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5:14:29

철학적 좀비

1. 개요2. '좀비'와의 관계3. 논증4. 반론
4.1. 전제 (ㄱ) "철학적 좀비는 사유가능하다"를 거부4.2. 전제 (ㄴ) "사유가능하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를 거부4.3. 전제 (ㄷ) "물리주의가 옳다면 철학적 좀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를 거부

1. 개요

철학적 좀비(哲學的좀비, philosophical zombie/p-zombie)는 심리철학형이상학의 고전적인 논제이다. 의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상적 의식인 감각질에 얽힌 사고실험이다. 역사상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하여 비슷한 발상은 여러 차례 제기된 적 있으나, 구체적으로 "좀비"라는 이름을 쓰는 형태의 현대적인 논증은 데이비드 차머스가 제안했다.

마음에 대한 물리주의를 논박하기 위하여 고안된 연역논증이다. 다만 연역논증의 특성상 설령 본 논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전제들 중 하나 이상을 부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좀비'와의 관계

창 밖을 보며 바깥 나무의 싱그러운 푸른 느낌을 경험하고, 초콜릿 바를 씹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오른쪽 어깨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고 상상해보자. 내 좀비 쌍둥이는 어떨까? 걔는 나와 물리적으로 동일하고 […] 기능적으로 동일하며 […] 심리적으로 동일한데다가 […] 기능적 의미에선 “의식적”이기까지 하다. 잠에서 깰 수 있고, 내적 상태의 내용을 보고하며, 여러 장소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는 그런 기능 발휘가 진정한 의식적 경험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현상적 느낌이라는게 없다. 좀비가 되는 느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원문][2]
데이비드 차머스, 『의식적 마음(The Conscious Mind)』
차머스 본인이 명시적으로 밝히듯 철학적 좀비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연출되는 "좀비"와는 다르다. 왜냐면 철학적 좀비는 몸이 썩어들어가지도 않고, 말을 못하지도 않으며, (보통 사람이 그렇다는 가정 하에서) 식인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의상 철학적 좀비는 보통 사람과 원자 단위, 분자 단위로 동일하기에 물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현대 분자생물학신경과학을 신뢰하는 한, 이처럼 좀비와 사람이 물리적으로 구별불가능하다면 좀비와 사람은 인지, 행동 등에서도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좀비는 사람처럼 똑같이 먹고 마시며,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울고 웃으며, 찌르면 피가 나는 생물이다.

다만 정의상 좀비는 사람과 달리 감각질을 결여한다. 즉 "날 것인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좀비가 나뭇잎을 본다고 해보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뭇잎을 볼 때 가시광선은 좀비의 망막에 있는 시세포를 거쳐 전기 신호로 전환되고, 이는 시신경을 통해 대뇌 후두엽 시각피질을 거쳐 뭇 두뇌 영역에서 처리된다. 이를 바탕으로 좀비는 "나뭇잎이 보이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봄이 왔구나'라고 추론을 할 수도 있으며, 나뭇잎을 집으려 손가락을 뻗을 수도 있다.

다만 사람과 달리 좀비는 "초록색"이라는 바로 그 느낌은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물리적, 생리적, 행태적으로 사람과 모두 같지만 바로 그 주관적인 경험만큼만은 불가능한 것이다.

좀비 논증의 옹호자들은 결코 좀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면 현실세계에서 그런게 있다고 볼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건은 그런 좀비가 존재하는게 가능하냐는 점에 있다.

3. 논증

표준적으로 철학적 좀비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전제 (ㄱ): 철학적 좀비는 사유가능하다.
'둥근 사각형'은 말이 안 되며, 아예 사유불가능한 것 같다. 반면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은 존재할리 만무하지만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것 같다. 위에서 정의된 '철학적 좀비'는 '둥근 사각형'이 아닌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곧 그와 마찬가지로 사유가능한 것 같다.
전제 (ㄴ): 사유가능하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린 늘상 다양한 방식으로 "만약에..."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만약에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총에 맞지 않았더라면..."같은 역사적 가능성, 그리고 "만약에 물리 상수의 값이 달랐더라면..."같은 현실세계의 물리학에선 벗어나는 가능성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만약에 황금 산이 있었더라면..."도 있을법한 가능성이다.

반면에 "만약에 둥근 사각형이 있었더라면..."은 아예 불가능한 것 같다. 왜냐면 애초에 위 사례들과 달리 사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위 사례들처럼 사유가능한 것은 '둥근 사각형'처럼 아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것과는 구별되며, 곧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3]
소결: 따라서 철학적 좀비는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삼단논법으로 전제(ㄱ) 및 (ㄴ)으로부터 도출된다.
전제 (ㄷ): 물리주의가 옳다면 철학적 좀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리철학에서 유력한 형태의 물리주의에 따르면 모든 자연 현상은 물리학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이때 물리학은 현대의 물리학일 필요가 없으며, 아득히 먼 미래의 이상적인 물리학이어도 괜찮다.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물리주의가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갖는다는 점이다.
  • 수반(supervenience) 논제: 만약 두 상황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면, 두 상황은 반드시 심리적으로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 대우는 "두 상황이 심리적으로 다르다면, 물리적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다"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물리적 차이 없이 심리적 차이가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좀비는 물리적으로 사람과 똑같지만, 현상적 의식 혹은 감각질이라는 심리적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즉 물리적 차이가 없이도 심리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수반 논제를 위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물리주의가 옳다면 좀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결론: 따라서 물리주의는 그르다.
소결과 전제 (ㄷ)으로부터 후건 부정에 의해 도출된다.

4. 반론

데이비드 차머스는 위 논증을 근거로 물리주의를 기각하며, 그 대신 심신 이원론을 받아들인다. 이는 차머스가 한발짝 더 나아가 범심론(panpsychism)을 수용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역논증의 특성상 "한 사람의 전건 긍정(modus ponens)은 다른 사람의 후건 부정(modus tollens)"이기도 하므로, 많은 철학자들은 좀비 논변에서 차머스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내고는 한다. 철학에서 흔히 벌어지듯,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것.
좀비 논변은 전제 (ㄱ),(ㄴ),(ㄷ)으로부터 이원론 같은 비주류인 형이상학적 입장이 따라나온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원론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설득력이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좀비 논변은 귀류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요컨대 좀비 논변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전제 (ㄱ),(ㄴ),(ㄷ) 중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원론 같은 문제적인 입장이 튀어나왔다는 점. 따라서 남은 과업은 전제 (ㄱ),(ㄴ),(ㄷ) 가운데 어느게 문제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4.1. 전제 (ㄱ) "철학적 좀비는 사유가능하다"를 거부

애초에 물리주의가 옳다면,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존재는 주관적 경험 역시 똑같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모든 원자의 배치가 같다면 모든 물리적, 화학적 변화도 똑같이 일어날 텐데, 철학적 좀비만 주관적 경험을 못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주관적 경험이라는 것도 뇌에 있는 뉴런 사이의 반응인데, 철학적 좀비 역시 같은 뉴런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사람과 동일하면서 감각질이 결여된 좀비'라는 존재는 위에서 언급된 '둥근 사각형'처럼 말이 안되고 사유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이 의식이 뇌라는 물질 구조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의 경우, 철학적 좀비는 인간과 물질 구조가 동일하고, 따라서 의식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철학적 좀비라는 개념은 비정합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논증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정은 철학적 좀비의 개념이 ‘둥근 사각형’과는 달리 사유가능(conceivable)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무리 없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는 직관적 감각만으로 주장되며, 실제로는 철학적 좀비 개념의 완전한 정합성이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 물리주의자나 반-이원론자(physicalist, materialist)들은 철학적 좀비 개념이 언뜻 사유가능해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심리적 상태(현상적 의식)와 물리적 상태 간의 실질적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겉보기 사유가능성(merely apparent conceivability)’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철학적 좀비가 사유가능하다"는 직관은 충분한 이론적 숙고와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면 사라질 수 있는 피상적이고 가짜의 사유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17세기 사람들은 ‘물 없이 불붙는 산소 없는 불꽃’을 그럴듯하게 상상할 수 있었겠지만 현대 화학 지식으로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임을 안다. 마찬가지로 심리상태와 물리상태가 실제로 필연적 연관을 가진다면, 철학적 좀비 개념은 결국 ‘둥근 사각형’에 가까워지고, 진정한 사유가능성은 없어질 수 있다.

4.2. 전제 (ㄴ) "사유가능하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를 거부

“사유가능하면 존재가능하다”는 전제는 ‘사유가능성(conceivability)’과 ‘형이상학적 가능성(metaphysical possibility)’을 동일시하거나, 최소한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는 철학적 논의에서 매우 논쟁적이다.

사유가능성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통해 상상하는 것(개념적 결합물)이 실제로 논리적 모순 없이 존립하거나,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서 일관된 존재 양상을 보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즉,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 그 대상이 논리적,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고 결론지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상상할 때, 그 상상이 진정한 개념적 정합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학적 모순을 내포한 구조나, 본질적으로 자기모순적인 개념 조합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럴듯하게’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은 개념에 대한 충분한 고찰, 논리적 검증, 의미의 엄밀한 분석 없이 이루어진 피상적이고 막연한 이미지 형성에 불과하다. 이는 "겉보기 가능성(merely apparent possibility)"에 불과하며, 이 겉보기 가능성을 진정한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동치시키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크립키(Kripke)나 치머만(Zimmerman), 그리고 2차원적 의미론을 활용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은, 명제의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상상력을 넘어, 그 개념이 '본질적인 성질(essential property)'을 어떻게 지니는지, 그리고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나 우연성을 어떻게 부여하는지를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차원적 의미론은 문맥적·사전적 차원에서 개념들이 갖는 의미와 필연성을 면밀히 구분하여, 단순한 ‘사유가능성’이 ‘진정한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료하게 제기한다.

어떤 개념이 진정한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상적 사유 상황(idealized conditions of understanding)’ 하에서도 그 개념 조합에 아무런 모순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이상적 사유 상황이란, 그 개념에 대한 모든 관련 정보, 논리적 함축, 본질적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러한 완전한 정보와 이해 없이 개념을 대충 결합해 상상하는 것은, 신뢰할 만한 가능성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철학적 좀비 논증의 핵심 전제 중 하나는 ‘철학적 좀비를 사유할 수 있으니(=사유가능), 철학적 좀비가 존재할 수 있는(=형이상학적 가능) 세계도 있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판적 시각을 적용하면, 철학적 좀비의 사유가능성은 단지 인식적 빈곤이나 피상적 직관에서 비롯된 허상일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철학적 좀비 개념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그리고 의식과 물리적 기초 사이의 필연적 연관관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정한다면, 철학적 좀비는 사실상 개념적으로 모순적일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유가능성→존재가능성’ 전제는 무너지고, 철학적 좀비를 통한 물리주의 비판 전략은 약화되거나 무력화된다.

4.3. 전제 (ㄷ) "물리주의가 옳다면 철학적 좀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를 거부



처음으로 돌아가서, 철학적 좀비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인간과 동일하지만, 현상적 의식(qualia)이나 감각질(phenomenal consciousness) 없이 행동하는 존재'로 정의된다. 이 개념은 의식 상태와 물리 상태 사이의 필연적 연결성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제안되는데, 물리주의(physicalism)를 전제할 경우, 이 개념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물리주의에 따르면 모든 정신 상태는 물리적 상태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통상적으로 '수반 논제(supervenience thesis)'로 정식화할 수 있는데, 이 논제는 "물리적으로 동일한 두 세계(개체, 상황, 시나리오)는 심리적으로도 동일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만약 이 수반 논제가 물리주의의 핵심 함축이라면, '동일한 물리 상태에서 정신적(특히 현상적) 차이가 발생한다'는 가정은 물리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철학적 좀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모순된 조건이 필요하다.

(가) 철학적 좀비: 물리 상태 P와 동일하지만, 심리 상태 Q(특히 현상적 의식)를 결여한 존재가 가능함.
(나) 물리주의: 동일한 물리 상태 P라면 반드시 동일한 심리 상태 Q를 가져야 함.

만약 (나)를 물리주의적 정설로 수용한다면, (가)에서 말하는 존재는 개념적으로 상정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즉, 철학적 좀비를 "사유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의 정합적인 전제를 받아들인 순간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마치 "둥근 사각형"을 상상하려는 시도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물리주의 체계 안에서 "물리적 동일성과 심리적 차별성"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철학적 좀비 개념의 지지자들은 "그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으니 사유가능하다"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 '사유가능성'은 피상적이며, 이론적 무지(ignorance)나 불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 착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과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물 없고 산소 없이도 불이 붙는 세계' 혹은 '네 발가락을 가진 인간형 생물' 같은 상황이 그럴듯하게 상상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화학, 생물학 지식이 충분히 정립된 상황에서 그런 상상은 형식적으로는 가능해 보이나 사실상 개념적 모순을 품는다. 마찬가지로, 심리 상태가 물리 상태에 철저히 종속된다면 "물리적으로 동일한 상황에서 현상적 의식만 결여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더 정확한 이론적 이해에 도달했을 때 '가능하다고 여겨진 착각'으로 드러난다. 즉, 우리의 무지나 직관적 결핍 때문에 '사유가능한 듯' 보이던 좀비 개념은 제대로 된 물리주의적 이해를 통해 정당화될 수 없는 허상에 가깝다.

물리주의가 옳다면, 현상적 의식 상태는 물리적 기초 상태로부터 논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도 필연적으로 정해진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물리적으로 동일한 세계에서 의식 상태가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은 단순히 경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형이상학적 차원에서도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 철학적 좀비 가정은 단순한 과학적 반례나 경험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런 개념적 불가능성은, 충분히 정합적 이해를 전제하면, 우리의 언어적·개념적 틀 밖에 서 있는 공허한 시도로 드러난다.

따라서 물리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철학적 좀비 개념은 단순한 '다른 종류의 가능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주의의 핵심 논리적 구조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개념적 괴물에 불과하다. 의식이 물리 상태로부터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동일하지만 의식이 없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정확히 물리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둥근 사각형'을 상상하려는 것과 다름없는 모순적 시도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물리주의적 세계관 하에서 철학적 좀비 개념은 애초에 사유 불가능한, 개념적 모순을 담은 주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문] "we can imagine that right now I am gazing out the window, experiencing some nice green sensations from seeing the trees outside, having pleasant taste experiences through munching on a chocolate bar, and feeling a dull aching sensation in my right shoulder. What is going on in my zombie twin? He is physically identical to me (…) He will certainly be identical to me functionally: (...) He will be psychologically identical to me (...) He will even be “conscious” in the functional senses (…) he will be awake, able to report the contents of his internal states, able to focus attention in various places, and so on. It is just that none of this functioning will be accompanied by any real conscious experience. There will be no phenomenal feel. There is nothing it is like to be a zombie."[2] 감각질에 관한 고전적 논문인 Thomas Nagel의 "What Is it Like to Be a Bat?"을 염두에 둔 것.[3]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좀비는 설령 물리적(physical) 혹은 법칙적(nomic)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논리적 혹은 형이상학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좀비 논증 옹호자들은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