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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번째 이야기
『얼어붙은 검』 제로
"자자, 빨리들 나오세요."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베이가스 코퍼레이션의 경호대원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도로공사에 차출된 인부들의 집이었다. 중무장한 경호대원들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밤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겨울 악몽을 대비해 경호대가 동원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사오세요."
"오냐. 아버지 다녀오마."
한 인부가 어린 아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경호대원들은 이 부자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부가 향하는 곳이 도로공사장이 아니라 베이가스의 위장이나까.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런 일에 동요하면 악의 부역자 따위는 못 해먹지. 이건 일일 뿐이다.
그렇게 경호대원들은 무디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와! 얼음 가면이다!"
"!?"
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한마디에 그들은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아이가 겁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서 경호팀장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경호팀장 제로.
베이가스에게 고용된 전직 용병. 눈꽃마을 출신이 아닌 외지인이기 때문에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무성하기만 했다. 전장을 떠돌던 살인귀다. 일인전승되는 비전검술의 계승자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검객이다. 현상수배범인데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하드코어사에 들어왔다 등등.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이야기 뿐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로를 무서워하는 건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도 제로를 무서워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오직 아이들뿐이었다.
아이들은 제로를 얼음 가면이라 부르며 영웅처럼 여겼다. 아이들의 세상에선 얼음 가면은 겨울 악몽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로 통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가면이 멋있게 생겼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이유였지만 행여 아이의 행동이 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 경호대원들은 잽싸게 아이를 등 뒤로 숨겼다. 아이가 얼음 가면을 보고싶다고 기웃거릴 때마다 경호대원들은 필사적으로 아이의 시선을 차단했다.
"충성! 팀장님! 막, 마지막 집까지 모두 방문 완료했습니다."
"10분내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대원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그들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역시 아이의 손가락질에 기분이 나빠진 건가? 설마 여기서 칼을 뽑으려는 건 아니겠지?
대원들의 눈은 저절로 그가 차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검은 '우우우웅'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역시 뽑을 셈인가?
경비대원들이 두 눈을 질끈 감는 것과 동시에 제로는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아니, 당장 움직여."
제로의 대답을 들은 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경호팀장이 손짓이나 턱짓이 아니라 육성으로 대답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제로가 입을 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용주인 베이가스가 말을 걸 때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일 뿐, 하루에 다섯 마디 이상 하는 걸 듣기 어려울 정도로 과묵했다.
그런 그가 당장 움직이라고 재촉했다? 이건 진짜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다.
"시, 실시!"
경호대원들은 복창하더니 인부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로는 골목의 벽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지붕 위를 달리고 있던 겨울 악몽, 디오를 발견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 앞을 가로막은 제로는 사나운 얼굴로 디오를 맞이했다.
"겨울 악몽.."
"......"
두 사람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 번칙적으로 뽑혀져 날아드는 얼음의 검과 겨울 악몽의 손에 쥐어진 얼음 낫이 충돌하며 그 충격파가 일어났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며 얼음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얼음의 칼과 얼음의 낫이 대기를 가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지붕 위에 소복하게 쌓여있던 눈이 다시 눈발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았다. 두 사람은 작은 눈보라가 되어서 몇 번이고 충돌을 반복했다.
"비켜라."
디오의 말에 제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베이가스에게 고용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신분세탁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제로가 원하는 건, 아니 제로의 검 그란다르크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겨울의 정수.
지금의 디오를 겨울 악몽으로 되살린 그 힘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란다르크를 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그란다르크가 또 다시 거세게 울기 시작했다. 제로님 입을 열어 그란다르크의 말을 디오에게 전했다.
"겨울의 정수를 내놔라. 그럼 내 파트너가 널 그냥 보내줄거다."
"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제로는 디오를 노려봤다. 그래, 순순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력으로 빼앗는다. 오늘에야 말로 겨울 악몽을 그란다르크의 제물로 만들어주리라. 얼어붙은 검이 포효했다. |