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基厚
(? ~ ?)
1. 개요
고려 무신정권기의 간관.2. 생애
명종 14년(1184) 우사간을 지내다가 간의대부 송저, 직사관 왕허소 등 6명의 문신과 함께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됐다. 무신인 장군 이시용 등이 술사(術士)의 말을 믿고, 문신들이 무신들을 해칠 것이라고 믿어 없는 죄를 만들어내 유배보낸 것이었다. 최기후는 이듬해 복직해 정언으로 임명됐다. 정언은 종6품직이고 우사간은 정6품직이므로 보다 낮은 관직으로 복직한 셈이다.명종 15년(1185) 3월, 정언 최기후는 화공 이광필의 아들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적으로 대정(隊正)에 보임된 것을 문제삼았다.
이 아이는 나이가 겨우 20세인데, 즉 서경을 정벌할 때에는 10세 정도였을 뿐입니다. 어찌 열 살 아이가 종군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1]
그러나 명종은 최기후를 따로 불러 이광필이 그림으로 나라를 영광스럽게 했음을 생각하라고 꾸짖었고, 최기후는 끝내 임명장에 서명했다.[1] 此子年甫二十, 則在征西之時, 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從軍者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