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군의 기병대 장군.풀 네임은 제임스 유얼[1] 브라운 스튜어트(James Ewell Brown Stuart)이지만, 애칭으로 이름의 앞 글자 J, E, B를 따서 젭(Jeb) 스튜어트로 통했다.
스톤월 잭슨과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리의 오른팔과 왼팔이라면 스튜어트는 리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명장으로 북군의 주력의 이동방향과 배치 상황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북버지니아군의 승리의 열쇠가 되었다. 서부전선의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2]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 사령관으로 꼽힌다.
훗날 그의 이름은 영국군에 의해 미국제 M3/M5 경전차에 제식명으로 명명되었다.
2. 생애
1833년 2월 6일 전형적인 미국 남부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1854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텍사스의 기병대 장교로 임관하여 아메리카 원주민 등과 싸우며 초기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존 브라운의 하퍼스 페리 습격에서 진압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전에 캔자스에서 노예제 반대 운동을 이끌던 브라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1861년 대위로 진급하지만 남부가 미연방에서 갈라지자 연방군을 떠나 남부연합군에 가담, 중령 계급을 받고 처음에는 보병을 지휘하다가 상관 토마스 잭슨에 의해 다시 기병을 맡는다.
남북 전쟁 중 적의 후방에 침투하는 대담한 위력정찰 전술을 바탕으로 앤티텀 전투, 프레드릭스버그 전투,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고, 잭슨이 전사하자 그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반도 전역과 메릴랜드 전역 등 두 번이나 북군 주력군 포토맥군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무사히 귀환했다. 이를 통해 남부연합에서는 명성을, 북부에서는 악명을 드높이고 남군의 사기를 높였지만 실제 전략적인 의미는 별로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1863년 6월 브랜디 역 전투에서 강화된 북군 기병과 교전을 벌여 큰 인명 피해만 입고 무승부를 기록하더니,[3] 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는 남군 사령관 로버트 E. 리의 애매한 명령 덕에 북군의 주력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헤매다 본대와 연락까지 두절된채 별다른 정보도 얻지 못하고 뒤늦게 합류, 전투중에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지휘 하의 북군기병대와 전투를 벌이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등 삽질을 계속하여 남군의 패배에 일조하고 만다.
1864년 5월 11일 오버랜드 전역의 옐로 태번 전투[4]에서 북군의 필립 셰리든 기병대와 조우해 전투 중 하마한 북군 병사의 근거리 리볼버 사격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하루 뒤 사망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이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항상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성격으로 자기의 전과를 늘 신문에 자랑스럽게 소개했으며 기병대 전용의 우수한 악대를 대동하고 다니면서 주둔지역의 남부 아가씨들과 함께 파티를 갖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아내와 금슬이 무척이나 좋았으며, 어릴 때의 부모님과의 약속으로 죽을 때까지 금주를 하는 일면도 있었다. 엄격하고 과묵한 성격이었던 잭슨과도 사이가 좋아서 가끔씩 잭슨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 받았다.
쇼맨십이 뛰어나고 북군을 대상으로 자주 티배깅을 했는데, 이는 스튜어트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남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 기사도를 갖춘 기사 이미지를 스스로 주의 깊게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