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6 22:17:46

제주도 사상충 한일 공동 연구 사업



파일:1970_jeju.jpg

1. 개요2. 배경3. 진행
3.1. 어려움과 극복3.2. 일본과의 협업 및 갈등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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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과 일본의 기생충 학자들이 제주도의 말레이사상충을 연구하여 한국은 역학조사와 치료법을 확립하고 일본은 말레이사상충 숙주 모델 생물인 고양이를 확보한 연구

2. 배경

베트남 전쟁의 확전으로 동아시아의 정세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임으로써 아시아 지역의 원조 부담을 낮추길 원했다. 또한, 베트남 파병에 따른 병사들의 열대 질환을 대비하기 위해 열대 질환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의 의학적 협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5년 1월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방미 일정 중 양국은 미일 의과학 협력 사업을 합의하게 된다.

사상충과 관련한 관리 사업, 실험 연구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은 사상충 충체나 모델 생물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사업단은 실험실 동물 모델 확립을 연구 목표로 삼았다.[1] 반크롭트사상충은 일본에서 어느정도 연구가 되었지만 말레이사상충은 이미 멸종되어 일본에서도 충체를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업단은 제주도에서 말레이 사상충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하였다.[2]

1969년 서울대학교 기생충학교실의 임한종은 일본 OTCA(Overseas Technical Cooperation Agency)의 지원으로 일본의 기생충학교실을 탐방하게 되었다. 탐방중 나가사키대학 열대의학 연구소의 가타미네 교수는 제주도의 말레이사상충에 대한 공동연구를 제안하게 되었다. 임한종은 한국의 서병설 교수를 설득해 공동 연구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3]

3. 진행

1970년 4월부터 한국과 일본 기생충학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제주도에서 공동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은 제주도의 감염자들을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두어 역학조사 진행과 투약 지침 확립에 목표를 두었다. 반면 일본은 말레이사상충과 반크롭트사상충의 생물학적, 임상학적 특성을 비교, 확인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3.1. 어려움과 극복

연구자들은 사상충의 정기 출현성을 확인하고자 사업 지역인 위미리에 도착하자마자 감염자를 입원시켜 2시간마다 채혈을 하였다. 사업 초기에는 하루에 12번씩 채혈을 허락해 줄 자원자를 모집하기 어려워 사상충 보유자로 확인된 자원자만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당시 제주도 위미리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수도 및 전기설비가 열악하였고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또한 좁은 골목에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있어 밤에는 길을 잃기 딱 좋았다. 또한 주민들은 외지인과 일본에 대한 적대감, 문화차이로 연구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제주도라는 지역의 특성상 제주방언을 모르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현지에서 조력자가 필요했다.

말초혈액에서 사상충을 검출하기 위해 사상충의 활동 시간인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에 혈액을 뽑아야 하였는데 이에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또한 주민들 사이에 연구자들이 피를 팔아먹으려한다는 소문이 돌아 적대감을 극복해야만 했다. 치료제에는 부작용으로는 고열, 환각, 발작이 있어 연구자들은 투약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약 대상 가정을 돌며 체온 측정, 해열제를 투약하였다.

위와 같은어려움은 위미리 어촌계장의 동생이자 전직 이장의 딸인 현재선씨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촌계장은 해녀들 사이에서 갈등을 적절하게 중재하는 역할을 하여 지역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현재선씨는 사상충에 걸려 몸살을 앓아본 경험이 있어 무보수로 연구자들을 도왔다. 또한 그의 가족 배경을 통해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용이했고, 필요시 적절한 권위를 동원할 수 있었다.

사상충은 충체를 몸 밖으로 꺼낼 수 없어 주민들에게 시각적으로 경각심을 주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휴대용 영사기를 통해 혈액속에서 충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제주도는 열악한 환경 탓에 보여주기 어려움이 있었다. 사상충은 아니지만 구충약을 먹여 촌충을 꺼내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설득할 수 있었다.

3.2. 일본과의 협업 및 갈등


사업 초기에는 연구 결과 공동 발표 등 긴밀한 협력이 있었지만 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서로의 목표를 위해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기초적 역학조사는 한국 측 학자들이 가정을 방문하여 채혈을 진행하였고 연구소에서 한일의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한국 측은 역학조사와 치료에 관심을 가졌지만 일본 측은 사상충의 실험실 연구를 위해 모델 생물 확보를 목표했기에 서로 갈등이 생겼고 심지어 조력자 현재선씨는 일본 연구팀으로부터 자신들이 어떤연구를 하는지 밝히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였다.

4. 결과

연구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역학, 병리, 치료의 관점에서 성과를 내었다, 역학적 측면에서는 제주와 경북 내륙의 매개체를 비교하여 두곳의 매개 모기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유사한 지리 권역에서 다른 역학적 사상충이 유행 가능성을 증명하였다.[4] 병리적 측면에서는 사상충 치료제인 디에틸카바마진(DEC) 투약과정에서 림프관염, 섬망을 동반한 고열 등 기존에 기록되지 않았던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치료적 측면에서는 기존 반크롭트사상충에게 적용되던 치료법이 아니라 부작용을 고려한 말레이사상충에 맞는 투약지침이 확립되었다.

말레이사상충의 숙주 동물인 고양이를 확보하여 말레이사상충이 없는 일본, 미국의 실험실에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5] 고양이가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사상충도 시차를 적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제주도 사상충 연구가 미일 의과학 협력사업을 통해 국제적인 관심을 받아 국내의 관련 연구자들 또한 국제 기생충 네트워크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 연구를 통해 WHO의 말레이 사상충에대한 투약 용량 용법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었다.[6]
[1] 정준호, "구충록 : 기생충의 흥망성쇠로 본 한국 근현대사", 후마니타스,2023, 178페이지[2] 片峰大助, "ミクロフィラリアの定期出現性に関する実験的研究", 長崎大学風土病紀要第6巻第4号221~230京1964年12月[3] 임한종, 중량천에서 빅토리아 호 코메 섬까지(한비미디어,2013) 135-138쪽[4] Seo, "'Studies on Filariasis in Korea: Status Survey and Chemotherapy in Cheju-do," The Seoul Journal of Medicine vol. 17, No. 2, June, 1976, pp. 83-95.[5] Nakajima Yasuo and Yoshiki Aoki, "Studies on Malayan Filariasis in Che-ju Is.,Korea. 4 Experimental Transmission of Brugia malayi(Che-ju strain) to Domestic Cats, pp. 163-177.[6] WHO, Lymphatic filariasis: Fourth report of the WHO Expert Committee on Filariasis(World Health Organization, 1984), pp. 2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