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24 00:39:25

제리 쿼리

파일:Boxer-Jerry-Quarry-1971.jpg
제리 쿼리
Jerry Quarry
출생 1945년 5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이커즈필드
사망 1999년 1월 3일 (향년 5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템플렌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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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66전 53승(32KO) 9패(6KO) 4무
신장/리치 183cm / 183cm
체급 크루저, 헤비급
스탠스 오서독스
링네임 Irish
The Bellflower Bomber

1. 개요2. 전적3. 커리어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전적

3. 커리어[1]

3살 때 아버지 잭 쿼리로부터 첫 복싱 글러브를 선물받았고 5살 때 첫 경기를 치렀다. 10살 때 주니어 골든 글러브 타이틀을 획득했고 그 후 3년간 타이틀을 차지했다.

1965년 내셔널 골든 글러브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토너먼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주목받았다. 상대 선수 5명을 모두 KO시키며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토너먼트 기록을 세웠다. 준결승에서 린 파를, 결승에서 짐 돈링거를 꺾었으며 둘 다 턱뼈가 부러졌다. 아마추어 전적 170승 13패를 기록했다.

아버지와 베테랑 파이트 매니저인 조니 플로레스의 지휘 아래 1965년 5월 19세의 나이로 프로로 전향했다. 이후 12연승을 거두었고 1965년 11월 토니 도일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1966년에는 토니 알론지를 상대로 2무를 기록했고 에디 메이컨에게 만장일치 판정패하며 프로 첫 패배를 당했다. 쿼리는 자신의 패배를 컨디션 불량에 기인했고 컨디션 불량으로 인해 경기에서 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1967년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 육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하여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박탈당하자 쿼리는 공석이 된 타이틀을 꿰차기 위해 WBA가 기획한 8강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967년 10월 첫 대전 상대는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었다. 쿼리는 4개월 전 패터슨과의 1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리매치에서 머저리티 판정승을 거두었다. 3개월 후 준결승에서 태드 스펜서를 12라운드 TKO시켰다.

1968년 4월 결승전에서 지미 엘리스에게 머저리티 판정패를 당했다. 자신의 퍼포먼스에 실망한 쿼리는 나중에 "그들이 판정을 나에게 내렸다면, 나는 그것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직후 쿼리는 자신이 척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엘리스와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9년 3월 버스터 매티스를 상대로 12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했고 그해 6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 프레이저와 맞붙었다. 프레이저는 뉴욕, 매사추세츠, 일리노이, 메인, 펜실베이니아, 텍사스의 6개 주에서 챔피언을 지냈다. 쿼리의 오른쪽 눈 아래 커팅으로 인해 7라운드 종료 후 경기가 중단되면서 프레이저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이 경기는 The Ring에서 올해의 대결로 선정되었다.

2경기 연속 초살 KO승을 거뒀으나 1969년 12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추발로에게 7라운드 TKO패했다. 쿼리는 6개월 후 가든으로 돌아와 프로 전적 24승 무패 24KO의 맥 포스터를 상대로 6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

1970년 10월 쿼리는 3년간의 활동 중단 후 링으로 복귀한 알리의 첫 복귀 상대로 지목되었다. 쿼리의 왼쪽 눈에 난 커팅으로 인해 3라운드 종료 후 경기가 중단되었고 알리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이후 6연승을 거두었고 1972년 6월 알리와 리매치를 가졌지만 이번에도 알리에게 우위를 빼앗기며 7라운드 TKO패했다.

론 라일을 상대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어니 셰이버스를 1라운드 TKO시키는 등 6연승을 거뒀고 1974년 6월 프레이저와 리매치를 가졌다. 그러나 프레이저에게 구타당하다가 5라운드 TKO패했다.

복싱 선수로서의 경력이 쇠퇴해지자 쿼리는 술과 코카인에 손을 대었고 반사신경이 둔화되면서 링에서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1975년 3월 켄 노턴에게 5라운드 TKO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쿼리는 그동안 210만 달러를 벌었지만 마약과 알코올 남용, 그리고 세 번의 결혼으로 인해 전부 탕진했다.

1977년 11월 링으로 복귀하여 로렌조 자논을 상대로 처음 7개의 라운드에서 열세를 보이다 9라운드 TKO승을 거두었고 이 경기 이후 두 번째 은퇴 선언을 하였다. 1983년 다시 복귀하여 두 명의 평범한 상대를 물리쳤으나 두 번째 경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머저리티 판정승을 거둔 후 다시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1992년 마지막으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클럽 파이터 론 크랜머에게 만장일치 판정패했다. 쿼리는 이 경기에서 대전료 1,050달러를 받았다.

1983년 복귀 전 복싱으로 인한 뇌 손상에 대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 작성을 위해 검사를 받았다. 그의 신경학적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CAT 스캔과 신경심리학적 결과는 좋지 않았다. 50세 때에는 치매 증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1999년 1월 5일 사망했다. 12월 28일에 폐렴으로 입원했고 심장마비를 겪었다. 쿼리가 침상에 누워서 튜브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의사들에게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줄 것을 요청했다.

4. 파이팅 스타일

앞손 위주의 아웃파이터로 부지런한 풋워크와 잽을 계속던저 상대의 움직임을 끌어내다가 상대가 들어오면 피벗으로 사각을 먹고 오른손 카운터를 던졌다. 상대가 거리를 뚫고 들어오면 화끈하게 포켓 난전을 걸어 상대를 박살내는 능력도 갖췄다.

단점은 헤드 무브먼트는 괜찮으나 가드를 활용한 안면 방어자체가 크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정타가 생각보다 많은 편이였다.

5. 여담

  • 그의 묘비명에는 'Great White Hope'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맏형인 지미 쿼리는 1994년 권투선수치매를 위한 제리 쿼리 재단(Jerry Quarry Foundation)을 설립했다.
  • 남동생 마이크[2]와 바비 쿼리도 복싱선수로 활동했으며 두 형제 모두 치매에 걸려 마이크는 2006년에 사망했고 바비는 투병중에 있다.


[1] 출처: BoxRec[2] 한때 라이트헤비급 컨텐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