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인물
조선시대 창녕 장씨 주요 인물1.1. 문과급제
- 장 아(張 莪: 1409-?) : 창산군의 손자이다. 세종 8년(1426)에 문과 급제하고, 우헌납(右獻納), 강원도사(江原都事), 평양서윤(平壤庶尹) 등을 역임하였다.
- 장계증(張繼曾) : 아(莪)의 아들이다. 세종 24년(1442)에 문과 급제하고, 검열 (檢閱), 병조정랑(兵曹正郞),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등을 역임하고,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경 재(敬齋) 남수문(南秀文)의『敬齋集』을 보면 "檢閱張公繼曾 請題送僧光軌詩軸"이 있어서 남공(南公)과 교유한 사실이 확인된다.
- 장계이(張繼弛) : 계증(繼曾)의 동생이다. 문종 1년(1451)에 문과 급제하여 헌납(獻納), 성균관 사성(司成)에 이르렀고,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 였다.『대동야승』을 보면 공이 일찍이 귀신의 이치에 대해서 논하기를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는 귀신이 있으나 죽은지 오래되면 귀신은 없어 진다." 라고 하였다. 한편 사평(史評)에 의하면 '이학(理學)에 정박하고 조 행(操行)이 있었다.'(理學精博 有操行)라고 하였다. 徐居正(四佳), 丁克仁(不 憂軒) 등과 교유하였는데, 정극인의『불우헌집』에 “戱贈 張獻納繼弛”라 는 글이 있다.
- 장우성(張友誠) : 세조 1년(1456)에 문과 급제하고, 예조참의, 승정원 도승지 를 역임하였다. ⇒ 파조 편 참조
- 장중성(張仲誠) : 세조 7년(1462)에 문과 급제하고, 홍문관 전한(典翰)에 이 르렀다. ⇒ 파조 편 참조
- 장 희(張 禧: 1464-1542) : 아(莪)의 손자이며, 세복(世福)의 아들이다. 연산 군 4년(1498)에 문과 급제하고, 연산현감(連山縣監)에 이르렀다.
- 장 익(張 翼) : 연산군 7년(1501)에 문과에 올라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 장응성(張應星) : 맥계공의 손자이다. 자가 천추(天樞)이며, 중종 17년(1522) 에 문과 급제하고, 밀양부사(密陽府使), 능주목사(綾州牧使)에 이르렀다.
- 장순수(張順受: 1529-?) : 도승지공의 증손이다. 자(字)가 정숙(正叔)인데 뒤 에 이천(怡天)으로 고쳤으며, 호는 만은(晩隱)이다. 명종 11년(1556)에 문 과에 올라 호조정랑(戶曹正郞),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냈다. 당대의 명사 郭越(定庵), 郭황(走+黃: 濯淸軒), 宋鉉(宋希奎 子) 등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공은 산음현감에 재직할 때, 그 고을로 낙향하여 학문을 열었던 남명(南冥) 조 식(曺植: 1501-1572) 선생에게 종유(從遊)한 것으로 추정된다.
1.2. 서원향사
- 장시행(張是行: 1628-1688) : 만은공(晩隱公) 휘 순수(順受)의 증손인데, 자 (字)는 덕원(德源)이며, 호는 암계(巖溪)이다. 묵암 김정철(金廷哲) 선생의 문인이며, 무첨당(無?堂) 정도응(鄭道應: 鄭經世 孫), 다곡(茶谷) 허시창 (許時昌), 이의한(李宜翰) 등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효성이 뛰어나서 경상 도관찰사 이야(李?)의 장계로 조정으로부터 승훈랑 의금부도사(承訓郞 義禁府都事)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창녕 고강서원(高岡書 院)에 향사되었다.
- 장익정(張翼禎: 1652-1697) : 암계공(巖溪公)의 아들인데, 자(字)는 경징(景徵) 이며, 호는 청계(淸溪)이다. 검암(儉庵) 손전(孫佺) 선생 문하에 종유(從遊) 하였고, 효성이 뛰어나 김해의 선비 조구령(曺九齡) 등의 추천과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로 조정으로부터 승훈랑 공조좌랑(承訓郞 工曹佐郞) 증직되 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부자(父子) 함께 창녕 고강서원(高岡書院)에 향사되었다.
1.3. 공신
- 장관(張寬) :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昌山君에 봉군되었다. ⇒ 파조 편 참조
- 장계증(張繼曾) : 世祖 佐翼原從功臣 2等에 책록됨. ⇒ 문과 급제 편 참조
1.4. 효자
- 승지공파의 효자: 먼저 승지공파의 효자 가운데 만은공(晩隱公) 휘 순수(順受)의 자손 계통 으로 6대에 걸쳐서 8효자가 배출된 것이 주목되고, 다음으로 창산군파의 양대(兩代) 효자를 들 수 있다. 특히 6세 8효의 효행에 대한 은전(恩典)을 요청한 고문서 소지류(所志類)가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경상감사 및 창녕 현감에게 올린 1827, 1828, 1844, 1847, 1879년 등의 자료)
- 장승길(張承吉: 1566-1627) : 자는 선유(善裕)이고 호는 동암(東巖)인데, 조산 대부(朝散大夫)에 올랐으며, 품성이 순선(純善)하고 부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천(孝薦)되었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지백(張之白: 1595-1661) : 자는 사호(士皓)이고 품성이 괴위(魁偉)하고 부 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천(孝薦)되었고, 세상에서 고행처사(高行 處士)라 칭송되었으며,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시행(張是行) : 효행으로 증직(贈職), 정려(旌閭), 서원향사(書院享祀)되다. ⇒ 서원 향사편 참조
- 장익정(張翼禎) : 효행으로 증직(贈職), 정려(旌閭), 서원향사(書院享祀)되다. ⇒ 서원 향사편 참조
- 장 속(張 涑: 1687-1764) : 자는 중광(仲光)이고 효성이 지극히 높았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장계(狀啓)와 감영(監營)의 장계로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 만(張 滿: 1700-1742) : 자는 겸숙(謙叔)이고 효성이 지극히 높았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장계(狀啓)와 감영(監營)의 장계로 백형 휘 속(涑)과 함께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한보(張漢輔: 1737-1796) : 자는 여순(汝順)이고 선대의 정훈(庭訓)을 계승하여 효성이 지극히 돈독했으며, 친상(親喪)에 3년복을 더 입는 등, 그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사람을 움직였고(感天動人),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한필(張漢弼: 1742-1789) : 자는 제용(帝用)이고 부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친상(親喪)을 입고 여묘(廬墓) 살이 3년간에 애훼(哀毁)하니 도내 유림(儒林)에서 일제히 효천(孝薦)하였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
- 장재환(張再煥: 1808-1894) : 생원 휘 숙란(叔鸞)의 8세손이며, 자는 봉필(奉必)이고 호는 은암(隱菴)이다. 의정부 참정(參政)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장원호(張元昊) : 은암공의 아들이며, 자는 두명(斗明)이고, 호는 송포(松圃)이다. 벼슬이 의정부 참정(參政)에 이르렀으며, 효행이 뛰어나 정려(旌閭) 가 내려졌다.
1.5. 충신
- 장승지(張承祉) : 참봉공의 증손이며, 자(字)는 희언(熙彦), 벼슬은 통덕랑(通 德郞)이다. 임진란(壬辰亂)에 창의(倡義)하여 사절(死節)하였으며, 사적이 『창녕읍지』에 실려 있다.
- 장천장(張天章) : 부사공의 5세손이며, 자는 경윤(敬閏)이다. 선조 병자(1576) 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僉正),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역임하고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충무 공 이순신 장군 휘하의 옥포(玉浦) 전투에 참가하여 군공(軍功)이 있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벼슬이 무승지(武承旨)에 이르렀으며, 사적 이『고흥읍지』와『호남절의록』에 실려 있다.
- 장시헌(張時憲) : 무승지(武承旨) 휘 천장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 (判官)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남한산 성(南漢山城)에 호가(扈駕)한 공이 있다. 이 때 종형 시한(時翰)도 동행했 다고 하며, 사적이『고흥읍지』와『호남절의록』에 실려 있다.
1.6. 열녀
*손기후(孫起後)의 부인 장씨(張氏) : 임진란(壬辰亂) 때 열녀(烈女)이다.*조덕성(曺德成)의 부인 장씨(張氏) : 임진란(壬辰亂) 때 열녀(烈女)이다.
*장재환(張再煥)의 부인 진씨(陳氏) : 열행(烈行)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1.7. 학문문장
- 장 제(張 足+齊) : 장간공의 현손이며, 고려 때 성균학생(成均學生)으로 등과하 여 부령(副令),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知制誥란 문장이 뛰어난 자에 게 임명하는 벼슬이다. 복재(復齋) 정총(鄭摠)의「復齋集」(6대손 鄭逑 編, 『西原世稿』1607年刊本 所載)을 보면 "宿鹽州觀音寺 見張副令제"라는 내용이 있어서 복재공(復齋公)과 교유한 사실이 확인된다.
- 장계증(張繼曾) : ⇒ 문과 급제 편 참조
- 장계이(張繼弛) : ⇒ 문과 급제 편 참조
- 장중성(張仲誠) : ⇒ 파조 편 참조
- 장흔(張昕) : 승지공의 차남이며, 字는 여회(如晦)이다. 연산군 원년(149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이면(李綿)의 진성수유집(珍城守遺集)을 보면 진성수 이면을 포함하여 합천군수 배자겸(裵子謙), 훈도 김팽조(金彭祖) 등과 가야산 해인사에 유람할 때 지은 公의 詩 1수가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우뚝한 岩壁 천길 높게 웅장하고 淸川은 百尺쯤 깊구나. 孤壁千尋壯 淸川百尺深 ||崔孤雲의 먼 옛적 발자취를 그대와 함께 와서 찾아보았네. 孤雲千古迹 來與子同尋||산이 멀고 구름도 멀며 숲이 깊고 마을도 깊네. 山遠雲俱遠 林深洞亦深||儒仙으로 놀던 때 이미 오래되었으니 遺蹟아득해 찾기 어렵네. 儒仙遊已久 遺蹟杳難尋||
- 장응두(張應斗) : 맥계공의 손자이며, 자는 천기(天機)이다. 진사(進士)에 입격한 후 영천군수(永川郡守), 영해부사(寧海府使) 등 을 역임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 장순수(張順受) : ⇒ 문과 급제 편 참조
- 장익기(張益祺: 1569-?) : 전한공의 현손이며, 자는 덕경(德敬)인데, 참봉에 이르렀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다.
- 장익규(張益奎: 1571-?) : 전한공의 현손이며, 자는 문재(文哉), 호는 우방(于 房)인데,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사(師 事)하여 강학(講學)에 정박(精博)하고 더욱 조행(操行)이 있었다. 한강선생 을 위해 관해정(觀海亭)을 중건한 바 있고,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을 창건하였다. 당세의 명사 申之悌(梧峯), 孫起陽(?漢), 李屹(蘆坡) 등과 교 분이 있었다.
- 장경백(張警百) : 영해부사 응두의 아들이며, 자는 기수(耆叟)이고, 호는 도촌(道村) 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인이다.
- 장시걸(張時傑: 1634-?) : 전한공의 6대손이며, 자는 여우(汝愚)이고, 이요재 (二樂齋) 장방익(蔣邦翼)의 문인이다.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의 문집을 보면 공에 대한 시(詩)가 실려있다.
- 장지한(張之翰: 1750-1790) : 도촌공의 7세손이며, 자는 덕오(德五)이고, 호는 이요재(二樂齋)이다. 문장과 행검(行檢)이 뛰어 났으며,「眠鳩集」약간 편 이 있다.
- 장박익(張博翼: 1756-1822) : 도촌공의 7세손이며, 자는 붕거(鵬擧)이고, 호는 청천재(聽天齋)이다. 문학이 탁락(卓?)하였으며, 현재 세상에 전해지는 『池氏鴻史』의 간본(刊本)은 공의 글씨이다.
- 장대선(張大璿: 1858-1926) : 효자 휘 한필(漢弼)의 증손이며, 자는 경칠(敬 七)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다. 독행실학(篤行實學)하여 한 고을의 사우(士 友)간에 긍식(矜式)이 되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 장승표(張承杓: 1875-1942) : 생원 휘 형(蘅)의 후손이며, 자는 문우(文佑)이 고, 호는 회와(悔窩)이다.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사사(師事)하 였으며, 문장이 탁락(卓?)하고 필법이 정예(精銳)하였다
- 장준호(張駿昊: 1882-1949) : 우방공 휘 익규(益奎)의 9세손이며, 자는 건여 (健汝)이고, 호는 석천(石川)이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선생의 문인 으로서 품행이 순수(純粹)하고 부모 섬기는데 지극한 정성이 있었다. 유 초(遺草)가 있다.
- 장성호(張性昊: 1882-1937) : 효자 휘 한필(漢弼)의 현손이며, 자는 양능(養 能)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조성재(曺惺齋) 선생 문인이며 성품은 준위 (俊偉)하고 식견은 탁이(卓異)하였다.
- 장세표(張世杓: 1883-1957) : 효자 휘 속(涑)의 7세손이며, 자는 제경(濟卿)이 고, 호는 간서(澗西)이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선생의 문인으로서 특히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고 일가를 모으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유고 (遺稿)가 있다.
- 장지호(張志昊: 1884-1922) : 효자 휘 한필(漢弼)의 현손이며, 자는 학초(學 初)이고, 자호(自號)를 촤락당(最樂堂)이라 하였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 燮) 선생의 문인으로서 독행(篤行)함이 있었다. 유초(遺草)가 있다.
- 장두홍(張斗弘: 1899-1974) : 석천 휘 준호(駿昊)의 아들이며, 자는 원극(元 極)이고, 호는 소계(小溪)이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배워서 독실(篤實)함이 있었고, 성품은 온공 정직(溫恭 正直)하고 효성은 지극했으며, 각종 공영 사업(公營事業)에 공헌한 바 컸다.
- 장두윤(張斗允: 1899-1988) : 효자 휘 한필(漢弼)의 5세손이며, 자는 사옥(士 玉)이고, 호는 청암(淸庵)이다. 조성재(曺惺齋) 선생 문하에서 실용(實用) 학문을 돈독히 배웠고, 어버이 섬기는데 지극 정성을 다하였으며, 유초 (遺草)가 있다.
- 장두한(張斗翰: 1910-1981) : 최락당 휘 지호(志昊)의 아들이며, 자는 사응 (士鷹)이고, 호는 눌암(訥庵)이다. 용모는 단아(端雅)하고, 성품은 순근(純 謹)하였다. 일찍이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강 학(講學)에 근독(勤篤)하였고, 선대에서 행한 덕업을 잘 계승하여 일족을 인도하였다. 창녕향교의 전교(典校)를 지내면서『창녕현지』를 발간하였 고, 계축보(癸丑譜)의 주관 간행, 선대 정각(亭閣)의 중수(重修), 선대 제단 비의 수비(竪碑) 등, 우리 문중의 아름다운 사행을 대외에 적극 홍보하였 다. 유집(遺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