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미합중국 기병사령관 존 놀즈 헤어 John Knowles Herr | |
출생 | 1878년 10월 1일 |
미국 뉴저지주 화이트하우스 | |
사망 | 1955년 3월 12일 (향년 76세) |
미국 워싱턴 D.C. 월터리드 병원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902~1942 |
학력 | 레딩 아카데미 라파예트 칼리지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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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저지주 화이트하우스에서 태어났고 레딩 칼리지, 라파예트 칼리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생도시절 후배를 집단괴롭힘으로 정학을 당할 뻔했으나 끝까지 항변하며 정학은 면했다. 1902년 기병 소위로 임관해 필리핀 전쟁에 참전했었고 이후론 국내에서 기병 장교 생활을 한다. 1916년 대위로 진급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영국군 제19보병사단, 미국 전차군단, 제30보병사단의 참모로 활동했고 기병활동없이 보병으로만 활동했고 육군수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기병으로 돌아와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했으며 1938년 기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40년 당시 루이지애나 기동훈련당시 기갑부대의 능력을 확실하게 증명했고 애드너 채피 주니어, 대니얼 밴 부히스등 일부 장교들은 기병을 기계화시키는 것을 주장했다. 이에 헤어는 기병의 이점을 통해 기병의 존속을 주장했고 조지 C. 마셜,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를 불러 자신의 주장을 지지할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조지 S. 패튼을 비롯한 여러 기병 장교[1]들이 기계화에 찬성하는 분위기였고 무엇보다 전전 기병사령관이였던 가이 V. 헨리 주니어가 최초의 순수기갑부대 제7기계화기병여단을 창립하는데 도움을 줬다. 결국 기병파는 도태되었고 최후의 기병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퇴역 후 2차대전, 6.25전쟁에서 기갑부대의 실책이 있을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했고 기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작성했다. 1955년 사망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 루시안 트러스콧, 어니스트 N. 하먼, 로버트 W. 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