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군의 군속이자 검도의 교사(敎士)[1]인 타카야마 마사요시(高山政吉)가 창시한 군용 발도술이다.
(해군군무원으로 도법을 지도하던 시절의 복장)
1. 개요
기병과를 비롯해 실전에서 도검전투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본군 육군은 일본군도술을 정립하여 교범을 갱신해가며 장교준사관/하사관병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일본해군은 군도술의 정립이나 갱신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함대전을 위주로 하는 해군의 특성상 검술에 훈련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1870년대에 상대 함선에 돌입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강행 이승(强行移昇) 전법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강행이승 전문부대였던 해병대를 폐지했기 때문에 더욱 군도술의 재정립을 수행할 이유가 없었으며, 사회에서 배우는 검도로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대신 상륙작전을 위해 임시로 각 함선의 승조원을 차출하여 편성하는 육전대(陸戰隊)가 존재하여 청일전쟁당시 대만을 비롯한 각지의 상륙전에서 활약하였고, 훗날 아예 상륙전문으로 상설편성된 특별육전대(特別陸戰隊)가 창설되기도 했다.
특별육전대는 상륙작전 전문으로 해군의 지휘를 받으며 복장과 장비도 지상전용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해사변등의 사태에서 선두로 나서 전투하였다. 그러다 보니 함상에서는 의장 이상의 의미가 없던 군도를 실제로 뽑아 교전해야 할 사태에 직면하였고, 해군 구군도의 비실전성이 지적되기도 하였다.[2]] 또한 기존의 검도로는 돌격으로 대표되는 실전 태세와는 맞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하였고, 이에 대한 군도술 개혁의 수요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타카야마 마사요시(高山政吉)이다. 그는 1899년 6월 19일 태어나 어려서부터 다양한 검술을 수련하였고,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소속의 무도인이기도 하였다. 이때는 히가시마이즈루(東舞鶴)의 고조 해안의 타카야마 도장(高山道場), 니시마이즈루(西舞鶴)의 코신칸도장(拱辰館道場), 또 나카마이즈루(中舞鶴)에도 도장이 있어 검술을 가르치며 지냈다. 그는 해군 군속으로써[3] 일본해군 특별육전대의 검술 교관을 맡았으며 1937년 상해사변, 뒤이은 남경공략전까지 제16사단을 따라 종군했고,[4] 이때 전쟁환경을 경험하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정립하여 1938년 2월에 근대전용의 백병발도술(近代戰用の白兵拔刀術)의 초고를 작성하고, 뒤이어 타카야마류 백병발도술기본업 77본(高山流白兵抜刀術基本業 77本)을 발표한다. 여기서 발표된 것들이 타카야마 마사요시의 실전검술 요령이고, 1940년에는 공식적으로 해군기관학교, 마이즈루해병단, 해군병학교에 채용되어 해군검술의 개혁에 일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상륙전을 비롯한 실전경험과 장교준사관/하사관병의 증언을 토대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녹문제를 해결한 스테인리스도를 개발하여 스테인리스를 사용한 신군도가 타카야마도(高山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타카야마 마사요시의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대부분 군도의 조법과 동일한 동작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이에 관해서는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군도술 정립 때 타카야마 마사요시가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0년 5월 타카야마가 백병발도술 원고를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다나카 히사이치(田中久一) 교장에게 제출했고, 다나카 교장은 "공식 발표 이전에 내용을 무단으로 채용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고 하며 1944년판에는 그의 노하우가 완전히 수록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내용이 그가 연구한 도법인지, 세부적인 기술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군도의 조법 연구에 기여했다는 것 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42년에는 민간유파로써 타카야마류 발도술(高山流拔刀術)을 창시, 국방무도의 일환으로 민간인들에 대한 검술지도에 힘썼다.
타카야마류는 현재로써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창시자인 타카야마 마사요시는 남경전선에서의 종군 당시 민간인학살의 혐의[5]를 받고 C급전범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큐슈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전후에도 성공적으로 부흥하여 민간유파로써 정착한 토야마류와 달리 민간무도로써 부흥하지는 못했다. 또한 육군 토야마학교에서 계속해서 교범화되고 출판된, 비슷한 성격의 군도의 조법과는 달리 당시의 자료도 잘 연구되어 있지 않아 그의 저서로 알려진 근대전용의 백병발도술(近代戰用の白兵拔刀術)은 정식 출판되지 못하고 초안으로만 남아있는데다 연구된 바도 없다. 또한 타카야마 마사요시와 관계가 깊었던 나카무라류의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도 그의 저서 일본도정신과 발도도(日本刀精神と抜刀道)에서 "현재에는 이 타카야마류의 맥을 잇는 자도 없고, 타카야마류 발도술은 사라져 버렸다. 진심으로 유감스럽다"고 할 정도로 민간에서는 잊혀진 무술이 되어버렸다.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기본적인 베기/찌르기 훈련, 발도술, 물체베기 훈련과 더불어 간합과 공방감각을 기르기 위해 죽도와 호구를 사용한 대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타카야마류 발도술 자체는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3대 전수자가 현존하고 있다. 타카야마류의 정체를 알고 흥미를 가진 일본의 한 네티즌이 해군타카야마류발도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3대 전수자를 만났으나, 3대 전수자는 넷상에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서브컬쳐의 소재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현재는 블로그를 동결하고 3대 전수자가 10년 넘게 준비한 책을 제본하여 대리 판매만 하고 있다.
2. 관련 항목
격투기 무술 관련 정보[1] 학교 선생님 혹은 교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검도에서 높은 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일종의 명예 칭호이다. 범사라는 호칭도 있다.[2] 대체적으로 목제칼집에 황동 도장구를 사용한 칼집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차는 점, 소드벨트(刀帶)가 불편하다는 점, 바닷물에 쉽게 녹이 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자세한 착용방법과 문제는 일본군도/착용법참조.[3] 무사수행을 위해 전쟁터에 따라나섰다고 한다.[4]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는 타카야마 검사(高山劍士)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여기저기를 순회지도하며 시참이나 발도술의 교육을 수행하였는데 후쿠치야마 20연대의 수기에서는 1937년 12월 13일 정오 타카야마 검사가 와서 시참을 시연한 내용이 있고, 12월 25일에는 코이즈미 군의관중장의 회식에 초대받은 기록도 있는 등 육해군을 가리지 않고 지도에 임한 것으로 여겨진다.[5] 포로를 도검으로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명을 연속으로 깔끔하게 참수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