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라모타 Jake LaMotta | |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 자코비 라모타 Giacobbe LaMotta |
출생 | 1922년 7월 10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사망 | 2017년 9월 19일 (향년 95세) |
미국 플로리다주 어밴투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106전 83승(30KO) 19패(4KO) 4무 |
신장/리치 | 173cm / 170cm |
체급 | 미들, 라이트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링네임 | The Raging Bull, Bronx Bull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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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적
- 주요 승: 헨릭 츠미엘레우스키, 캘리포니아 잭슨 윌슨, 슈거 레이 로빈슨, 지미 리브스, 프릿지 지지치, 호세 바소라, 조지 코스트너, 콜리 웰치, 버트 라이텔, 토미 벨(3), 홀먼 윌리엄스, 밥 새터필드, 안톤 라디크, 토니 자니로, 로버트 빌메인, 마르셀 세르당, 티베리오 미트리, 로랑 두스빌
- 무승부: 조 시쿨라, 호세 바소라, 지미 에드거
3. 커리어
1922년 7월 10일 뉴욕 시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가난한 집안의 이탈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온 이민자였다. 라모타의 가족은 필라델피아에서 잠시 살았고, 뉴욕으로 돌아와 브롱스에 정착했다.라모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른 남자아이들과 싸우도록 강요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동네 어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고, 동네 어른들은 주머니 속의 돈을 링 안으로 던졌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라모타의 아버지가 돈을 모아서 집세를 내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보석상을 털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뉴욕 북부에 위치한 콕사키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복싱을 배웠다. 그 후, 짧은 아마추어 경력을 쌓았고, 1941년 19세의 나이로 프로로 전향했다.
지미 리브스와의 첫 번째 시합을 리브스의 고향인 클리블랜드에서 치렀고, 매우 논란이 많은 스플릿 판정으로 패배했다. 그전까지 라모타의 전적은 14승(3KO) 0패 1무. 판정이 발표되자, 링 주변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관중들이 20분 동안 야유를 보냈다. 경기장의 오르가니스트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여 흥분한 관중들을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후, 라모타는 같은 경기장에서 리브스와 다시 맞붙었다. 라모타는 다시 지긴 했지만, 1차전 때보다는 훨씬 논란이 적은 판정이었다.
1942년 10월 2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슈거 레이 로빈슨의 미들급 데뷔전 상대로 지목되었다. 라모타는 1라운드 로빈슨을 다운시켰지만 10라운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했다.
1943년 2월 5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올림피아 스타디움에서 10라운드로 예정된 재경기가 열렸다. 8라운드 라모타는 로빈슨의 머리에 라이트를, 바디에 레프트를 날려 로빈슨을 링 로프 사이로 보내버렸다. 로빈슨은 9번째 카운트에서 벨이 울리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라모타는 로빈슨에게 계속 펀치를 적중시키며 점수마저 앞서게 된다. 판정 결과 만장일치로 라모타의 승리가 선언되었고, '슈거 레이'는 커리어 첫 패배를 기록했다.
라모타는 로빈슨과 2차전을 펼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1943년 2월 26일, 같은 경기장에서 다시 10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7라운드 로빈슨은 다운을 당했지만 9카운트 만에 일어났고, 왼손 잽과 어퍼컷을 사용하며 치열한 접전을 펼친 끝에 근소한 점수차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라모타는 이 판정을 다소 다르게 보았고 '다음 날 군에 입대할 로빈슨에게 시합이 주어졌다'고 말했다.
1943년 3월 19일 라모타와 리브스의 3차전이 마련되었고, 장소는 '자동차 도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결정되었다. 처음 몇 라운드는 접전이었지만, 4라운드 리브스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 다음 여섯 번째 라운드에서 라모타는 리브스를 다운시켰고, 리브스는 1초 동안 쓰러졌지만 일어나자마자 잔인하게 KO를 당했다. 라모타는 리브스의 턱에 레프트를 날렸고, 그는 얼굴을 먼저 맞고 쓰러졌다. 심판이 그를 카운트 아웃시키자 리브스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1945년 2월 23일 라모타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로빈슨과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10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이전에 치른 경기 사이에 거의 2년의 간격이 있었지만, 로빈슨은 다시 만장일치 판정으로 승리했다.
1945년 9월 26일 라모타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코미스키 파크에서 로빈슨과 12라운드에 걸친 다섯 번째 경기에서 다시 만났다. 로빈슨은 매우 논란이 많은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었고, 관중 14,755명이 야유를 보냈다. 라모타는 자서전을 통해 이 판정이 여러 신문과 권투 출판사에서 광범위하게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로빈슨은 나중에 "이 시합은 내가 라모타와 치른 가장 힘든 경기였다"고 밝혔다.
1947년 11월 14일 뉴욕시에서 빌리 폭스에게 4라운드 TKO로 패배했다. 승부조작을 의심한 뉴욕주 체육위원회는 선수들의 대전료를 보류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라모타의 의사는 위원회에 라모타가 비장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고, 라모타는 폭스가 부상당한 옆구리에 펀치를 날려 부상을 입어 중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위원회에서 조작의 증거를 찾지 못한 후 대전료는 양 선수에게 주어졌으나, 라모타는 부상을 공개하지 않고 경기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1949년 6월 16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세계 미들급 챔피언십 경기에서 마르셀 세르당과 맞붙었다. 1라운드 세르당은 라모타에게 다운을 당했을 때 왼쪽 어깨가 탈골되었고, 5라운드 라모타는 손을 다쳤다. 9라운드 라모타는 손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04번의 펀치를 날렸고 세르당은 10라운드 후 코너에서 기권했다.
1949년 10월 27일 세르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는데, 이때 그는 라모타와의 재경기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1950년 6월 28일 뉴욕에서 록키 그라지아노를 상대로 첫 타이틀 방어전을 치를 예정이었으나, 그라지아노의 왼손 골절로 경기가 취소되었다.
1950년 7월 12일 뉴욕에서 티베리오 미트리를 상대로 첫 타이틀 방어에 나섰고,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으로 승리했다.
1950년 9월 13일 디트로이트에서 로랑 두스빌를 상대로 타이틀 2차 방어에 나섰다. 두스빌은 라모타가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기 이전에 그를 판정으로 꺾은 적이 있던 상대였다.
15라운드까지 두스빌은 모든 스코어카드에서 앞서며(72-68, 74-66, 71-69) 2차전에서도 승자가 되려는 듯했다. 하지만 점수가 뒤처진 상황에서 라모타는 15라운드 마지막 13초를 남겨두고 두스빌을 KO시키며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The Ring지는 이 경기를 1950년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다.
1951년 2월 14일 라모타와 로빈슨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이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복싱판 밸런타인 데이 학살로 회자된다.
▲영화 《분노의 주먹》 속 라모타의 TKO패 장면 |
▲실제 제이크 라모타 VS 슈거 레이 로빈슨 6차전 중 로빈슨의 TKO승 장면 |
세계 미들급 타이틀을 상실한 후 라이트헤비급으로 월장했으나, 초기에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라이트헤비급 데뷔전에서 아이리시 밥 머피 패배했고, 다음 경기에서 노먼 헤이즈에게 스플릿 판정패, 그 다음 경기에서 진 헤어스톤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헤이즈, 헤어스톤, 머피와의 재경기에서 모두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설욕을 마친 후 1952년 12월 31일, 대니 나디코를 상대하였다. 7라운드 라모타는 나디코가 던진 라이트에 맞고 커리어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넉다운을 기록했다. 이후 캔버스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여전히 라모타에게 불리한 상황이 이어졌고, 8라운드가 시작되기 전에 라모타의 세컨이 코너에서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 경기 후, 라모타는 1953년 한 해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
1954년 초에 복귀했을 때 조니 프리치, 앨 맥코이를 상대로 2연속 KO승을 거두었지만, 1954년 4월 14일 빌리 킬고어에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스플릿 판정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에 마이애미 비치의 콜린스 애비뉴 1120번지에 있는 술집을 소유하고 관리하면서 무대 배우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었다. 1958년 그는 마이애미에서 자신이 소유한 클럽에서 미성년 소녀에게 남자를 소개한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6개월 동안 체인 갱으로 복역했지만, 항상 이 사건에 대한 무죄를 주장했다.1960년 권투에 대한 암흑가의 영향력을 조사하던 미국 상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하도록 소환되었을 때, 마피아들로부터 타이틀전을 마련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빌리 폭스와의 경기에서 고의로 진 사실을 인정했다.
2017년 플로리다주에 있는 양로원에서 폐렴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5. 파이팅 스타일
프레싱을 하는 동안 상대를 먼저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하였으며, 라이트 바디-레프트 훅 콤비네이션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연속으로 레프트 훅을 날리는 것도 라모타의 특기 중 하나였는데, 바디에 레프트 훅을 적중시키면 상대는 반사적으로 팔을 내리게 되었고 그렇게 안면에 두 번째 레프트 훅을 날릴 수 있었다.로빈슨과의 경기가 그러했듯이 잽 카운터도 상당히 능했다. 로빈슨이 잽을 날릴 때마다 더블, 트리플 잽으로 카운터를 날리며 타이밍을 빼앗는 장면을 여러번 볼 수 있다.
또한 복싱 역사상 최고의 강철턱 중 하나로 꾸준히 언급되는 만큼 맷집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 이로 인해 상대의 펀치들을 씹으면서 정면돌파를 감행하는 브롤러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레싱 능력만큼이나 디펜스도 수준급인 선수였다. 헤드 슬립으로 대부분의 펀치들을 회피했고, 상대의 펀치 콤비네이션을 저지하기 위해서 풀 백을 한 후 클린치를 거는 영리함도 보여줬다.
6. 여담
- 폴 뉴먼, 재키 글리슨과 함께 출연한 '허슬러(1961)'를 포함해 15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허슬러에서는 바텐더 역을 맡았다.
- 어린 시절 한쪽 귀에 유양돌기 수술을 받았고 이로 인해 청력에 영향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 복무가 거부되었다.
- 식탐이 상당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선수말년엔 라이트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게 되었다.
- 7번의 재혼과 가정 폭행을 많이 저질렀다.
- 남동생 조이 라모타가 매니저였다. 남동생 역시 한때 프로 복싱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32승 5패 2무의 전적을 기록했다. 영화와 다르게 형제사이는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 라모타의 두 아들 모두 1998년에 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했다. 제이크 라모타 주니어는 2월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조셉 라모타는 9월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 분노의 주먹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마피아들과의 친분이 있었는데, 1988년엔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록키 그라지아노와 함께 악명 높은 마피아의 재판에 방청객으로 나타나 그의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