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9:58:59

찰리 웹

찰리 웹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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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로고.svg

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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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前 축구인
파일:Charles_Graham_Webb_Souvenir_Benefit_Cropped.pn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찰리 웹
Charlie Webb
본명 찰스 그레이엄 웹
Charles Graham Webb
출생 1886년 9월 4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커래이 기지
사망 1973년 6월 13일 (향년 86세)
잉글랜드 서석스주 호브
국적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워딩 FC (1902~1908)
에식스 연대 (1906~1908)
보헤미안 FC (1908~1909)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09~1915)
감독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19~1947)
국가대표 3경기 (아일랜드 / 1909~1911)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선수 경력2.3. 지도자 경력2.4. 사망
3. 기록
3.1. 선수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감독 시절 커리어를 종합하여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에서 30년 넘게 몸을 담갔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파일:Charles_Graham_Webb_and_his_Family,_circa_1898-1899.jpg
찰리 웹[1]과 그의 가족 (1898~1899)
찰리 웹은 그의 아버지이자 블랙 워치 소속 군인 윌리엄 웹이 주둔하고 있던 아일랜드 커레이 기지(Curragh Camp)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스코틀랜드 군인 가문이었으며, 찰리는 아버지가 발령받은 곳을 따라서 가족들과 함께 계속 이사를 갔어야 했다.

2.2. 선수 경력

2.2.1. 초기

1902년 16살 때, 워딩 FC 1군에 들어갔으며 그다음 2번째 시즌에 지역 우승컵을 싹쓸이하며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1904년부터 가족의 뜻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군생활을 하는 동안, 군부대 소속 축구단에서 선수로 뛰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보헤미안 FC에 입단하였다. 당시에 아일랜드 아마추어 대표팀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도 넣어봤다. 1909년 1월 부대에서 나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는 동안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선수가 되어 잉글랜드의 서던 리그 경기에 참가했는데, 군당국이 이를 포착하여 축구단에서 그를 추방하였으며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브라이튼에게 협회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 £5를 부과하였다. 여기에 악재가 더 생겼는데, 아일랜드 컵대회 준결승전에서 찰리의 소속 구단인 보헤미안 FC가 승리했었지만 당시 패배한 팀인 글렌토란 FC가 서던 리그에 출전하면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을 이유로 그의 출전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결승전이 열릴 무렵 찰리는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군대를 나와 브라이튼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2.2.2.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09/10 시즌 서던 리그 우승팀은 브라이튼이었는데, 여기서 웹은 모든 경기를 뛰었었다고 한다.[2] 그리고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당시 FA에 소속된 리그 우승팀인 아스톤 빌라 FC를 상대로 골을 넣어 FA 채리티 실드 우승 멤버가 되었다. 다만, 웹은 당시 아마추어 선수로 등록돼있어서 우승 상금을 받을 수 없었고 대신 금색 넥타이핀을 선물받았다. 이후 프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09년 3월 15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아일랜드를 대표하여 데뷔전을 치렀다. 이로써, 역대 최초로 국제 무대를 경험한 브라이튼 선수가 되었다.

그 후에도 득점 기록을 세우며 계속 승승장구하였지만, 1914년 11월 밀월 FC전에서 심각한 다리 부상을 당하여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은퇴하였다. 총 275경기 79골을 기록하였다.

2.3. 지도자 경력

2.3.1.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감독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대에 동원되었지만, 독일에서 전쟁 포로가 되는 등 꽤나 고생했었다. 본국으로 송환되기만을 기다리던 중, 브라이튼 회장으로부터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1919년 복무를 마치자마자 브라이튼의 감독으로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가 부임하던 시기였던 1923/24 시즌 FA컵에서 1부 리그 에버튼 FC를 꺾고 16강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비록 3부 리그에서 승격하진 못했지만, 당시 언론들은 그의 지도력을 칭찬하였다. 거기에 선수를 보는 안목도 좋았는데, 그가 영입하는 선수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 예시로, 부상으로 경기를 얼마 못 뛴 조지 홀리를 대체하기 위해 '잭 도란'이란 선수를 영입했는데 시즌 중반에 합류했음에도 클럽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또한, 유스였던 토미 쿡을 1군으로 데려왔는데 3시즌 동안 최다 득점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쿡이 크리켓을 하러 떠난 뒤 생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영입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리저브 휴 발란스는 득점포를 터뜨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1933년 에이스 공격수 아서 애트우드가 맹장염에 걸렸을 때, 대체자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경쟁에 밀려난 올리버 브라운과 계약했는데 2시즌 동안 41골을 넣으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1946-47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제자였던 토미 쿡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본인은 행정 업무를 담당하여 브라이튼에 잔류하였다. 그러나, 쿡이 성적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자 후임으로 돈 웰시를 선임하였고, 웰시를 돕기 위해 1947-48 시즌까지 브라이튼에 남아있었다가, 이후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2.4. 사망

1973년 호브의 요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3. 기록

3.1. 선수



[1] 맨 왼쪽 남자아이.[2] 다만, 서던 리그는 FA에 소속된 리그가 아니라서 공식적인 우승 경력으로 인정해주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