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0:58:50

후지와라노 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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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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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66대 이치조 덴노황후
2.1. 생애2.2. 자녀
3. 제74대 도바 덴노의 중궁
3.1. 가문3.2. 생애3.3. 자녀
4. 제75대 스토쿠 덴노의 중궁5. 제122대 메이지 덴노의 황후

1. 개요

일본 역사의 황후 중 후지와라노 쇼시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여럿 있다.

2. 제66대 이치조 덴노황후

藤原彰子
988~1074

조토몬인(上東門院)

이치조 덴노의 제2황후. 아키코(彰子)라고도 한다.

2.1. 생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로 1000년에 이치조 덴노의 여어로 입궁한 뒤, 중궁으로 책립되었다.

당시 이미 황후 후지와라노 테이시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쇼시가 중궁으로 책립되면서 덴노 한 명이 두 명의 정실을 동시에 두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입궁할 때 4명의 궁녀가 따라 들어왔으니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아카조메에몬, 이세노 다이후 등이 그녀들이다. 이들을 통해 헤이안 문화가 꽃피었다. 1001년, 후지와라노 테이시가 산후병으로 사망하면서 이치조 덴노의 유일한 황후가 된다.

그러나 쇼시는 12세로 너무 어렸고 이치조도 다른 후궁들에게 관심을 두었기에[1] 테이시가 사망한 후 9년 동안 쇼시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았다. 미치나가로서는 쇼시가 아들을 낳아야 동궁의 외조부로서 권력이 확고해지는데 딸을 볶아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이치조는 친정이 몰락해 임신 상태로 출가까지 한 테이시가 딸을 낳자 귀족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계속 만났을 정도로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 게다가 이치조 덴노는 큰아버지인 레이제이 덴노의 자손에게 덴노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위해 아들을 많이 두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었기에 너무 어린 쇼시를 총애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다만 쇼시의 여방(궁녀)중에서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겐지모노가타리의 작자 무라사키 시키부, 화려한 연애편력의 소유자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이즈미 시키부 등이 있었고 이로써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치조 덴노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또한 이치조 덴노로서도 기댈 외가가 없는 아츠야스 친왕을 쇼시가 양육하게 하면서 그녀의 처소를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이런 노력 끝에 쇼시는 마침내 아츠히라 친왕아츠나가 친왕을 낳았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에 따르면 아츠히라 친왕을 낳을 당시 난산이 매우 심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러다 테이시처럼 죽는 게 아니냐고 다들 불안에 떨면서 엄청 울었다고 한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9년의 세월을 인고하고 아츠히라를 출산하기 전 테이시처럼 죽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도 침착하게 있으려고 하는 쇼시의 근성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테이시가 낳은 아츠야스 친왕 외에는 아들이 없었던 이치조 덴노도 몹시 기뻐해서 직접 만나러 쇼시의 친정으로 거둥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치조 덴노가 병세가 악화되어 양위하면서 테이시의 아들을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쇼시가 아들을 낳으면서 이는 불가능해졌다. 다만 쇼시도 자신이 키운 테이시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길 원했지만 이를 막은 친정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쇼시의 태도가 진심이었는지, 남편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한 언행인지는 불확실하다. 친아들의 즉위를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보긴 힘들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아츠야스 친왕(敦康親王)을 내세우는 게 아주 거짓말이라는 보장도 없는 게, 두 세살 때부터 키운 아이라 정이 안 들었다고 보긴 힘들고 어차피 의지할 데가 자신밖에 없어서 쇼시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여겼을 수는 있다. 실제로도 아츠야스 친왕은 이후로도 미치나가 일족의 후원을 받았고 결혼식 때도 쇼시가 많은 선물을 보내는 한편, 쇼시의 남동생인 요리미치와도 사이가 각별해서 한 집에서 살았을 정도였다.[2]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후지와라노 센시[3]를 닮았는지 한 성격 해서 친정의 권세를 굳힌 인물이기도 하다. 미치나가는 아들 요리미치에게 후계로 동생 노리미치를 정하라고 유언했는데 요리미치가 슬쩍 어기려 하자 바로 미치나가의 유훈을 까먹었느냐 버럭했고, 요리미치는 아무 말 못하고 동생을 후계로 삼았다. 다만 노리미치에게도 요리미치의 아들에게 적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은 못박아두었고 이는 그대로 실현된다.

후지와라노 쇼시의 두 아들은 고이치조 덴노고스자쿠 덴노가 되었는데 1011년 남편 이치조 덴노가 물러나면서 조토몬인(上東門院)으로 불리게 된다. 조토몬인은 1074년까지 장수했는데 이때가 무려 6대가 흐른 제72대 시라카와 덴노가 즉위한 다음 해였다. 그리고 쇼시 이후로 친여동생들 셋이 줄줄이 황후가 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다.

2.2. 자녀

이치조 덴노의 제1황자 아츠야스 친왕(敦康 親王) (999~1019)은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타카(藤原道隆)의 딸 후지와라노 테이시 황후의 소생이라 즉위하지 못했다.

3. 제74대 도바 덴노의 중궁

파일:Taikenmonin.jpg
藤原璋子
1101년 - 1145년 9월 10일

시호는 타이켄몬인(待賢門院)

도바 덴노의 중궁. 璋子는 읽는 방법에(음독, 훈독) 따라 '쇼시' 또는, '타마코'로 읽을 수 있다.

3.1. 가문

후지와라 북가의 칸인류(閑院流) 출신인데, 칸인류는 후지와라씨의 분파 중 하나다.

아버지는 정2위 대납언 후지와라노 키미자네(藤原公実), 어머니는 호리카와 덴노도바 덴노의 유모였던 후지와라노 미츠코(藤原光子)로 사이온지(西園寺)씨의 시조 후지와라노 미치스에(藤原通季), 도쿠다이지(西園寺)씨의 시조 우대신 후지와라노 사네요시(藤原実能), 후지와라노 츠네자네의 정실이자 니조 덴노의 외할머니였던 후지와라노 키미코와 동복형제였으며, 산조(三条)씨의 시조였던 태정대신 산조 사네유키와는 이복형제였다. 쇼시는 후지와라노 키미자네의 장녀(藤原公実)였다.

3.2. 생애

7살때 아버지 키미자네가 사망하자 시카라와 법황(72대)과 총희 기온노 여어(女御)에게 양육되었다. 관백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의 후계자였던 홋쇼지 관백(法性寺関白)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4]와 혼담이 있었지만 타다자네가 시라카와 법황과 쇼시와의 추문을 이유로 거절해 시라카와 법황이 노했다고 한다. 1117년 시라카와 법황의 양녀 자격으로 도바 덴노(74대)의 후궁이 되었고, 1개월 후 중궁이 되었다. 1119년 1황자 아키히토 친왕(顕仁親王)을 낳았고, 이후 황녀 2명과 황자 4명을 낳았다.

1123년 도바 덴노가 물러나고, 아키히토 황태자(顕仁皇太子)가 스토쿠 천황(75대)으로 즉위하자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도바 덴노가 물러난 것은 자의가 아닌 시라카와 법황의 압박 때문이었다. 도바 덴노는 이후 후지와라노 타이시(藤原泰子)와 후지와라노 도쿠시를 입궐시켰고, 타이시를 황후로 삼았다.

시라카와 덴노가 77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스토쿠 덴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국 후지와라노 도쿠시 소생의 나리히토 황태자(고노에 덴노, 76대)에게 황위를 빼앗긴다. 설상가상으로 <고사담>에서는 스토쿠 상황이 시라카와 덴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바 덴노의 외면을 받아 독수공방을 하던 중 북면무사 사토 노리키요(佐藤義淸)[5]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로 인한 파문과 고노에 덴노 즉위 이후 후지와라노 타이시를 표적으로 한 저주 사건의 배후라는 누명을 쓴다.
1142년 후지와라노 쇼시는 스스로 세운 절인 호콘고인(法金剛院)에 출가해 은거했고, 3년 후 큰오빠이자 이복오빠인 산조 사네유키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후지와라노 쇼시의 사망 이후 고노에 덴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스토쿠 상황과 4황자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덴노, 77대)이 대립해 호겐의 난이라는 전쟁까지 가는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후에 황후로 높여져 제2황후라 불리는 도쿠시와 달리 도바 덴노가 쇼시는 황후로 높이지 않았는데, 당시 일본에서 중궁은 황후의 또 다른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쇼시는 도바 덴노의 1번째 정실부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는 쇼시도 황후로 보지만, 타이시나 도쿠시처럼 몇번째 황후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3.3. 자녀

  • 제1황자 아키히토 친왕(顕仁親王)
  • 제1황녀 키시/요시코 내친왕(禧子内親王) (1122년-1133년)
  • 제2황자 무치히토 친왕(通仁親王) (1124년-1129년)
  • 제3황자 기미히토 친왕(君仁親王) (1125년-1143년)
  • 제2황녀 조사이몬인(上西門院) 무네코 내친왕 (統子内親王) (1126년-1189년)
  • 제4황자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 제5황자 무토히토 친왕(本仁親王)->가쿠쇼 법친왕(覚性法親王)(출가 이후) (1129년-1169년)
당대 황후나 중궁이 아들을 다섯이나 낳은 건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4. 제75대 스토쿠 덴노의 중궁

藤原聖子
1122년∼1181년

코카몬인(皇嘉門院)

스토쿠 덴노의 중궁. 키요코(聖子)라고도 한다.

1122년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딸로 태어나 스토쿠 덴노의 중궁이 되었다. <이마카가미(今鏡)>에 따르면 부부 사이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고, 효에노스케노 츠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이 아들을 낳자 중궁과 후지와라노 타다미치는 이를 불쾌히 여겼다고 한다. 이는 고노에 덴노 사후 후지와라노 타다미치가 후지와라노 도쿠시와 손잡고 스토쿠 덴노를 몰아내는 원인이 된다.[6]

효에노스케노 츠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은 외척이 당시만 하더라도 중앙정계의 권력과 거리가 있던 미나모토였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스토쿠 덴노는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아들이 고노에 덴노 하나뿐인 걸 이용해 시게히토 친왕을 양자로 보냈지만 후지와라노 도쿠시는 고노에 덴노가 죽자 자기 권력이 줄어드는 게 싫다며 도바 덴노를 꼬드겨 고시라카와 덴노를 옹립하고, 스토쿠 덴노를 몰아냈다.

스토쿠 덴노호겐의 난에서 패배하고, 시코쿠로 유배될 때 효에노스케노 츠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과 궁녀 몇 명만 따라갔다는 기술을 볼 때 남편을 따라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181년 사망했으며 1184년 남편이 스토쿠 덴노로 추숭되면서 자신 또한 코카몬인(皇嘉門院)으로 추숭되었다.

5. 제122대 메이지 덴노의 황후

메이지 덴노의 황후 쇼켄 황후(昭憲皇后)의 결혼 전 이름인 이치조 마사코(一條勝子)는 후지와라이기에 옛날식으로 읽으면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勝子)가 된다. 자세한 사항은 쇼켄 황후 참고.

[1] 특히 테이시의 동복여동생 비쿠시게도노가 이치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2] 애시당초 친왕의 아내와 요리미치의 아내가 자매다. 그래서 친왕의 결혼을 요리미치가 주관했는데 얼마나 화려하게 했는지 미치나가가 한소리했을 정도.[3] 남편 이치조 덴노의 모후이자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누나.[4]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의 장남으로 호겐의 난 당시 고시라카와 덴노를 지지해 후지와라 씨족의 당주가 되었다. 고셋케의 기원으로 그의 4남 후지와라노 모토자네가 고노에(近衛) 가문을 창설해 모토미치, 이에자네를 이어 이에자네의 장남 카네츠네가 현 고노에(近衛)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이에자네의 4남 카네히라가 고셋케 중의 하나인 타카츠카사(鷹司)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타다미치의 5남 모토후사는 마츠도노(松殿) 가문을 창설하였으나 아들인 모로이에에서 대가 끊어졌고, 타다미치의 6남 카네자네는 쿠조(九条) 가문을 창설해 요시쓰네, 미치이에의 대를 이어 미치이에의 장남 노리자네가 쿠조(九条)가, 4남 사네츠네가 이치조(一條)가, 차남 요시자네가 니조(二條) 가가 되었다.[5] 후에 출가해 승려 사이교(西行)로 불린다.[6] 스토쿠 덴노는 중궁과 후궁 셋이 있었지만 평생 후궁에게서 각각 하나씩 본 1남 1녀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