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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임스 토머스 벨 (James Thomas Bell) |
생몰월일 | 1903년 5월 17일 ~ 1991년 3월 7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미시시피 주 스탁빌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좌투양타 |
소속팀 | 세인트루이스 스타스(1922~1931) 디트로이트 울브스(1932) 캔자스 시티 모낙스(1932) 홈스테드 그레이스(1932) 피츠버그 크로포즈(1933~1938) 캔자스 시티 모낙스(1934) 멤피스 레드삭스(1942) 홈스테드 그레이스(1943~1946) 디트로이트 세너터스(1947) 캔자스 시티 스타스(1948~1950) 멕시코 프로야구 리그 알리하도레스 데 탐피코[1] (1938~1939) 알고도네로스 데 우니온 라구나 (1940) 로호스 델 아길라 데 베라크루즈 (1940) 술탄네스 데 몬테레이 (1941)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쿨 파파 벨 | |
헌액 연도 | 1974년 |
헌액 방식 | 니그로리그 위원회(NC) |
1. 개요
그들은 '더 나은 흑인 선수가 나오면 계약하겠다.'라고 말했어요. 거짓말이었죠.
미국의 前 야구선수.니그로리그에서 뛰었으며 1922년 세인트루이스 스타스에서 데뷔한 이후 1946년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무려 20여년이 넘도록 니그로리그를 통틀어 가장 빠른 선수라는 신화를 몰고 다녔던 당대 최고의 준족이자 니그로리그 특별위원회에 의해 197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대선수다.
2. 유년시절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한 지역인 미시시피 스타크빌에서 1903년 5월 17일에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제임스 니컬러스였다. 하지만 모친인 메리 니컬러스가 조너스 벨과 결혼한 후 양아버지인 벨의 성을 따라 제임스 벨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지독한 인종차별을 감내하면서까지 미시시피를 생활 터전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던 그들의 가족은 결국 1920년 흑백차별이 덜 심한 세인트루이스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게 됐다.
이후 벨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야구를 접하게 되었고, 야구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미 프로팀 컴튼 힐 컵스에서 뛰던 그는 1922년 니그로 내셔널리그[2]의 세인트루이스 스타스에 입단한다.
3. 선수시절
입단 당시 벨은 투수였으나 당시 리그 최고 준족였던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지미 라이언스를 스피드로 꺾으며 타자로서의 재능을 깨닫고서 투수를 포기하고 타자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세인트루이스에서 활약하던 벨은 1931년 경기 침체의 여파로 NNL에서 소속팀인 세인트루이스가 퇴출되자 벨은 캔자스시티 모낙스와 홈스테드 그레이스에서 뛰다가 1933년 당시 니그로리그 최고의 팀 피츠버그 크로포즈에 입단한다. 벨은 이곳에서 사첼 페이지, 주디 존슨, 오스카 찰스턴, 조시 깁슨과 함께 활약하며 팀의 황금기를 함께 이끌었다. 이때 이후 피츠버그 크로포즈는 니그로리그의 양키스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멕시코 프로야구 리그에서 뛰기도 하였다.
이후 피츠버그를 떠난 벨은 멤피스 레드삭스에서 잠시 활약하다 1943년 홈스테드 그레이스로 이적했고,홈스테드에서 팀을 이끌며 1943년과 1944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로도 계속 니그로리그에서 활약하던 벨은 1950년을 끝으로 29년간의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 벨은 캔자스시티 모낙스 2군의 감독을 맡아 지도자의 길로 접어든다. 이때 당시 벨은 어니 뱅크스와 엘스턴 하워드등의 대선수들을 키워내기도 하였다.벨은 3년간 감독생활을 하다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와 21년간 세인트루이스 시청에서 야간 경비와 관리업무를 담당하다 1973년에 정년 퇴직하였다.
이후 벨은 1991년 3월 7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5. 여담
5.1. 니그로리그 역사 상 최고의 대도
- 벨은 스피드가 매우 빠르기로 유명했는데 이 중 전해지는 것이 선수 시절 젖은 내야 그라운드를 완주하는 데 불과 13.1초밖에 안걸렸으며, 건조한 상태에서는 내야 그라운드 완주에 12초, 홈에서 1루까지 주파하는 데는 불과 3.1초였다고한다.
- 벨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한 시즌 동안 무려 175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고 한다.
-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로 니그로리그와 화이트리그 간의 올스타 시범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의 희생 번트 때 1루 주자로 나가있던 벨이 상대팀 포수인 로이 파티가 공을 잡아 1루로 송구하는 사이 홈까지 파고 들었다고한다.
아래는 당시 니그로리그 선수들의 벨의 스피드에 관한 말들이다.
"원정경기를 할 때 숙소에서 벨이 스스로 방의 전등을 끈 후 전등이 채 꺼지기도 전에 이미 침대 안에 들어와 있었지."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
"벨이 크로포드 시절 버밍햄과의 경기에서 투수 옆을 스쳐 2루 베이스 쪽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땅볼을 쳤는데 어느새 벨이 2루로 슬라이딩하면서 그 볼을 걷어 찼어."
지미 크러치필드
지미 크러치필드
6. 관련 문서
[1] 멕시코 프로야구 리그 소속, 1985년 해체[2] 이하 N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