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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7B3B3><colcolor=#000000> 초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 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 | |
이름 | 조지 빌리어스 George Villiers |
출생 | 1592년 8월 28일 |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브룩스비 | |
사망 | 1628년 8월 23일 (향년 35세) |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포츠머스 | |
배우자 | 제18대 로스 여남작 캐서린 매너스[1] (1620년 결혼) |
자녀 | 메리, 찰스, 조지, 프랜시스 |
아버지 | 조지 빌리어스 |
어머니 | 메리 보몬트 |
형제 | 존, 크리스토퍼, 수잔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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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정치가로 영국사 최악의 간신배로 꼽히는 인물이다.2. 상세
1592년에 하급 귀족 조지 빌리어스의 아들이자 동명이인으로[2] 태어났다. 춤을 잘 췄으며 말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무능하지만 귀족이라는 가문 배경과 국왕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아부로 크게 성공했다. 미남자였던 그는 제임스 1세의 동성 애인었다는 말이 있다. 제임스 1세는 조지를 매우 아껴 버킹엄 공작 지위를 주었다. 찰스 1세와도 얼마나 친했는지 찰스 1세의 동성애 상대여서 재상이 되었다는 루머가 퍼질 정도였다.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둘 다와 스캔들이 있었던 것.[3]
하도 무능하다 보니 저지른 실책이 장난이 아닌데,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외교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쟁 수행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해 수많은 사상자와 재정 손실을 내며 잉글랜드를 패배하게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삼총사에 나오는 라 로셸 공성전이다.
이 때문에 의회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문제는 찰스 1세가 그런 잘못을 오히려 감싸돌면서 의회를 해산시키는 짓을 하고 말았던 것. 나중엔 예비역 장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가 분노한 해군 장교 존 펠턴의 칼에 찔려 피살되었다. 존 펠턴은 조지 빌리어스를 죽인 것을 당당하게 자랑하다가 장교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런던의 대중들은 조지 빌리어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환호성을 질렀으며 펠턴은 영웅시되었다.[4]
사후 버킹엄 공작위는 생후 7개월밖에 안된 차남이자[5] 동명이인인 조지 빌리어스가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가 자녀없이 사망하고 3남이자 막내인 프랜시스 빌리어스도 후사없이 19살의 젊은 나이로 잉글랜드 내전에서 전사한데다, 리치몬드 공작과 결혼한 장녀 메리가 낳은 외손주들마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초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후손은 완전히 끊겼다.
3. 기타
멋진 신사로 묘사되는 삼총사의 등장인물 버킹엄 공작과 동일인물이며 버킹엄 공작 암살의 배후에 리슐리외 추기경과 밀라디의 꼬드김이 있었다고 각색되었지만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또한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멋들어진 신사나 능력 있는 정치가도 아니었고 오히려 실제 모습은 간신에 가까웠으며, 리슐리외 추기경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될만큼 무능했다. 다만 소설에 언급되는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와의 스캔들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찰스 1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가 영국으로 시집갈 때 버킹엄 공작이었던 조지도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이 때 안 왕비와 밀회를 가지다가 발각된 적이 있기 때문.[6]2024년 미국 방송사 Starz에서 조지 빌리어스와 그의 어머니 메리 빌리어스의 생애를 다루는 드라마 메리 앤 조지(Mary & George)가 방영되었다. 조지 빌리어스 역은 니콜라스 갈리친, 메리 빌리어스 역은 줄리앤 무어가 맡았다. 대한민국에서는 OTT 서비스인 Wavve에서 단독 스트리밍되고 있다.
[1] 6대 러틀랜드 백작 프란시스 매너스의 딸로 당대 영국에서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부유한 상속녀로 알려졌다.[2] 즉 2세(주니어). 서양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이나 할아버지 이름을 물려주는 일은 매우 흔하다.[3] 다만 동성애자인 것이 기정 사실로 여겨지는 제임스 1세와는 달리 찰스 1세는 무능한 조지 빌리어스를 계속 중용하는 것에 반감을 가진 귀족과 민중사이에 퍼진 악의적인 루머일 가능성이 있다.[4]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런던 시내의 술집에는 "누가 잉글랜드를 지배하는가? 왕이다. 누가 왕을 지배하는가? 버킹엄 공작이다. 누가 버킹엄 공작을 지배하는가? 악마다. 버킹엄 공작을 죽여라!"는 글귀가 적힌 대자보가 붙어서 버킹엄 공작에 대한 민중의 증오심이 드러났다.[5] 장남 찰스 빌리어스는 이미 1627년에 2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장남이었다.[6] 둘이 몰래 만났는데 안 왕비의 비명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왕비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고. 왕비는 적당히 썸을 타는 정도를 원했는데 버킹엄 공작이 강간하려고 했다는 설과 합의하에 간통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일로 버킹엄 공작은 두 번 다시 프랑스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되었고 안 왕비도 루이 13세의 불신을 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