년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1차 포에니 전쟁 때 시칠리아에서 전투에 참여했으며, 한번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기원전 246년에는 삼촌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집정관이 지휘하는 로마군에 복무했다.기원전 217년 사제 직임을 역임하였으며,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직후 독재관이 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신들께 로마를 지켜달라고 기원하여 시민들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할 때, 베누스 사원을 에루키눔에 짓겠다고 맹세하면서 이를 지원하였다. 그는 이 인연으로 기원전 215년경 파비우스의 누이딸과 결혼했다. 이후 시칠리아 속주 총독에 부임하여 7년간 그곳을 다스리면서 카르타고 함대가 시칠리아로 오는 걸 저지하고 아프리카 해안가를 연이어 습격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기원전 215년, 그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 그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가 가장 많은 표를 확보하면서 집정관이 되는 듯했지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재투표를 요구하며 후보자들을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결국 두 번째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적으로 파비우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 이리하여 집정관이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칠리아 총독 임기를 연장할 수 있었다.
기원전 211년 다시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하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투표에서 선두에 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만리우스가 안구에 질환이 생겼다는 이유로 사퇴하면서 마르켈루스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선거 직후 시칠리아에 머물던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고 하나,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1] 마르켈루스는 그 전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나 원로원이 절차상 하자를 들어 무효화하는 일을 당했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마르켈루스의 능력을 인정한 파비우스가 마르켈루스에게 집정관 직을 되찾아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