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16:48:22

최병옥(1909)

파일:독립지사_최병옥선생.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전라남도 영암 덕진 운암 716
사망 1989년 2월 8일 (향년 64세)
전라남도 영암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932년 4월 18일 오전 11시경 덕진면 영보리 뒷산에서 최판옥, 김판권 등이 비밀결사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산하에 교양부, 내부조직연락부, 외부조직연락부, 출판부를 두었다. 이들은 5월 1일 노동절 기념식 행사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진행할 수 없자 음력 5월 1일인 6월 4일에 노동절 기념행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농민들을 포섭하기로 협의했다.

6월 4일 오후 4시경 최판옥, 김판권은 인근 마을인 영보리, 운암리, 노송리, 장암리 등의 청년 70여 명을 영보정에 모이게 했다. 이 자리에서 최판옥 등은 운암리, 백계리에서 발생한 지주와 마름의 임의적인 소작권 변동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소작인들을 포섭해 소작투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 최병옥과 청년들은 이에 찬동하고 곧바로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기를 앞세우고 큰 북을 울리며 나팔을 불었다. 동시에 노동가를 부르며 산을 내려와 운암리 방향으로 행진하며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본인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쳤다.

그는 영암군 덕진면의 ‘영보정 사건’이라는 소작분쟁 투쟁에 참여했다가 체포됐다.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30원 납부를 선고받았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살다 1989년 2월 8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