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B. 맥퍼슨 James B. McPherson | |
본명 | 제임스 버드자이 맥퍼슨 James Birdseye McPherson |
출생 | 1828년 11월 14일 |
미국 오하이오주 클라이드 | |
사망 | 1864년 7월 22일 (향년 35세) |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853~1864 |
학력 | 노워크 군사학교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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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오하이오주 클라이드 출신으로 1853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1] 1854년부터 57년까지 뉴욕만, 허드슨강의 방어시설을 증축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알카트리즈 요새를 건설했다.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북군소속으로 헨리 할렉의 참모였다. 중령으로 진급후 율리시스 S. 그랜트 휘하 공병대대장으로 포트 헨리, 도넬슨을 점령하는데 기여했다. 1862년 10월에는 할렉과 그랜트의 고평가에 힘입어 소장으로 승진한 뒤 그랜트 휘하 17군단의 군단장이 되어 연방군에서 가장 젊은 고위 장교 중 하나가 되었다.
빅스버그 전역에서도 그랜트 휘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였다. 빅스버그 점령 이후 그랜트의 추천으로 정규군 준장이 되었고, 그랜트와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후임으로 테네시군 사령관이 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셔먼 휘하에서 애틀랜타 전역을 치르며 남군의 조셉 E. 존스턴과 추격전을 벌였다. 존스턴이 맥퍼슨의 사관학교 친구 존 벨 후드로 교체된 뒤 후드는 적극적으로 셔먼을 공격하여 휘하 야전군들을 각개격파하려 했다. 7월 22일 애틀랜타 전투 당일, 맥퍼슨이 셔먼의 사령부에서 회의를 가진 뒤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자신의 옛 부하들인 17군단으로 향했을 때 남군 정찰병이 우연히 이들을 발견하고 포위했다. 맥퍼슨은 항복을 거부하고 도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등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맥퍼슨은 존 F. 레이놀즈, 존 세지윅과 함께 남북전쟁 중 전사한 북군 장성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이었고, 셋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애틀랜타 전역 직전 맥퍼슨은 잠시 휴가를 내서 약혼자와 결혼하려 했지만 셔먼이 이를 불허했다. 셔먼은 맥퍼슨의 약혼자에게 맥퍼슨의 죽음을 전해야 했고,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맥퍼슨을 직접 상대했던 사관학교 동기 존 벨 후드 또한 맥퍼슨을 존중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