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라틴어: LQuintus Salvius Salvidienus Ruf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0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미상 |
참전 | 페루시아 내전 시칠리아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해군 사령관, 히스파니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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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옥타비아누스의 측근으로 활약했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배신하려다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었다.2. 생애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양치기를 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처럼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두 사람처럼 옥타비아누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기원전 44년 3월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와 함께 아폴로니아에서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할 군단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그리파와 함께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카이사르를 살해한 자들에 맞서 싸우자고 조언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루푸스 등 소규모 수행원과 함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 후 그는 아그리파와 함께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 되었다.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이탈리아의 해상을 봉쇄해 식량이 해상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브룬디시움 등 여러 항구도시를 수시로 공격하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육군을 이끌고 레기움으로 진군했고, 루푸스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로 진군하게 했다. 루푸스는 레기움 인근 해전에서 적 함대를 물리쳤지만, 마세나와 스킬리아 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함대에게 참패했다. 결국 시칠리아로 건너갈 수 없었던 옥타비아누스는 마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맞서고자 원군을 요청하자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연기하고 발칸 반도로 건너가 필리피 전투를 치렀다.
필리피 전투 이후, 그는 6개 군단과 함께 히스파니아 속주로 파견되어 총독을 맡았다. 기원전 41년 9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봉기하면서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옥타비아누스를 구원하기 위해 6개 군단을 통솔하여 이탈리아로 출진했다. 그는 센티넘 시를 공략하고 뒤이어 누르시아를 평정한 뒤, 아그리파, 옥타비아누스와 합류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군대를 사열시키고, 원로원을 압박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주도로 결의된 '국가의 적' 선포를 취소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그리파 등과 함께 페루시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3초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페루시아 내전이 끝난 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11개 군단을 맡겼으며, 원로원 의원이 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원전 39년 집정관으로 예정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40년 5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대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이르자, 그는 상황을 살핀 끝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질 확률이 높다고 여기고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그와 합세해 옥타비아누스를 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해 10월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루푸스의 배신을 알려줬다.
옥타비아누스는 그토록 신임했던 친구이자 심복의 배신에 분노했고, 급한 일을 의논한다는 구실로 그를 부른 뒤 긴급 체포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 처형되었다는 설, 사형을 선고받자 자살했다는 설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